■ 산타 마리아 마죠레(성모 마리아) 대성당
431년 에페수스 종교회의에서 마리아를 ‘성모’로 인정하고 성모를 부정하는 이단을 분쇄하자는 합의를 이끌어낸 로마 성당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음 해에 에스 퀄리노 언덕 위 리베리아나 성당을 개조하여 성모 마리아에 봉헌하였다. 교황 식스투스 3세는 주의 어머니 마리아 교의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 탄생과 유년기를 묘사한 모자이크화를 제작하였고, 더 큰 성모 마리아 성당은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 성당에 마죠레(최대의)란 수식어를 붙여놓았다.
길이가 86m인 이 성당의 내부는 전형적인 로마 시대 바실리카 구조를 간직하고 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더해져 독창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지만, 내부구조 자체는 거의 변형되지 않은 5세기 건축물 그대로다. 특히 이교 신전들에게 옮겨다 세운 40개의 대리석 기둥들이 바실리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로마 인들은 바실리카 양식의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로마 시내의 큰 성당들을 바실리카라 부르는데, 건축 면에서 바실리카라 불릴 자격이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성당들 중 하나가 산타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이다. 이 성당의 위상이 워낙 높은 까닭에 바티칸 교황청은 무솔리니 정부와의 대화해 시에도 이 성당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앙 복도 양쪽 36개의 이오니아식 기둥들은 아벤티노 언덕의 유노 신전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으로 기둥 위에는 직사각형 모자이크화 36장이 벽을 채우고 있는데, 왼쪽 벽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야기가, 오른쪽 벽에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중앙 복도가 끝나는 지점의 개선문 위에 예수 탄생과 유년기가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로마 시대 방식이 남아 있으면서도 좀더 생동감이 있고 부드러운 5세기 모자이크화로 앞에서 이야기한 푸덴지아나 성당의 4세기 모자이크화, 비잔틴 재정복의 영향으로 금과 사파이어가 재료로 쓰인 프라쎄데 성당의 9세기 모자이크화와 더불어 초기 성당이 보유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앙 천장의 무장한 모습의 알렉산더 6세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라이벌인 줄리아노 다 산 갈로[Giuliano da San Gallo]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천장은 15세기 말에 장식되었는데, 장식에 사용된 금은 스페인 왕 페르디난도와 여왕 이사벨라가 알렉산더 6세에게 선사한 것으로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 선박이 처음 아메리카에서 실어온 금이다. 천장 쿠폴라에는 마돈나가 달 위에 발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달은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가 발명한 망원경으로 본 달의 모양이다.
13세기에 후진을 개선 아치형으로 바꿨는데, 마리아의 승리를 그린 후진 모자이크화는 1295년 야코포 토리티가 완성한 후기 비잔틴 양식의 대리석 조각 모자이크다. 반면 로마식의 모자이크는 바닥에 대리석으로, 벽에는 유리반죽을 사용했다. 엄격하고 신비로운 비잔틴 양식에 비해 유연하고 현세적인 표현이 치마부에와 지오또 같은 고딕 말기 르네상스 초기의 피렌체 미술가들이 사용하게 될 표현 기법을 예고한다.
그 아래 4장의 대리석 부조 그림은 이 성당의 기원에 대한 전설과 관련해 15세기에 추가된 것으로 그중 하나는 ‘눈의 기적’을 묘사하고 있다. 크리스트교 전설에 의하면 352년 8월 성모 마리아가 자식이 없는 귀족 부부의 꿈에 나타나 다음날 아침 눈이 내리는 곳에 성당을 세우라고 했고, 교황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튿날 이 언덕에 눈이 내려 교황과 그 귀족이 성당을 세웠다는데, 이 성당이 마리아 성당으로 개조되기 전에 있던 리베리아나 성당을 가리킨다. 한편 얼마 전 보수작업 중에 지붕 기와들 가운데서 네로 시대 공장 마크가 찍힌 기와가 발견되어 리베리아나 성당이 로마 시대 바실리카 건물이라는 이견도 나오고 있다. 로마 시대 바실리카와 초기 성당의 건물 구조가 같아서 성당도 바실리카라 불리었다.
16세기에 지어진 세례당의 왼쪽 벽에는 16세기 초에 파견된 콩고 대사의 검은 대리석 흉상과 무덤이 있다. 베르니니가 이 흉상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어서 나보나 광장의 무어 인 분수도 이 흉상의 모습으로 조각했다는 설이 있다. 측면 복도 끝에 있는 방이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16세기 말 도메니코 폰타나가 식스투스 5세를 위해 설계하였고, 피우스 5세와 식스투스 5세의 무덤이 들어있다.
왼쪽 복도 끝 파올리나 예배당에는 파울루스 5세와 클레멘트 8세의 무덤이 있다. 보르게제 가문의 이 예배당은 이 가문 출신인 파울루스 5세가 바로크 양식으로 꾸민 가장 호사스러운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 지하에 있는 납골당에는 보르게제 가문 인물들의 무덤이 있는데, 보르게제 가문에 시집간 나폴레옹의 누이동생 파 올리나의 시신도 이곳에 묻혔다.
중앙 복도 오른쪽 끝에는 두 번째 기둥과 천 개 사이 바닥에 매너리즘 시대와 바로크 시대를 풍미한 피에트로 베르니니와 잔 로렌초 베르니니 부자의 무덤이 아무 장식도 없이 이름만 새겨진 대리석 관 뚜껑으로 덮여 있다. 코스마 문양의 대리석 바닥은 12세기에 깔린 것이고, 75m 높이로 로마에서 가장 높은 로마네스크 종탑은 1377년에 세워졌다. 성당 정면은 1750년 페르디난도 푸가가 대칭형의 건물 중앙에 주랑 현관 건물을 삽입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전기 바실리카 건물 구조에 신비감을 더해주는 고중세기 모자이크화와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과 장식들이 어울려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산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은 초기 성당들 중에서도 예술, 건축 면에서 가치가 가장 높은 성당이라 할 수 있다.
성당 앞 광장에 우뚝 선 대리석 탑은 포로 로마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에 남은 유일한 기둥을 1614년에 옮겨 온 것이고, 후진 뒤 계단 아래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퀴리날레 광장의 오벨리스크와 짝을 이뤄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에 있던 것으로 이집트에서 옮겨 온 것이 아니라 로마에서 자체 제작된 것이다.
1966~1971년에 이 성당 지하 6m 선에서 37.3 ⅹ 30m 크기의 로마 시대 회랑 정원이 발견되었다. 벽면의 대리석 판 벽화들이 농촌 풍경을 소재로 한 달력 그림들이라 ‘산타 마리아 마죠레의 달력(Calendario di Santa Maria Maggior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발굴 초기에는 이 회랑 정원을 리비아 유개 시장(Macellum Liviae)으로 단정했으나, 실제 이 유개 시장은 빅토리오 광장 쪽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축 자재의 연도로 보아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23년 사이에 지어진 공용 목적의 정원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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