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수로7 수도 르네상스와 도시 정비 사업 (3) 핀초 언덕에서 바르베르니 광장을 지나 퀴리날레와 비미날레를 가로질러 에스퀼리노 언덕 정상에 이르는 이 도로는 완성된 후 교황의 본래 이름을 따 펠리체 길(Via Felice)이라 불렸는데, 훗날 거리의 길이를 세분할 필요가 생기자 첫 부분은 교황의 공식 이름을 따 시스티나 길(Via Sistina)로 바뀌었고, 바르베리니 광장에서 퀴리날레 언덕을 가로질러 나치오날레 가도와 만나는 길은 언덕 위 사거리의 네 모퉁이에 각각 테베레, 아르노, 디아나, 유노의 조각상으로 꾸민 르네상스 말기의 분수가 있어 콰트로 폰타네 길(Via delle Quattro Fontane)이라 불리게 되었다. 콰트로 폰타네 사거리는 3개의 오벨리스크가 동시에 보이는 유일한 곳이다. 식스투스 5세가 죽은 후 1590년대에 시작된 도로.. 2021. 2. 15. 수로 르네상스와 도시 정비 사업 (2) 식스투스 5세의 재정주 조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경제력이 회복되어 거의 1,000년간 작동하지 못했던 인위적인 물 공급 체계가 회복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1453년 교황 니콜라스 5세가 피렌체 출신의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에게 파괴된 고대 수로들 중 하나인 아쿠아 베르지네 수로를 복구하는 과업을 맡겼고, 그로부터 한 세기 반이 지난 식스투스 5세 때 이 사업이 완결됨으로써 이 구역은 비롯한 언덕 지대의 물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원래 이 수로는 로마가 몰락한 후에도 가동되어 테오도릭의 고트 족 왕국의 시대에도 물이 깨끗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나, 537년 재정복 전쟁 중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중세에는 고대와 달리 마르스 평원 지역이 인.. 2021. 2. 13. 수로 르네상스와 도시 정비 사업 (1) ■ 수로 르네상스와 도시 정비 사업 아비뇽 유수(1309~1377년)와 대분열(1378~1417년)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겪은 후 로마 시는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식스투스 4세, 알렉산더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 등의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이 등장하면서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고, 그들의 학예 보호시책에 따라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전 고대를 출발점으로 삼은 르네상스는 공간뿐 아니라 선의 측면에서도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와, 기하학과 비례 개념이 이 시대 작품들에 현실감과 조화를 부여해 주었는데, 이러한 시대정신은 로마 시의 도시계획과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테베레 강 왼쪽 기슭의 정비사업이 이루어졌고 바티칸 평원.. 2021. 2. 12. 로마 수로 문화의 마비 ■ 수로 문화의 마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 5월 11일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 비잔티움을 제국의 동방 수도로 정함에 따라 수도 로마의 권위는 다소 추락할 수밖에 없었으나, 최대 도시의 면모를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4세기 중반 로마 시에는 11개의 목욕장과 800여 개의 공중목욕탕, 1,152개의 분수에, 29개의 대로와 37개의 성문, 8개의 다리가 유지되었고, 423개 동에 190개의 곡물창고와 2개의 대시장, 254개 방앗간이 있었다. 이로부터 두 세대 후인 410년에도 로마 시에는 11개 수로가, 1,212개 분수와 11개의 목욕장을 포함한 937개의 공중목욕탕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호노리우스(Honorius) 황제(395~423년)가 404년 서방 수도를 북동부 항구 도시 라벤나(Ra.. 2021. 2. 11.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