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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86

[리뷰]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_권은중 볼로냐. 교육과 맛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2년 전 사촌 형, 여자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의 아름다운 마을 돌로미티를 가기위해 로마에서 차를 렌트해서 약 10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을 했었는데, 그때 중간 휴식장소로 정했던 곳이 볼로냐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을 떠올리며 볼로냐에서 제대로 된 볼로레제 파스타와 라자냐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운전해서 도착한 그 곳. 정말 사진 그대로 볼로냐는 아름다운 붉은 지붕의 도시였고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잠시 들르면서 조금 더 많은 볼로냐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이 책은 나의 추억을 되살아나게 해주는 매개체였으며 또한 왜 볼로냐가 맛있는 도시인지 그리고 왜 이탈리아 음식.. 2021. 6. 10.
미켈란젤로_ 부오나로티 가 (2) 1508년 여름에 가족 중에서 미켈란젤로에게 걱정을 끼친 것은 비단 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큰아버지 프란체스코 부오나로티가 사망한 것이다. 화가가 되겠다는 미켈란젤로를 흠씬 두들겨 팬 숙부들 중 한 명이던 프란체스코의 인생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환전상으로 오르산미켈레 바깥에 야외용 테이블을 하나 갖다 놓고 장사를 했는데 비가 오면 옆에 재단사 가게에 테이블을 바짝 붙여 놓고 장사를 했고, 벌이도 신통치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카산드라라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로도비코도 미켈란젤로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결혼 후 두 형제 부부는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런데 프란체스코가 죽자, 카산드라가 느닷없이 로도비코 일가를 상대로 4백 두카트에 달하는 결혼 지참금 반환 소송을 낼 거라.. 2021. 3. 23.
미켈란젤로_ 부오나로티 가 (1) 미켈란젤로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는 우울증과 자기연민. 부오나로티 가가 옛 귀족가문의 자손이라는 속물적 확신 밖에 없다시피 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부오나로티 가 사람들이 카노사 왕실의 직계 후손이라고 확신했다. 이 주장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카노사 가문은 대백작 부인인 토스카나의 마틸다를 조상들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워 왔다. 돈과 학식이 모두 풍부했던 마틸다는 이탈리아 어, 프랑스 어, 독일어에 능통했는데, 편지를 쓸 때에는 꼭 라틴어로 했고, 필사본의 수집가였으며, 중부 이탈리아 땅의 대부분을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마틸다는 꼽추인 고드프레이와 결혼해, 그가 살해될 때까지 레조넬에밀리아 부근의 성에서 살았다. 그리고 1115년 사망하면서 소유한 영지의 전부를.. 2021. 3. 19.
미켈란젤로_ 조수들 (2) 어느 늦은 봄날, 피에로 로셀리가 천장에서 옛 석고를 뜯어내는 작업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프레스코 선발대가 루스티쿠치 광장의 공방에 도착했다. 그러나 27세로 화가 명단에 포함된 4명 중에서 최연소이기도 한 건축가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는 이미 로마에 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흉상과 닮았다고 해서 아리스토틸레라 불렸던 바스티아노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조카였는데,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켈란젤로에게 추천되었을 것이다. 어릴 적인 1494년 기를란다요가 죽는 바람에 더 이상 배울 기회를 놓친 바스티나오는 기를란다요의 아들인 리돌포 밑에서 회화를 배운 후에 미켈란젤로의 경쟁자 중 한 명인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 들어갔다.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의 페루지노 조수직은 단명으로 끝났다. 바스티.. 2021.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