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미켈란젤로_ 음모 (1)

by TES leader 2021. 3. 3.
728x90
반응형

미켈란젤로_ 음모

 

 

미켈란젤로와 브라만테는 둘 다 재능이 특출 나게 빼어난 데다 대단한 야심가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지만, 그 외에는 다른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사교적인 브라만테는 근육질 몸매에 오뚝 솟은 코, 야성적으로 흐트러진 흰 머리칼을 가진 미남이었다. 거들먹거리고 빈정대기도 했지만, 교양이 풍부하고 순발력도 있는, 매우 쾌활하고 너그러운 남자였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브라만테는 훗날 엄청난 부를 모았다. 그러나 사치의 취향도 함께 커져, 나중에는 험담꾼들에게서 어떤 도덕심도 통하지 않을 정도라는 악담을 들어야 했다. 미켈란젤로가 루스티쿠치 광장 뒤에 조그마한 공방에서 평범한 생활을 꾸려갈 때, 브라만테는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바티칸 북쪽의 교황 별궁 벨베데레(Palazzo del Belvedere)에 있는 화려한 숙소에서 친구들과 향연을 즐겼다. 브라만테는 호화 저택 창을 통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 진행 상태를 지켜보았다. 그런 그와 절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로 그는 브라만테를 도미노라고 불렀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의 프레스코라는 어려운 일을 떠맡은 것이 브라만테의 음모 때문이라는 설은 헌신적인 제자였던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의 말에 근거했다. 콘디비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페스카라 근교 리파트란 소네 출신의 화가였는데, 미술가로서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1550년쯤 로마로 와, 바로 미켈란젤로의 문하로 들어가 신뢰를 얻어 함께 살기도 했다. 1553년 스승이 78세가 되자, 콘디비는 <미켈란젤로의 생애 The Life of Michelangelo>라는 책을 펴냈다. 콘디비는 미켈란젤로가 직접 구술한 이야기들로 엮은 <살아 있는 신탁 The Living Oracle>을 토대로 이 일대기를 저술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술사가들은 이 책이 미켈란젤로의 양해뿐만 아니라 직관적인 관여로 쓰인 만큼 그의 주장에 회의적이다.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친구이자 숭배자이며, 아레초 출신의 화가 겸 건축 설계가인 조르조 바라리(Giorgio Vasari)는 브라만테에 대한 콘디 비의 비판을 상당 부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책이 나오고 15년 후, 이미 1550년에 출판한 자신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생애 Lives of the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라는 저서의 내용 중5만 자에 달하는 미켈란젤로의 일대기 부분을 새로 고쳐 썼다. 이때부터 브라만테에게 악당의 이미지가 씌워지기 시작했다.

아레초 출신의 화가 겸 건축 설계가인 조르조 바라리 (Giorgio Vasari)

미켈란젤로는 필요한 경우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거나 중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기량이 출중한 미술가들을 의심하거나 따돌려서 불쾌하게 하거나 적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콘디 비와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품은 브라만테에 대한 시기와 의심에 영향을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수주 뒤에는 그 같은 추악한 음모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브라만테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건을 율리우스에게 들이민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관심을 영묘 조각 작업에서 딴 데로 돌리려는 악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콘디 비는 강변했다. 콘디비에 따르면, 건축가 브라만테는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진 것이 심히 못마땅했다. 또한 교황의 영묘라는 초대형 조각 작업을 완성하는 날이면, 미켈란젤로는 세계 최고의 미술가라는 난공불락의 절대적인 영예를 거머쥘 것이라는 두려움에 찼다. 따라서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대한 주문을 거부해 교황의 분노를 사거나, 프레스코에 겁 없이 덤벼들었다가 경험 부족으로 참담하게 실패하기만을 고대했다. 둘 중 어느 경우든 간에 바티칸 궁에서 미켈란젤로가 그때까지 쌓아온 명예와 지위는 한순간에 치명상을 입고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베드로 대성당 신축공사가 본격화되자, 미켈란젤로는 건축 총책임자인 브라만테가 자신의 성공을 방해하고, 심지어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는 한밤에 피렌체로 줄행랑을 친 직후, 줄리아노 다 상갈로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향한 살해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섬뜩한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도망친 것이 단지 교황의 무례한 처사 때문만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다른 뭔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털어놓고 싶지 않군요. ∙∙∙ 거기 그대로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내 무덤이 교황의 것보다 훨씬 먼저 세워졌을 겁니다. 물론 이렇게 단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어요. 황망하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랍니다.”

브라만테가 영묘 작업을 훼방 놓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주장의 근거로 미켈란젤로가 내놓은 것 중 하나는 브라만테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부실공사가 탄로 날까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콘디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탕아로 악명이 자자했던 브라만테가 예산을 물 쓰듯 낭비해 결국 싸구려 자재들로 벽이나 기초공사를 부실하게 하거나 설계대로 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당시 미술가들이라고 해서 싸움이나 살인사건에 연루된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피렌체의 한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도메니코 베니 치아노는 동료 화가인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질투를 사 분기탱천(분한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 격렬하게 북받쳐 오름.)한 그의 주먹에 얻어맞아 죽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도 언젠가 조각가인 피에트로 토리 지아노와 언쟁을 벌이다 강펀치에 코피가 터진 적이 있다. 토리지아노는 훗날 그의 코와 연골이 내 주먹에 비스킷처럼 박살 나는 느낌이었다.”라고 그때의 일을 회고했다.

상황이 아무리 그렇게 보여도 미켈란젤로가 브라만테 비록 야심가이긴 해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참고해 볼 때, 기본적으로 온후한 인물이었다. – 에게 품은 두려움과 적개심은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오히려 미켈란젤로의 지나친 망상이거나 로마에서 황급히 달아난 데 대한 구차한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콘디 비와 바시리는 자신의 저서에서 미켈란젤로를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특정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했다. 그래서 브라만테 같은 질투심에 찬 경쟁자들이 온갖 책동을 벌였지만, 결국에는 이 조각가가 미술의 최고봉을 정복한 것처럼 기술했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을 참고해 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1506년 봄, 교황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작업을 미켈란젤로에게 맡기는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브라만테가 떠맡은 역할은 기실 미켈란젤로나 그의 충성스러운 전기작가들의 판단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줄행랑을 친 지 1~2주가 지난 어느 토요일 저녁, 브라만테는 교황과 함께 만찬을 즐겼다. 만찬장의 분위기는 의심할 나위 없이 매우 유쾌했다. 두 사람 모두 소문난 식도락가였다. 율리우스는 뱀장어 고기와 캐비아, 새끼돼지고기를 입에 한껏 넣고 씹어 삼킨 후, 그리스나 코르시카 산 포도주로 입 안을 헹구었다. 브라만테 또한 연회를 즐기는 인물로 이런 자리에서는 의례 시를 읊거나 즉흥시를 한 수 지어 초대한 손님들을 즐겁게 했다.

만찬을 끝낸 두 사람은 새 건물의 도안과 건축 계획의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교황 율리우스의 원대한 포부 중 하나는 로마의 옛 영광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로마는 본디 ‘카푸트 문디(Caput Mundi)’, 즉 세계의 수도였다. 그러나 1503년 율리우스가 교황에 선출되었을 당시만 해도 이 호칭은 어디까지나 공염불('신심(信心) 없이 입 끝으로만 외는 염불'이란 뜻)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는 아예 거대한 폐허로 바뀌어 있었다. 로마 황제들의 궁전이 있던 팔라티네 언덕은 산산조각 난 돌 부스러기 밭으로 바뀌었고, 농부들이 그위에다 포도밭을 일구었다. 카피톨리네 언덕은 중턱에서 풀 뜯는 염소들 때문에 산양의 언덕(Monte Caprino)으로, 포룸은 풀어놓은 가축떼 때문에 목초지(Campo Vaccino)로 불렸다. 한때 30만 명이 넘는 고대 로마 시민이 모여 전차 경주를 보며 열광하던 원형 경기장(Circus Maximus)도 지금은 채소밭이 되고 말았다. 옥타비아 회랑에서는 상인들이 생선을 팔고,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의 지하 통로는 피혁 업자들의 터전이 되었다. 어느 곳에서나 한대 융성했다가 사라진 문명의 잔해로 남은 부서진 기둥과 무너져 내린 아치들이 눈에 띄었다. 고대 로마인들이 세운 개선식 아치는 원래 30개가 넘었지만, 이제 고작 3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수돗물을 공급하는 13개의 대수도 관로 중에는 아쿠아 베르지네 수도만이 겨우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식수로 티베르 강물을 사용한 로마 주민들은 자연히 주거지를 티베르 강변으로 하고, 강에다 쓰레기나 오물을 갖다 버리고, 하수관도 연결했다. 오염된 강물이 범람하면 집들이 침수되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모기가 말라리아를, 쥐가 흑사병을 옮겼다. 바티칸 주변 지역은 위생상태가 더 나빴다. 티베르 강 인접한 데다 더 오염된, 산탄젤로 성을 둘러싼 수로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