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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로마의 실용적 종교관 -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 / 화해의 신전

by TES leader 2020.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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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용적 종교관

로마 인들의 실용적, 현실적 종교관은 로마 시내에 세워진 수많은 신전들의 이름 몇 가지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다. 캄피돌리오 언덕 위 신의의 신전(Aedes fidei)을 비롯해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의 행운(Fortuna)의 신전,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 자리에 있었던 희망(Spes)의 신전, 퀴리날레 언덕의 건강(Salutaris)의 신전, 심지어 산탄드레아 델라 발레 성당 옆에 좋은 일(Bona)의 신전 등 온갖 좋은 의미의 개념을 다 신으로 모셨을 뿐 아니라, 로마 광장의 화해(Concordia)의 신전이나 황제들의 광장의 평화(Pax)의 신전, 복수자 마르스(Marte Ultore) 신전 등 역사적 사건을 기념비가 아니라 신전을 세워 기렸을 정도였다.

 

 

  •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Largo di Torre Argentina)의 신전 유적

베네치아 광장에서 바티칸 방향으로 나 있는 플레비쉬토 길을 따라 500m정도 걷다 보면, 왼쪽에 신전 기단들과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은 1926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이탈리아 제국 건설의 야망을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에 결부시키려는 의도로 베네치아 광장을 중심에 두고 태양로와 해양로를 비롯한 대로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유적지이다. 바티칸으로 가는 대로 건설은 파시스트 정권과 바티칸 교황청 사이의 상징적인 관계 개선의 의도 있었다. 그 사이의 중세 가옥들을 철거하다 찾아낸 이 유적지를 놓고 정부와 고고학계는 몇 년 동안 마찰을 빚었다.

이 광장에는 공화 정기의 신전 유적 네 채와 이후 건물들의 유적이 있는데, 신전들에 대한 확정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들을 편의상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A, B, C, D 신전이라 부른다. 원래 광장 바닥은 응회석으로 덮여 있었으나 80년 마르스 평원 지역을 전소시킨 화재 이후 도미티아누스 황wp가 석회화 석판으로 교체하였는데, 중세기 종탑 토레 아르젠티나가 서 있는 남동쪽 모서리 부분에 원래의 바닥 흔적이 남아 있다.

A 신전은 1차 포에니 전쟁 중 에가디 전투에서 카르타고 인들을 물리친 기념으로 기원전 241년 루타티우스 카툴루스[Q. Lutatius Catulus]가 건축한 유투르나[Iuturna] 신전으로 추정된다. 전면에 6개의 기둥이 있는 전형적인 직사각형 신전 건물로 발굴 시 중세 시대에 그 위에 들어선 산 니콜라 성당을 철거하였는데, 이 성당의 흔적이 후진부의 둥근 벽으로 남아 있다.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B 신전은 가장 나중에 들어선 것으로 그날의 행운(Fortuna huiusce diei)’이라는 이 신전의 이름은 로마 인들의 독특한 종교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신전도 카툴루스가 세웠다고 하는데, 아마도 A 신전을 지은 카툴루스의 직계 후손이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마리우스와 함께 기원전 101년 콘술직을 맡아 북방의 킴브리 족을 물리친 카툴루스는 베르첼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전투 당시의 행운을 기리기 위해 신전을 세워 봉헌하였다. 원래 18개의 기둥이 받치는 원형 신전(톨로스)이었는데 바닥 모자이크와 6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C 신전은 기원전 4세기 말 ~ 3세기 초에 세워진, 이 유적지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다. 페로니아[Feronia] 신전으로 추정되는 이 신전의 뒷면은 벽으로 되어 있으나 양 측면에는 기둥들이 서 있는, 신전 건축물로는 과도기적인 구조다. D 신전은 대부분 플로리다 가도 아래에 묻혀 있는 기원전 2세기 초의 건물로 이 광장에 있는 신전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A 신전과 B 신전 사이에 직사각형 벽돌 건물의 잔해가 널려 있다. 이 건물을 제정 시대에 세워진 E신전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는데, 사실은 공화정 말기에 세워진 관청 건물로 두 칸으로 나눠진 이 건물 안에 마르스 평원 지역 수로 관리소와 곡물 배급소가 있었다. A 신전 뒤에 벽돌 건물(F)은 제정기의 공중화장실로, 홈이 파인 기다란 석회화 돌판이 남아 있다. C 신전 뒤에도 공중화장실 유적(H)이 있다.

B신전 뒤에 보이는 벽돌 벽(G)은 폼페이우스가 석조 극장을 만들면서 무대 뒤에 직사각형 열주 회랑 끝에 위치한 대회의실의 벽이다. 바로 이 회의실 안에서 기원전 44 3우러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당했다. 이 유적 뒤쪽에 들어서 있는 건물과 골목길들은 폼페이우스 극장과 회랑 자리를 차지한 것들이라 지금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 화해의 신전(Tempio della Concordia)

무솔리니는 바티칸 교황청과 화해한 라테란 협정(Patti Iateranensi)을 기념하여 베드로 광장 앞 보르고[Borgo] 마을의 가옥들을 철거하고 강변에 이르는 대로를 건설하여 이름을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이라 붙였는데, 그의 위대한 조상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화해의 신전을 세워 기념하였다. 사투르누스 신전 옆에 세워진 화해(Concordia)의 신전은 공화정 초기 역사의 획을 긋는 사건, 곧 신분 투쟁의 가시적 결과였다.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은 공화정 정부가 출범하면서 발생한 권력 구조의 변화의 기이한 것이었다. 로마 인들은 왕을 쫓아낸 것을 도덕적 차원의 사건으로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대외정책의 실패로 입지가 좋아진 왕과 그의 군대를 군사력으로 몰아낸 것이었다. 이 점은 축출된 타르퀴니우스 왕이 군사력을 동원해 집요하게 왕정복고 작전을 폈던 데에서 잘 드러나는 데, 귀족들의 지도력과 평민들의 물리적 지지가 결합하지 않았다면 축출과 뒤이은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이어갈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왕정기의 왕과 귀족, 평민의 삼각구도가 이원적인 구도로 변하면서 평민의 세력이 강화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정치체제 변화 과정에서 지도력을 발휘한 귀족들이 권력을 잡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자, 평민들이 달라진 상황에 걸맞은 권리를 요구하면서 장기간의 투쟁 국면이 지속되었다. 귀족들이 요구를 거부하면 평민들은 로마가 군사적 위협을 받을 때 귀족 장군들의 지휘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방법을 주로 써먹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가 개혁 요구를 거절당한 평민 병사들이 로마 시 외곽의 언덕에 모여 자체의 지도자와 임시 조직을 갖추는 식으로 압력을 가한 성산 사건이었다. 성산(monte sacro)은 시내 중심에서 약 10km 떨어진 노멘타나 가도(Via Nomentana) 옆에 있는 언덕이다. 2세기에 걸친 지속적인 투쟁으로 평민들은 신분상의 불평등을 해소하게 되는데, 평민들에게 고위관직을 개방한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이 대표적인 성과였다.

신분 투쟁은 기원전 339년의 푸브릴리우스법에서 민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원로원이 거부하는 권한을 없애고, 기원전 287년 평민들이 테베레 강 건너 자 니콜로 언덕으로 철수하여 얻어낸 호르텐시우스 법에서 평민회 결의가 법률적 효력을 갖게 됨으로써 종결되지만, 2명의 콘술 중 1명은 반드시 평민이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으로 귀족과 평민이 타협한 기원전 367년 결정적인 분기점이었고, 이해에 푸리우스 키밀루스[M.Furius Camillus]가 귀족과 평민의 대화해를 기념하여 캄피돌리오 언덕의 남쪽 급경사면에 신전을 축조하고, ‘화해의 신전이라 이름 붙였다.

공화정 시대에는 이 신전이 원로원 회의장으로 자주 쓰였는데, 키케로가 네 번째 카틸리나 탄핵 문을 낭독한 곳도 바로 이 회의장에서였다. 이 신전은 여러 차례 복구를 거친 후 아우구스투스 시대인 10년에 지명 후계자 티베리우스가 현재의 구도로 재건하였는데, 현실(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무덤 속의 방) 4524m 크기로 확장하고 그 안에 미술품들, 특히 그리스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여 박물관의 성격을 띠게 했다. 현재 벽돌조 신전 기단과 일부 벽장식, 현실의 문턱만 남아 있고, 정면 들보와 코린트식 기둥머리는 신전 뒤 타불라 리움과 로마 광장의 안티콰 리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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