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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외부 신들의 유입 (2) - 시빌라(Sibylla)

by TES leader 2020.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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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라[Sibylla]와 <시빌 리서[Sibyllini]>

아폴로가 예언 능력을 부여한 여인이 시빌라였다. 트로이 전쟁을 예언했다는 에레트리아의 에로필레가 바로 흑 처녀, 또는 어두운 곳에서 사는 처녀를 뜻하는 시빌라의 효시로 보인다. 후속 전설들은 쿠마, 델피, 리비아, 헬레스폰트, 프리기아, 티부 르 티나 9명의 시빌라를 언급하고 있는데, 로마의 지배 전후로 쿠마의 시빌라가 가장 유명해졌다.

쿠마의 시빌라는 그녀를 소재로 한 그림들에게 음침한 느낌의 노파로 묘사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녀에게 빠진 아폴로가 사랑의 대가로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그녀는 손바닥 안에 쥔 모래알 수만큼 살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영원한 젊음도 달라는 걸 빼먹는 바람에 늙어 쪼그라들었고, 결국 아폴로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죽을 수도 없었던 시빌라는 조국을 떠나 쿠마의 동굴 안에 자리 잡고 살았다고 한다.

그녀가 사는 동굴이 부여하는 신비로움과 호메로스가 율리시즈의 여행에 대해 언급한 장소들과 관련된 신탁 기능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명성이 높아, 그녀의 예언은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주고 소요를 진정시키는 효력이 있었다. 로마의 유력자들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쿠마를 향해 남쪽으로 마차를 몰았고, 그녀가 읊어대는 난해한 시구를 해석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전설의 의하면 한 노파가 타르퀴니우스 왕 앞에 나타나 예언서 9권을 사라고 했는데, 왕이 거절하자 세 권을 없애버린 후 같은 가격에 사라고 했고, 또 거절하자 세 권을 더 없애고 나머지 세 권을 같은 가격에 사라고 했다. 심상치 않게 여긴 사제들의 권유로 받아들여 왕이 책을 구입하였는데, 이 노파는 로마 인민이 앞으로 닥칠 위기를 극복하는 귀중한 지침이 될 터이니 잘 간수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 때문에 이 예언서는 로마의 운명과 치유(fata et remedia romana)’라 불리게 되었고, 그녀의 권고대로 로마 인들은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안전한 곳에 그 예언서를 보관하였다. 그들은 예언 능력이 있고 신의 뜻을 글로 담는 이 여인을 쿠마의 시빌라로 여겼고 그녀가 남긴 예언서를 <시빌 리서>라 불렀다. <시빌 리서>는 기원선 83년 내란 중에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유피테르 카필톨리누스 신전 지하 비밀 장소의 돌그릇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예언서가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리자, 로마 인들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사절을 파견해 <시빌러서>를 찾아내서 재건된 신전에 보관하였고,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는 이 예언서를 권력 강화에 이용하기도 했다. 오랜 내전을 평정하고 평화를 회복시킨 아우구스투스는 아폴로 신이 뛰어난 활 솜씨로 귀중한 예언서를 보호하리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가까운 곳에 나둬야 안심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황궁에 붙어 있는 아폴로 신전의 아폴로 상 기반 안에 <시빌 리서>를 옮겨 놓았다.

로마 인들은 놀라운 전조를 동반한 심각한 사건들에 당면하여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마다 이 예언서를 의존하였다. <시빌 리서>의 위력은 막강했기 때문에 황제들은 이를 독점하고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하였다. 당연히 로마의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쳤고,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조작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기원전 58년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아울 레 테스가 시민들의 폭동으로 로마로 도망쳐와서 폼페이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폼페이우스는 지원을 약속했으나, 기원전 56년 알바노 언덕에 있던 유피테르 신전이 낙뢰에 맞자 이집트 왕이 복위해서는 안 된다는 <시빌 리서>의 내용을 근거로 대며 개입하지 않았다.

기원전 44 2 15일 루페르 칼리아 축제 때 바로 전날 종신 독재관이 되어 실질적으로 왕의 권력을 지니게 된 카이사르는 분위기 때문에 안토니우스가 제안한 왕위를 고사했으나, <시빌 리서>의 한 구절을 분석한 루키우스 코타가 왕이 이끄는 군대만이 파르티아를 제압할 수 있다고 해석함에 따라, 파르티아 원정 중에만 왕의 호칭을 쓰고 로마에서는 쓰지 않는다는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 이는 카이사르와 그의 지지자들이 고안한 작전이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8년 법률가 아테 이우스 카피토에게 지시해 다음 해를 황금시대의 원년으로 해석하게 했다. 4세기 중반의 율리아누스[Iulianus] 황제(360~363년) 때까지도 <시빌 리서>는 신탁서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5세기에 들어서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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