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로 르네상스와 도시 정비 사업
아비뇽 유수(1309~1377년)와 대분열(1378~1417년)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겪은 후 로마 시는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식스투스 4세, 알렉산더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 등의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이 등장하면서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고, 그들의 학예 보호시책에 따라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전 고대를 출발점으로 삼은 르네상스는 공간뿐 아니라 선의 측면에서도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와, 기하학과 비례 개념이 이 시대 작품들에 현실감과 조화를 부여해 주었는데, 이러한 시대정신은 로마 시의 도시계획과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테베레 강 왼쪽 기슭의 정비사업이 이루어졌고 바티칸 평원에도 대규모의 도시 정비 사업이 이루어져 오늘날의 로마 구 시가지의 기본적인 틀이 갖춰지게 된다. 이 정비 사업은 바티칸을 방문하는 순례자나 명사들에게 잘 뚫린 길과 웅장한 건물들로 바티칸의 권위를 과시하고, 통행의 흐름을 효율적으로 만들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교황청은 이미 14세기부터 리파(Ripa) 포구와 리페 따(Ripetta)포구에 강변 관리소를 설치하고 관리관을 임명하여 테베레 강을 관리하기 시작했지만, 율리우스 2세가 강변 관리관을 장관(1829년에 폐지)으로 승격시키고 강물과 도로를 총괄하는 관청(1847년 폐지)으로 통합시키면서 본격적인 정비 사업이 진행되었다. 물론 여러 차례 테벨 강의 흐름을 조정했지만, 그 조치가 미봉책 수준이어서 근본적인 해결을 하지는 못했다. 특히 1598년의 홍수 피해는 아주 심각했는데, 침수된 지역의 수위를 표시한 표석이 지금도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Santa Maria sopra Minerva) 성당 벽과 성 천사의 성벽, 리파 포구에 남아 있다. 테베레 강에 놓인 다리 8개 중 중세에 남은 건 5개뿐이었고, 4개의 쇠다리가 신설되는 1847년까지 부서진 다리들을 대신하여 견인선이 사용되었다.
이와 달리 도시의 다른 편에서는 테베레 강변에 집중된 과밀 인구를 분산시키려는 조직적인 건설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사업은 르네상스 말엽 교황 식스투스 5세(1585~1590년)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는 도시계획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로마 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를 중용하여 대부분의 도로들을 포장하고 장식하여 로마 시의 미관을 향상했을 뿐 아니라, 항구와 상업로를 보강하고 도적 떼를 소탕하고 강변의 늪지를 개간하는 등 로마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제반 조건을 마련하였다. 특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ㅇ니에네 강물의 흐름을 바꿔 대하수로로 흐르게 하려는 계획은 도시 위생을 고려한 오물과 하수 처리 사업이었고, 콜로세움에 모직공장을 세우고 테르미니 광장을 상업지로 조성하려는 계획은 상공업 육성책이었다.
건설 사업의 골자는 중세기 내내 방치되어 있던 언덕으로 주거지를 확장시키기 위해 도로를 신설하고 주거 환경을 개선하여 주민들의 이주를 유도하는 정책이었는데, 사업 출발점이 로마 시대 플라미니아 가도에 있던 성문 안 광장, 곧 중세 시대 이래 포폴로(Popolo) 광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지중해 문명 시대인 로마 시대에는 남쪽 지방에서 들어오는 아피아 가도 위에 있는 성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반면, 중세부터 중북부 유럽과 북부 이탈리아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북쪽에서 들어오는 주 성문인 포폴로 성문이 로마의 관문이 되었다. 현재의 대리석 성문은 1655년 11월 2일 왕위를 포기하고 인스부르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로마 정착을 기념해 키지가의 교황 알렉산더 7세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에게 부탁해 재건한 것이다. 그녀의 부친이 ‘30년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을 이끈 주도적 인물이라 그녀의 개종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교황이 자랑할 만한 외교적 업적이었다.
이 광장에서 베네치아 광장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코르소 길(Via del Corso)이라 하는데, 사육제 때면 마차 경주가 벌어졌기 때문에 경주를 의미하는 ‘코르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지만, 원래 이 길은 로마 시대에 매춘부들에게서 걷은 세금으로 닦은 플라미니아 가도의 초입부였다.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리페 따 길(Via di Ripetta)은 테베레 강과 만나는 중세 시대에 생긴 길이다.
한편, 이 광장에 왼쪽의 핀쵸(Pincio) 언덕은 로마 시대에 루쿨루스 가문과 도미티우스 가문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4세기에 핀치 가문의 별장(Ville dei Pinci)이 들어선 후 그 가문의 이름이 언덕 이름으로 굳어버렸다. 도미티우스 가문 출신인 네로의 시신이 이곳에서 화장되었기 때문에 중세 시대에는 이곳과 관련된 악령 전설이 끊이지 않았는데, 1099년 네로의 유령을 쫓아낸다는 명목으로 네로의 무덤 자리에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Santa Maria del Popolo) 성당이 들어섰다. 1472년 개축된 이 성당은 르네상스 바로크 거장들의 작품들이 소장된 명소다.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가 본당을, 라파엘로(Raffaello da Urbino)가 키지 예배당을 설계했는데, 이 예배당의 조각 장식은 바로크 조각의 거장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맡았다. 카라바조 Caravaggio(본명 Michelangelo Merisi)의 초자연주의 작품 두 점과 안니벨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의 제단화 <승천>이 오른쪽 예배당에 소장되어 있다.
핀쵸 언덕은 수로 파괴 이후 버려져 사람들이 살지 않았는데, 이 언덕을 새롭게 정주 지역으로 삼은 교황 식스투스 5세는 포폴로 광장과 스페인 광장을 연결하는 바부 이노 길(Via del Babuino)을 건설했으며, 세금면제 혜택을 주어 초청한 외국인 예술가들이 이 구역에 자리 잡게 했다. 스페인 광장의 임대료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이 정책에 호응하여, 이후 바부이노 거리는 예술가들의 공방 거리로 자리 잡았다.화가, 조각가뿐 아니라 장인 및 특수업종 기술자, 상인, 골동품상들이 뒤이었고, 게다가 스페인 광장에 로마와 외국의 부호들이 몰려들면서 시장 조건도 매우 양호했다. 루벤스(Pieter Paul Rubens), 브릴(Paul Brill), 반 소머(Van Somer Barent), 반 비텔(Gaspard Van Wittel) 등 플랑드르 출신 화가들과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클로드 푸생(Claude Poussin) 등 프랑스 화가들이 이 구역에 거주하였고, 19세기에는 바그너(Richard Wager), 리스트(Franz Liszt) 같은 음악가들도 가세했다. 윗길인 마르구따 길(Via Margutta)에는 19세기 초 토마스 로렌스 경이 설립한 영국 미술 아카데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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