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 확장의 한계
기존 지역의 인구 과밀과 건축 과잉 현상은 이미 권력자들에게 인지되어 크네우스 폼페이우스(Cneus Pompeius)가 처음 마르스 평원에 극장을 지으면서 평지로의 진출을 시도하였고, 카이사르는 공식적인 확장 계획(De Urbe augenda)을 처음 세웠다. 이미 캄피돌리오 주변 신전지를 분할한 전력이 있는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7월 마르스 평원을 대상으로 한 확장 계획을 그리스 건축가에게 위임하였다.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 평원의 집회 및 군사 기능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는데, 강 건너 바티칸 평원이 적격이었다. 그러나 로마 인들은 비록 복속된 땅이지만 테베레 강 건너의 땅은 이민족의 땅으로 여겼기 때문에 바티칸 평원이 강 건너에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테베레 강 건너편은 원래 에트루리아 땅이었고, 복속된 후에도 그 흔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 남의 땅이라는 성격이 지워지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시민을 노예로 팔기도 했는데, 12표법이 로마 시내에서 시민을 사거나 팔 수 없다는 규정하였기 때문에, 장날이 세 번 지날 때까지, 즉 거의 한 달 동안 기다렸다가 테베레 강 건너에 가서 채무자를 노예로 팔아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강은 도시국가 로마와 외부세계의 경계선이라기보다는 시내와 시골의 경계선으로 인식되어 강을 건너는 것을 로마 시를 벗어나 시골로 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이 로마 시를 떠나는 경우란, 문명의 중심에서 떠나 시골로 가거나 전쟁터에 나가는 경우, 그리고 죽어서 저승으로 가는 무덤 도시(네크로폴리스 Necropolis)행뿐이었다. 이런 점에서 성 밖 저지대에 위치한 마르스 평원도 제대로 된 시내 공간은 아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강물의 범람과 위생 문제로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기를 기피하는 곳이었을 뿐 아니라, 훈련장, 출정식장,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대의 무장 해제 장소, 군인 자격이 있는 시민들의 투표 장소라는 군사적 성격과 성 밖 무덤 지대라는 점 때문에 마르스 평원은 테베레 강이 이루는 자연 경계선 안의 또 하나의 상징적인 경계선, 곧 성벽 바깥에 위치한 공간이었다.
테베레 강과 마르스 평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던 카이사르는 강의 흐름을 바티칸 언덕 바로 아래로 바꿔 바티칸 평원(Campus vaticanus)을 시내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즉 마르스 평원이 가지고 있던 군사적 목적과 경계 지역의 기능을 바티칸 평원이 대신하게 하는 계획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대해 공화주의자들은 이곳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한 카이사르가 투기 목적으로 이곳을 개발하려 한다고 비난했으나, 카이사르가 유언으로 자신의 땅을 로마 인민에게 남긴 점으로 보아 이들의 의심은 노파심에 불과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갑자기 암살되는 바람에 그의 도시 확장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뒤이은 내전의 승자 아우구스투스는 물길을 바꾸는 걸 포기하고 마르스 평원을 공용 목적의 건축물과 기념비, 유락 시설들로 채우기 시작했으나, 수해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시민들이 이 지역에 사는 걸 기피해 인구 분산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발부스 극장(Teatro di Balbo), 스탈리우스 타우루스의 원형극장, 아그리파 목욕장, 판테온, 평화의 제단(Ara Pacis),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영묘와 그 앞에 세운 거대한 해시계가 이 시기에 들어선 건물들이다.
제정 시대에 로마 시 거주 구역은 반경이 거의 10km에 달했고, 전성기인 1~2세기의 인구는 100만 명을 상회했다. 트리제미나 문에서 아벤티노 언덕에 이르는 테베레 강 왼쪽 기슭에 항구시설이 완비되어 안정된 식량 공급 기반을 이루었고, 11개의 수로가 매일 9억8,400만 L의 물을 공급하였으며, 부자들은 중앙난방이나 분수 같은 시설들을 보유했다. 확실한 치안과 훌륭한 위생 시설에 더해, 7개 소방대와 7개의 소방 분견대가개 구역에 하나씩 배치되어 화재에 대비하고, 구역 담당 의사 제도가 작동한 이 대도시에 견줄 만한 도시가 18세기까지 유럽에 나타나지 못했다.
로마 시는 기원전 390년 갈리아 족 침입의 수모를 겪은 후 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 부대가 성문에 접근했을 뿐 수세기 동안 단 한 차례의 침입 위협도 겪지 않았기에 방어 목적의 성벽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기 3세기에는 외침과 내전이 되풀이되면서 변경 지역을 물론이고 로마 시도 안전하지 못했다. 275년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269~275년) 황제가 로마 시를 둘러싸는 성벽을 서둘러 축조한 것도 이 때문으로, 현재 성벽의 대부분이 남아 있다.
■ 고대 로마에는 어떤 관직이 있었을까?
▶ 콘술(Consul)
공화정 시대의 최고 정무관으로 국정 책임자였다. 1년 임기에 두 명이 선출되어 평시에는 6개월씩 정사를 주관했고, 전시에는 임무를 나눠 한 명은 군대를 지휘하고 나머지 한 명은 내정을 담당했다. 콘술 경력자는 자동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제정기에는 황제의 뜻에 따라 선출 내지 임명되었기 때문에 형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임기가 두 달로 줄어들기까지 했다.
▶ 켄소르(Censor)
원래 병역 자원을 세분하기 위한 인구∙재물조사 임무를 맡은 정무관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원로원 의원 명부 개정, 풍기 단속, 공공건물 관리, 청부사업 감독 등 권한이 증가했다.
1년 임기로 매년 선출되는 다른 정무관들과 달리 보통 5년마다 전직 콘술 중에서 2명이 선출되었는데, 임기는 인구조사에 필요한 18개월이었다. 제정기에는 황제의 권력독점으로 유명무실해졌고, 원로원을 통제하기 위해 황제가 스스로 켄소르 직을 맡기도 했다.
▶ 프레토르(Praetor)
사법 행정과 군대 지휘 등의 임무를 맡아 콘술의 국정을 보조하는 콘술 아래 급의 정무관, 공화정 초기에는 2명이었으나, 술라가 8명으로 늘렸고 카이사르가 16명으로 늘렸는데, 이는 영토 확장으로 처리할 업무량과 종류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 인과 외국인은 재판 시 적용하는 법이 달랐으므로, 프레토르도 시민 담당과 외국인 담당으로 세분되었다.
▶ 에딜레스(Aediles)
도로, 교통, 시장, 공연을 담당하는 정무관으로 공화정 초기에는 2명이었으나, 기원전 367년 이후 귀족 출신과 평민 출신이 각각 2명씩 선출되었다.
▶ 릭토르(Lictor)
로마의 주요 정무관 수행원들 중 하나로, 항상 정무관 앞에서 정무관의 사법권을 상징하는 파스 케스(fasces)를 들어 정무관의 권위를 표시하고 정무관의 포고령을 집행하는 일을 했다.
파스 케스는 도끼에 막대기들을 묶은 것으로 정무관의 권력 수준에 따라 막대기 수가 달랐는데, 파스케스에서 파쇼(fascio), 파시스트, 파시즘이라는 말이 유래한다.
'이탈리아 Italy > 로마사 (Roma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 수로 문화의 마비 (0) | 2021.02.11 |
---|---|
로마 테베레 강의 다리들과 티베리나 섬 (0) | 2021.02.09 |
로마 연못과 분수 (0) | 2021.02.07 |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 로마 목욕탕 운영 방식 및 구조 (0) | 2021.02.05 |
로마 목욕 문화(2) (0) | 2021.02.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