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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_ 부오나로티 가 (2)

by TES leader 2021.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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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스케치

1508년 여름에 가족 중에서 미켈란젤로에게 걱정을 끼친 것은 비단 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큰아버지 프란체스코 부오나로티가 사망한 것이다. 화가가 되겠다는 미켈란젤로를 흠씬 두들겨 팬 숙부들 중 한 명이던 프란체스코의 인생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환전상으로 오르산미켈레 바깥에 야외용 테이블을 하나 갖다 놓고 장사를 했는데 비가 오면 옆에 재단사 가게에 테이블을 바짝 붙여 놓고 장사를 했고, 벌이도 신통치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카산드라라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로도비코도 미켈란젤로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결혼 후 두 형제 부부는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런데 프란체스코가 죽자, 카산드라가 느닷없이 로도비코 일가를 상대로 4백 두카트에 달하는 결혼 지참금 반환 소송을 낼 거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소송 건으로 대모이기도 한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이었고, 부친은 재정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무일푼이던 로도비코로서는 지참금을 꿀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지참금의 법적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형수인 카산드라에게 있었다. 피렌체도 딴 곳과 마찬가지로 결호 ㄴ지참금은 남편이 죽으면 반드시 부인에게 반환하도록 해 미망인의 재혼 길을 텄다. 카산드라의 나이로 보아 새 남편을 찾을 기회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오나로티 가에 틀어박혀 허송세월 하는 것보다 자신을 위해 남은 ㅅ애애를 사는 것에 더 마음이 이끌렸던 모양이다. 지난 11년 동안 카산드라는 부오나로티 가의 유일한 여성이었지만, 남편이 죽자 더 이상 시집식구와 함께 지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결혼 지참금을 둘러싼 법적 분쟁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법이 미망인의 손을 들어주어 그들이 대개 승소했다. 그래서 로도비코는 큰아버지의 유산 상속자로서 유산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소송에서 불리해질 뿐만 아니라 카산드라의 지참금 등 남긴 채무를 모두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고 미켈란젤로에게 알렸다.

조반시모네의 방분과 발명, 큰아버지의 사망과 큰 어머니의 고소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프레스코를 도안하고 조수진을 짜느라 한창 분주한 미켈란젤로를 성가시게 괴롭힌 것이 사실이다. 조반시모네가 병상에서 일어나자, 이번에는 또 다른 약골이 미켈란젤로 앞에 불쑥 나타났다. 우르바노가 혼자 오지 않고 피렌체에 있던 피에로 바소, 혹은 땅달보라 불리는 조수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바소는 한때 부오나로티 가에서 머슴으로 일한 적이 있는 목수였다. 세티냐노의 하층민 집안에서 태어나 부오나로티 가의 농장에서 집 짓는 일을 감독하는 것 외에 로도비코의 집사로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여러 해를 지냈다. 미켈란젤로도 지난 4월에 바소를 로마로 불러들여 발판 제작을 돕거나 천장의 옛 석고를 떼어내는 로셀리를 돕게 한 바 있다. 바소는 공방뿐 아니라 예배당 일도 그럭저럭 잘 해냈다. 공방에서는 주인을 대신해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거나 심부름을 하는 등 잔일을 주로 했다. 그러나 67세의 바소는 이미 몸이 허약할 대로 허약했다. 7월 중순 그도 조반 시모네처럼 로마의 살인적인 무더위에 시달리다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미켈란젤로가 바소가 몸져눕자 회복하더라도 피렌체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했지만, 당분간 그의 문제로 씨름해야 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늙은 충복에게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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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착잡한 심정으로 부오나로토에게 편지를 썼다. “네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피에로 바소가 병고에 시달리다가 지난 화요일 여기를 떠났다. 여하튼 나는 이번 일로 혼자 있게 된데다 그 양반이 혹시 노상에서 객사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아주 착잡하다.”라고 운을 뗀 다음, 바소를 대신할 만한 사람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이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게다가 여기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낼 방도도 없고∙∙∙.”

물론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우르바노 등 조수 다섯 명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식료품을 구입해 음식을 장만하고, 공방이 원활하게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집사가 필요했다. 다행히 부오나로토는 그 일을 해낼 만한 사내아이를 찾아냈는데, 이름은 역사 기록물에 나타나 있지 않다. 당시 공방에서는 화가나 조각가들의 시중을 드는 심부름꾼 아이들이 흔했다. ‘파토리노로 불리는 이 아이들은 보수 대신 숙식을 제공받았다. 로마로 이 아이를 보내는 데 있어 고민거리는 어떻게 어린애를 먼 여행길에 나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뜻밖의 문제였다. 미켈란젤로의 피렌체인에 대한 일방적인 선호와 로마인에 대한 불신은 파토리노 같은 말단에까지 이르는 공방 소속원 전체에 미쳤다.

파토리노는 부오나로토가 보충한 다른 사람이 오기 며칠 전 피렌체를 떠났다. 미켈란젤로는 바로 얼마 전 조반니 미치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일자리를 하나 내어달라는 간청과 만약 고용된다면 유익하고 명예롭게일에 보탬이 되겠다는 다짐이 쓰여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부오나로토에게 재빨리 편지를 보내 미치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부오나로토는 당연히 미치에 대한 탐문에 들어갔다. 미치가 정말 필요한 일에 보탬이 되리라고 확신한 뒤, 미켈란젤로에게 그가 이삼일 내에 피렌체에서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로마로 떠날 거라고 알렸다.

조반니 미치(Giovanni Michi)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1508년 산 로렌초 성당의 북쪽 수랑 벽에 프레스코를 한 것으로 보면, 미치도 분명 화가 수업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조수들과는 달리 미켈란젤로나, 추측컨대 로셀리와도 일면식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미켈라넺ㄹ로는 미치에게서 재능을 찾고 싶었다. 그리하여 미치가 8월 중순 로마에 오면서 조수 진영이 완벽히 갖추어졌다.

피에로 바소가 병상에서 일어나 피렌체로 떠난 7월 말, 미켈란젤로는 부친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로도비코 부오나로티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둘째 아들의 근심과 미친 듯이 일하는 습관에 관해 조반 시모네에게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아들의 건강이 염려되어 미켈란젤로가 몸을 아끼지 않고 무리하게 일하는 것이 걱정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보기에 아무래도 네가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 뒤, “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울적하다는 것까지 잘 알고 있단다. 그렇게 우울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데 그럴 바에야 가능하다면 아예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이 낫겠구나.”하고 덧붙였다.

로도비코가 편지에서 지적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시스티나 예배당 작업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뒤였고,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었다. 조수들이 제자리를 잡자, 프란체스코 그라나치는 안료의 견본을 더 많이 구하기 위해 피렌체로 돌아갔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피에로 로셀리에게 마지막 급료를 지급했다. 다시 말해 천장의 옛 석고와 프레스코를 제거하는 작업이 마무리된 것이다. 로셀리와 인부들이 비계를 제작해 1천 평방미터 넓이의 천장에서 석고를 떼어내고 아라치오를 새로 바른 작업이 석 달도 채 되지 않아 종료되었다. 작업 속도는 실로 경이적인 것이었다. 첫 주요 작업이 마무리됨에 따라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도 프레스코를 할 기반이 이제 다 갖추어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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