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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콜로세움의 시작

by TES leader 2020.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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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내를 구경할 시간이 반나절밖에 없다면, 당신은 어디를 찾아가겠는가? 그 유명한 로마를 보러 가는 데 반나절만 할애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어리석은 물음으로 일축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바티칸 박물관을 보겠다거나, 스페인 광장 앞 쇼핑거리를 찾아가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로마에서 직접 보고 들은 바로는 이 질문이 결코 어리석은 물음이 아니다. 계획을 세우고 여행길에 오르는 여행객들도 많지만 연수 등의 일정으로 유럽에 가는 사람 중에는 일부러 로마를 거쳐 가거나 짬을 내서 들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모르지만 이동하는 시간에다 줄 서서 길바닥에 버려야 하는 시간까지 감수하고 바티칸을 구경한다는 것도 계산 빠른 한국인의 속성상 쉽지 않고 더구나 바티칸은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구경할 만큼 만만한 곳도 아니다.

그렇다면 반나절 관광의 1순위 명소는 어디인가? 두말할 것 없이 콜로세움이다. 이 웅장한 건축물은 시간 여유가 없어도 눈도장을 찍기에 가장 좋은 유적인 데다가 바로 앞 벚꽃 길을 따라 티투스 개선문이 서 있는 벨 리 아 능선을 넘어가면 로마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니 비록 겉핥기일지라도 투자한 시간에 비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콜로세움은 단순히 유적이 아니라 분명 고대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로마의 얼굴이다. 물론 이 건물이 검투사, 죄수, 맹수들의 피로 얼룩진 모래판과 가련한 희생자들을 쳐다보며 환호하는 관중 등 현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연출된 비극의 현장이었다는 점 때문에 얼핏 로마의 얼굴로 적당치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근대에 들어 교황청이 이곳을 순교성지로 지정하고 관중석 한가운데 십자가를 세워놓아, 그동안 이곳에서 수많은 크리스트교도가 순교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기정사실로 했으니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처절한 박해의 현장으로 상상할 것이다.

이러한 어두운 측면이 있는 콜로세움은 그래도 로마의 얼굴인 이유는, 첫째 건축술 떄문이다. 콜로세움은 수많은 아치형 천장과 견고한 벽체로 이루어진 콘크리트 벽돌집 건축의 압권이다. 둘째 고대 로마시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이 대형 건축물은 로마 시민들의 자부심이라 할 만큼 상징적인 건물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콜로세움이 제정기 로마 사회의 특성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의 자유를 상징하듯, 콜로세움은 고대 세계의 승자 로마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 안에서 벌어진 시합 들의 기원이 외국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극장 둘을 결합한 모양의 건물구조와 경기 조직은 로마 인들이 자기 세계의 속성을 바탕으로 이룩한 독창적이었다.

 

콜로세움 (Colosseum, Amphitheatrum Flavium)

권력을 잡으려는 공화정 말기 정치가들이 군사력과 민심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면, 군대와 행정부 수장에 대신관, 호민관 권한을 보유해 절대권력자 자리에 있는 황제는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군대의 충성과 귀족층의 협조, 시민층의 지지를 확보하고 유지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광 덕분에 정사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지만, 티베리우스가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치세 내내 민심을 얻지 못한 점이나 연이은 속주 군대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린 네로가 노예를 시켜 목숨을 끊게 된 점은 군대와 민심의 영향력을 확인케 해준다. 네로 사후 발생한 내란의 승자 베스파시아누스가 이 점을 모를 리 없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권력을 잡은 베스파시아누스는 군의 분열상을 극복하고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군대 개혁을 서두르고 한때 동료였던 원로원 귀족들을 다독거리는 한편, 네로의 사치에다 내란으로 텅 빈 국고를 회복시키는 데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였다. 리에티Lieti의 평범한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신흥 귀족의 대표로 권좌에 오른 그로서는 민심을 추스르는 일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으므로 건축 재정 정책을 펴면서도 제국 전역에 걸쳐 건축, 공공사업에 열을 올렸다. 로마 문화는 철저한 도시 문화였고, 도시 문화가 유지되기 위한 제반 요소를 갖춰야 했는데, 신전과 광장은 기본이고 공연 시설과 위생 시설이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로마 시민들 대부분이 주인인 로마시의 공공 건축물은 이들의 자부심과 더불어 황제에 관한 호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유대 전쟁을 마무리한 황제가 포로로 잡아 온 유대인들을 동원해 짓기 시작한 원형경기장은 단순히 승전의 대업을 과시하는 건축물만은 아니었다. 그는 원형경기장을 짓게 된 이유는네로가 시민들에게 빼앗은 땅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언뜻 보기에 폭군이 저지른 짓을 되돌리는 너그러운 조치인 것 같지만, 실제 이는 네로의 빵과 서커스 정책을 수용하고 확대한 것이었다. 사실 64년 화재 이후 네로가 임시로 재건한 마르스 평원의 타 우루스 Taurus 원형경기장은 목조 건물로, 공연행사를 치르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대규모 상설 경기장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가 로마 시민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호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종의 의무였다. 재해나 기근으로 인해 제대로 곡물이 공급되지 않거나 공연 프로그램에 문제가 발생하면 황제가 당면하게 될 곤경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공연 문화를 싫어하고 서민들을 혐오해 공연장 출입을 피한 티베리우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로마 시민들은 암울한 날들은 가고 새날이 밝았다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반란으로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네로가 곡물 수송용 선박에 공연에 필요한 모래를 실어 나르느라 곡물 공급에 차질을 빚지만 않았어도 그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 네로의 궁전을 접수하자마자 정문 쪽 울타리를 허물어 궁전 규모를 줄인 베스파시아누스는 72년 예루살렘 등지에서 끌고 온 수많은 유대인 포로들을 동원하여 에스퀼리노, 팔라티노, 첼리오 언덕이 마주치는 골짜기에 네로가 만든 인공호수의 물을 빼고 이 자리에 원형경기장 축조 공사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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