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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콜로세움의 흥망성쇠

by TES leader 2020.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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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인 마르티알리스에 의하면, 80년 티투스 시대에 거행된 경기장 개장 기념행사는 100일 이상 지속하였으며, 행사에 희생된 맹수가 5 이상이었다고 한다. 콜로세움의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으로, 플라비우슨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가문 명칭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은 11세기부터 사용되었는데, 원래 황금 궁전 현관에 서 있다가 경기장 옆으로 옮겨 온 네로의 도금 청동상 콜로서스 Colossus에서 유래한, 문자 그대로거대한 건축이라는 뜻이다.

 

콜로세움은 원통형의 4 5단 건물로 외벽은 티볼리산 석회화로 덮여있다. 외벽의 높이는 49m이고, 타원형 평면의 장축과 단축의 지름이 각각 188m, 156m, 그리고 둘레가 527m이며, 경기장 바닥을 지칭하는 아레나 Arena의 장축과 단축은 각각 86m, 54m이다. 모래를 뜻하는 아레나가 원형경기장 바닥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은 나무판 위에 모래를 덮은 경기장에서 시합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모래가 검투사나 맹수들이 흘린 피로 물들면 시합이 끝난 후 인부들이 모래를 갈고 다음 시합을 속행하였다. 훗날 이 말은 같은 이유에서 스페인 투우경기장에도 적용되었다. 원형경기장 공사에 사용된 석회화는 10만㎥가 넘고, 돌 블록을 연결하는 데 쓰인 쇠만 300t에 이른다. 콜로세움의 공사 기간은 실제로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짧은 기간에 그처럼 웅장한 건축물을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사 현장의 조직력과 시공 기술이 뛰어났던 데에도 있지만, 사실은 기반을 고르기 위해 땅을 파는 힘든 작업 대신 인공호수의 물을 빼낸 다음 말린 견고한 지반을 활용했고, 시멘트 바닥에 석회화 기둥으로 3층까지 골격을 세운 후 그사이에 응 회와 벽돌로 벽을 세우는 방식을 써서 위, 아래층 공시를 동시에 할 수 있었으며, 4개 구역으로 나눠 동시에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콜로세움은 층마다 기둥머리의 양식을 달리하고 있는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되어 있다. 각 층에는 80개의 아치형 문이 나 있는데, 1층의 아치문들은 출입구로 사용되었다. 입구에는 일련번호가 76번까지 매겨져 있었으며, 관중들의 입장권에는 그에 해당하는 출입구 번호가 적혀 있었다. 번호가 없는 4개의 출입구는 정계, 종교계 고위 인사들이 이용하는 특별석 전용 출입구였다. 4층은 다른 층과 달리, 직사각형의 창문이 있는 벽체로 되어 있고, 창문 아래에 작은 공간이 있어 도금 방패들로 장식했다. 관중석은 신분에 따라 층이 달라져 위층으로 갈수록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배정되었다. 2개의 열주 회랑이 끝나는 북쪽 입구가 황실 전용 출입구로, 석고 장식이 늘어선 통로를 통해 황실 석과 연결되었다. 최고 정무관인 집정관과 베스타 여사제들의 자리는 황실 석에 마련되어 있었던 반면, 시장 관과 다른 정무관들의 자리는 맞은 편에 있었고, 그 아래 검투사들의 출입구가 나 있었다. 또한 회랑으로 이루어진 여성 전용 구역이 따로 있었으며, 그 위에 설치된 테라스를 하층민들이 입석으로 이용하였다. 1, 2층의 좌석은 대리석 계단식이고, 3층 좌석은 목재였다. 콜로세움은 입석까지 포함하면 7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이 많은 관중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데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4층 외벽 창문 위를 보면 칸마다 돌이 3개씩 튀어나와 있는데, 이 돌들에는 사각 구멍이 패 있다. 양은 적은 편이지만 봄, 가을철에 집중적으로 비가 오고 한여름에는 햇빛이 매우 강한 로마의 기후 때문에 관중석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 사각 구멍에 나무 깃대를 꽂아 삼각돛 모양의 천막(벨라리움 Velarium)을 쳐 하늘을 가렸다. 천막을 치는 일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나폴리만의 미 세 놈 Misenum 해군기지에서 파견된 특수요원들이 상주하면서 작업을 담당하였다.

 

1층 관중석의 가장 낮은 자리는 경기장 바닥에서 4 높이에 있었다. 맹수 사냥(Venationes) 중에는 관중들의 안전을 위하여 아레나 주위에 튼튼한 철망을 둘렀으며, 맹수가 철망에 오르거나, 아레나부터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궁수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경기장에 물을 넣어 모의해 전 경기(Naumachia)를 치르기도 했는데, 티투스 시대에 코린트와 케르키라 사이의 해전을 연출할 때에는 3,000명이 동원되었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격파한 세기적인 사건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해전 경기는 네로 시대에 황금 궁전 인공호수에서도 열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세운 경기장이 이 목적으로 쓰인 건 당연했다. 하지만 경기장에 물을 넣고 빼는 번거로움 때문에 도미티아누스 때 콜로세움에서의 해전 경기는 중지되고 대신 강물을 끌어들이기 좋은 트라스테베레의 전용시설을 이용하게 되었다. 해전 경기 기능이 없어지면서 콜로세움은 본격적인 공연 시설을 갖춘 경기장이 된다. 도미티아누스는 경기장 아래에 3개의 원형 통로를 연결된 지하 시설을 만들어 검투사 대기실, 맹수 우리, 무대효과 장치, 무기와 기구 보관소 등으로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콜로세움의 건축가들은 경기장 세트와 장비, 사람과 맹수들을 적시에, 또는 동시에 아레나에 올려놓을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같은 기계장치를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로마 인들에게 콜로세움은 세계제국의 주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자 문화 시민의 특권을 누리는 최적의 공연장이었다. 원형경기장은 실용성을 중시한 로마 인들이 필요에 따라 그리스식 극장을 포개놓은 모양으로 창안해낸 것으로, 기원전 1세기 중반경에야 전용시설로 건축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53년 쿠리오라 세웠다는 경기장과 기원전 46년 카이사르가 세웠다는 경기장에 대한 증거는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타 우루스가 마르스 평원에 세운 경기장은 6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네로가 목재로 급히 지은 원형경기장 대신 당대인들이 보기에 첨단 시설을 갖춘 대규모 경기장을 갖게 된 것은 로마시와 로마 시민의 위상에 걸맞은 것이었다. 원형경기장에서 치르는 경기는 일반적으로 검토 시합이었는데, 자금력과 동원 능력이 큰 로마시에서는 단조로움을 피하고자 이와 함께 다른 공연들도 연출했다. 맹수 사냥은 쇼의 성격이 강했다. 맹수 사냥을 두고 로마 인의 야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날 특정 지역에서 사냥을 허용하듯이 맹수 사냥은 맹수의 수를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사람을 야수의 먹이로 아레나에 집어넣는 예도 없지 않았는데, 이럴 때는 늘 죄수가 그 대상이었다.

 

희극적인 수렵도 볼거리를 제공했다. 캐래 알리어 축제(풍작을 기원하여 지모신 케레스에게 바치는 축제) 중에는 불붙은 나무를 꼬리에 매단 여우를 사냥하였고, 플로 랄리라스 축제(꽃과 봄의 여식 플로라를 기념하는 축제) 중에는 토끼나 사슴 같은 연약한 동물들을 사냥하는 행사도 있었다. 모레 위에 글을 쓰는 코끼리 등 훈련된 동물들이 재주를 부리는 순서나 오늘날의 투우 시합과 비슷한 경기도 치러졌고, 맹수들을 놀리다가 회전문 뒤로 도망치는 코미디 성의 볼거리도 제공했다. 죄수를 처형할 때는 그냥 죽이지 않고 극적인 내용의 처형 극으로 사실감과 긴박감을 고조시켰다. 콜로세움 개장 기념행사 중에는 만행을 저지르다 사로잡혀 십자가에 매달린 전설적인 도적 라에 올 루스 사건을 재현해 실제 십자가에 매달린 인물을 곰이 물어뜯어 죽이는 광경을 연출했고, 기타라고 치는 오르페우스를 뒤따르는 야수 이야기나 포르센나 왕에게 붙잡혀 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은 영웅 무키우스 서울대·고대·연대 볼라 이야기도 자주 등장하는 각본이었다.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정복 개선식 때에는 1만 명의 검투사와 1 1,000마리의 동물이 동원되었고, 249년 건국 1,000주면 기념행사 떄에는 검투사 1,000쌍이 동원되었으며, 코끼리 32마리, 호랑이 10마리, 사자 60마리, 표범 30마리, 하이에나와 기린이 10마리, 하마 6마리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콜로세움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졌던 행사는 523년 테오드릭 시대의 맹수 사냥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미 여러 차례 벼락과 지진 피해를 보아 여러 황제의 손을 탔던 이 건물은 테오도릭이 마지막으로 복구하여 사용한 523년 이래 경기장의 기능뿐 아니라 건물 자체의 수명도 마감하였다. 8세기 수도사 브레다는콜로세움이 서 있는 한 로마도 흥하리라. 콜로세움이 무너지는 날에는 로마도 멸망하리라. 로마가 멸망하는 날에는 이 세상도 멸망하리라.”라고 예언했는데, 민족들의 로마 약탈로 인구가 줄고 도시가 쇠퇴하자 자연히 콜로세움은 방치되었고, 또 지진으로 파괴되어갔다. 중세에는 이 구역 귀족인 프랑스란 지바네와 안니발디가의 요새로 사용되었고, 1312년 로마 시민들의 지지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독일 왕 하인리히 7세가 이를 다시 로마시에 기증하였다. 이후 수차례의 지진으로 파괴된 콜로세움은 베네치아 궁전과 칸첼레리아 궁전, 캄피돌리오 궁전, 베드로 대교회에 필요한 석재를 제공하는 채석장으로 전락했다. 1750년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콜로세움을 순교지로 지정하여 그 일부를 복원하고, 이곳에 십자가를 세웠다. 이후 피우스 7, 레오 12, 그레고리우스 16, 피우스 9세 등의 교황들이 상당한 보수 작업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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