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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Gladiator 로마 검투사와 검투 시합의 기원

by TES leader 2020.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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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형경기장과 검투 시합

원형경기장은 검투 시합이 국가적인 축제로 부상함에 따라 전용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등장한 전형적인 로마 건축물이다. 여기서 전형적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원형경기장의 모태가 극장에 있고 극장이 그리스 극장에서 기원했지만, 건축물의 용도가 완전히 달랐다는 데에 있다. 자격이 있는 자, 곧 시민들이 스스로 경연에 참여하는 그리스의 축제 방식과 반대로 로마에서는 보고 듣는 즐거움에서 만족을 얻는 관중이 절대다수의 시민들이었기 때문에 극장과 경기장이 이에 부응하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당연히 좀 더 많은 관중이 어디에서나 경기 내용을 볼 수 있는 관중석을 갖춘 건물이 필요했고 그 결과가 두 채의 극장을 맞붙여놓은 모양의 타원형 경기장이었다. 검투 시합은 이 타원형 경기장 아레나에서 훈련을 받은 검투사들이 시합을 벌여 상대방을 다치게 하거나 죽여 관중에게 만족을 주는 축제였다. 그리스의 올림픽 우승자가 영예를 누리는 주체지만, 아레나의 검투사들은 축제의 주체인 관중들을 위한 도구일 뿐이어서 패자의 운명은 경기 내용에 대한 관중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었다. 관중 모두가 손수건을 흔들면 목숨을 구했고, 주먹을 쥐고 엄지를 아래로 내리면 그의 목숨은 상대방이나 경기 진행 요원에 의해 끊어지게 되었다. 사실 얼마나 잘 싸우고 어느 정도로 죽음에 초연할 수 있느냐가 검투 시합의 핵심이었다. 관중들을 흥분시키는 처절한 결투 현장, 나팔소리를 신호로 승자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는 검투사,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게 오싹하지만, 로마에서는 자연스러운 공연 문화의 하나였다. 검투 시합을 싫어했다고 하는 철학자 세네카조차 검투 시합 자체를 반대한 게 하니라 역겨워했을 뿐이고, 크리스트교의 승리 이후에도 이 관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검투 시합의 기원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전투 정신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검투 시합을 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검투 시합은 외부에서 유입된 매우 오래된 풍습으로, 이 처절한 싸움 놀이를 그들에게 전수한 민족은 에트루리아 인이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 인들에게 토목, 건축 등 실용적인 기술을 전수했을 뿐 아니라, 종교, 장례 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런 것들 것 모두 에트루리아 인들이 창안해낸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리스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에 검투 시합의 풍습이 있었고, 이 풍습을 에트루리아인들이 이탈리아에 전했다.

검투시합은 저승(Mani)의 갈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인이 잠든 땅에 붉은 피를 흘리는 상징적인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이 의식은 동물을 잡아 피를 바치는 종교의식이나 고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신 공양과도 관계가 있다. 로마 인들은 매년 6, 8일 테베레강에서 낚시 대회를 열어, 물고기를 잡아다가 불카누스 사당에 바쳤는데, 4세기에 <로마사 개요>를 쓴 역사가 페스투스 Festus인간의 영혼 대신 물고기를(pisciuli pro animis humannis)”이라고 기록했듯이, 이 풍습은 화산이 터질까 두려워 인신 공양을 하던 의식에 기원을 두었다. 이와 비슷한 인신 공양 기원의 의식이 검투 시합인데 아우소니우스는검투사의 피가 사투르누스 신을 진정시킨다(Falciferum placant sanguine)”라고 했다. 초기 로마에서는 유명한 인물이 죽으면 고인의 영혼을 깨끗이 하여 저승길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 고인의 무덤 앞에서 검투 시합을 치렀다. 말하자면 검투 시합은 장례 의식의 하나였다. 이러한 관행은 명문가의 장례식으로 이어져 장례 행렬 중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명사의 장례식은 가족 외에도 가문의 피호민들과 일반 시민들이 몰려드는 자리였기 때문에 본래의 인신 공양 성격보다 정치적 의미가 더 커져 검투 시합도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무료 공연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렇게 장례식 일부로 검투 시합을 조직하는 경우나 개인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검투 시합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검투사들을 임대하는 사업가들도 나타났다.

결국 기원전 105년경 검투 시합은 장례 축제(루디 푸네 브레스라는 이름으로 국가적인 제도로 승격되었는데, 축제를 주관하는 국가관리에 딜레스가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공연(무네라 Munera)의 성격을 띠었다. 상설원형경기장이 세워지기 전에는 주로 로마 광장에서 검투 시합이 진행되었는데, 광장 유적지 지하에서 발겮된 검투 시합용 시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시기에는 검투 시합이 목숨을 건 유혈의 싸움이 아니어서2인 1조의 시합에서 진 팀을 죽이지 않았다. 장례 의식의 성격은 축제가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아 적어도 카이사르가 사망할 때가지는 그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케사르 사후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규모도 확대되었다.

검투 시합의 인기가 높아 공직 후보들이 선거 전략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기원전 63년 원로원은 과열 현상을 막기 위해 검투 시합을 후원한 후보의 자격을 박탈하기까지 했다. 물론 폼페이우스나 케사르 같이 권력과 재력을 가진 고위 정치가들은 민심을 얻는 수단으로 검투 시합을 요긴하게 활용했다. 이러한 전례는 제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황제에게 일종의 부담으로 작용하여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한 티베리우스 황제가 특별 공연을 추가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제정 시대에는 후원 활동에 대한 기준이 체계화되어 재산이 40만 세스테리티우스 이하인 자는 후원할 수 없게 했고, 자치시정무관은 연중 1, 로마 시 프레토 르는 연중 2회의 후원 의무가 있었다.

장례의식의 성격이 사라진 후 검투 시합은 용기와 인내의 시험대 기능을 했다. 키케로는 죽음과 고통에 대한 초연함이 이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고 했는데, 작가, 철학자들이 검투 시합에 대해 거의 비꼬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로마 인이든 이민족이든, 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검투사로 경기장에 들어선 자에게 요구하는 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성다운 태도였다. 용기를 보인 경우 진다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군중은 그런 검투사를 살리기 위해 손수건을 흔들거나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려 결투를 중단시켰다. 검투사의 가치는 그가 보이는 초연한 자세에 비례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검투사들은 황제 앞으로 나아가죽을 자들이 당신께 경배합니다.”하면서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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