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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로마의 신 (1) - 테르미누스[Terminus]와 야누스[Ianus]

by TES leader 2020.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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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전의 도시. 로마

 

로마의 종교는 자체 발생한 고유의 종교와 외부 세계 특히 그리스 동방 지역과 접촉하면서 유입된 외래 종교가 섞이기도 하고 동일시되기도 하면서 형성된 복잡한 것이었다. 그리스 인들은 자연현상을 확대하고 형상화하는데 재주가 있었던 반면, 로마 인들은 원래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거의 창조력이 없는 민족이었다. 당연히 로마 종교는 아폴로 신의 육체적 도덕적 아름다움이나 디오니소스 신앙, 곧 비의(뜻하지 아니한 판) 종교의 상징성과 거리가 멀었다. 악의(Vediovis), 질병, 발열, 심지어 도적(Laverna)도 로마 인들이 개념화한 것들이었으나, 그들은 이를 성스러운 공포로 격상시키거나 인격신으로 구현하지 않았다. 더구나 페나 테스[Penates]를 제외하고는 비밀스러운 신이 없었고, 이 신조차 모두에게 드러난 신이었다.

로마 인들은 모든 현상과 성격을 되도록 쉽게 이해하려 했고, 누구나 자기가 속한 계층에 따라 신들을 정확히 부르고 올바르게 확인할 수 있게 적당한 용어로 표현하고 격에 따라 구분하려 했다. 타고난 단순성에 기인하는 이러한 태도가 로마 종교의 본질적인 특성이었다.

로마 인들은 그리스 신들을 받아들이면서도 본질적인 특성 때문에 배타성을 띤 그리스 인들의 그것과 매우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리스 인들은 자기들의 사회와 환경을 지배하는 그리스 신만을 숭배했기 때문에 해외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신상과 성물을 들고 떠나야 했다. 불타는 트로이 성에서 한밤중에 떠나야 했던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로 가지고 갔던 것도 팔라디오 신상과 성물이었던 것을 보면, 종교 측면에서 로마 창건 신화 자체도 그리스 세계의 입장에서 서술한 윤색된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로마 인들이 트로이 왕가의 계보를 정말로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종교에 대한 태도는 철저하게 로마적이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만의 종교가 절대적인 중요성을 띠지 않았다. 노老 카토(M. Porcius Cato, 기원전 234~149)는 인간과 신의 관계가 완전히 계약적인성격의 관계라고 설명했는데, ‘갖기 위해 준다(do ut des)’는 라틴어 구절은 로마 인들의 종교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한 만신전에 삼신(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의 신들을 모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로마의 종교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관심이 아주 강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타 민족의 종교라도 실용성만 있다면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고, 타 민족에게 로마 고유의 종교를 강요할 필요도 없었다.

더구나 로마 인들은 우주 생성과 관련된 신화나 우주와 사회질서의 기원과 계보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로마 고유의 신들은 종족신이나 농업 신 정도였고, 아이네아스 신화나 무티우스 스케볼라 이야기, 호라티우스 전설, 캄피돌리오 언덕의 거위 등 라틴 문명의 기원과 역사에 관련된 전설상의 이야기들뿐이었다. 로마의 신들은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유형은, 로마 고유의 신들로 로마 인들을 이 신들 중에서 30명을 축제를 통해 기념하였다. 농업국가로 시작해 끝까지 그 성격을 유지한 로마인들에게 농업의 기본 요소인 파종(saeturnus), 경작(ops), 토지(tellus), 경계선(terminus)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으므로 신성이 부여되었다. 그래서 파종과 농업 전반을 관장하는 사투르누스와 그의 부인이자 수확, 풍요의 여신인 오프스[Ops], 그들의 딸인 곡물 성장의 여신 케레스[Ceres], 과일과 과실수의 여신 포모나[Pomona], 목축의 신 파레스[Pales] 등 농업신 계보가 중심을 이루었다. 이 계보에서는 비를 뿌려주는 최고신 유피테르도 경장과 포도밭의 신이었다. 사투르누스의 아들들인 유피테르, 플루톤[Pluton], 마르스는 그리스 종교의 영향으로 영역 지배 신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승천한 로물루스의 화신으로 여겨진 퀴리누스[Quirinus]는 평시의 군사집단 보호 신이기도 해서 전쟁의 신 마르스와 함께 추앙받았다. 초기의 3신은 유피테르, 마르스, 퀴리누스로 이 신들을 모시는 사제단이 플라 미네스[Flamines]였다.이 3신가 야누스[Ianus], 베스타[Vesta]등이 주요 조상실들로 받들어졌다.

둘째 유형은, 소속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일상생활에 유용한 존재로 여겨진 보호, 보조신들(Numina)이다보조 신들(Numina)이다. 페나테스[Penates] 라레스[Lares], 베스타 같은 집 안의 화로와 방을 보호하는 영등과 강, 숲의 정령들, 그리고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긴 신의의 신(deus fidius), 운명과 행운의 신(fors, fortuna)이 이 부류에 속했다.

셋째 유형은, 후기에 외부 세계에서 유입된 신들로 로마 팽창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였고, 제국을 이룬 상태에서 로마 권력자들이 종교정책을 펴는데 전통종교보다 더 활용가치가 높았다. 예를 들면 제정기 황제 숭배 현상은 동방 종교가 바탕을 이룬 것이었다.

 

 

 

야누스 [Ianus]의 모습

1.     로마 고유신들

테르미누스[Terminus]와 야누스[Ianus]

최고신 유피테르를 비롯한 로마의 신들이 다른 민족의 신들을 모태로 하거나 적어도 짝을 이루는 신들이었던 데 반해, 테르미누스와 야누스는 로마 인 고유의 세계관에서 나온 신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선, 즉 삶과 죽음이나 로마 세계와 외부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라, 사람들이 통과할 수 있는 두 영역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를 관할하는 신이 테르미누스였고, 중간지대가 문으로 된 경우 이를 관할하는 신이 야누스였다.

테르미네[Termine]는 경계선에 세운 돌이고, 테르미날리아[Terminalia]는 매년 2 23일 경계 지역의 두 주인이 테르미누스에게 함께 드리는 제사 축제를 일컫는다. 테르미누스는 분리의 신이자 인접의 신이었으므로 이 신을 숭배하는 두 이웃은 대등한 입장의 친구 관계였다. 인접지주들 간의 분쟁이 수없이 많았던 시대에 테르미누스는 이웃이 함께 하면서 우의와 신의 관계를 이루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은 손님이 되느냔 아니면 적이 되느냐 하는 양재택일의 문제였고, 손님(Hospes)과 적(Hostis)을 가리키는 라틴어의 어원이 같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들에게 손님은 우호적인 이방인이고 적은 악의를 품은 이방인이었다.

이러한 로마 인들의 사고 체계는 그리스 & 동방 인들의 그것과 분명히 달랐다. 물론 이 차이는 그들이 삶을 영위하는 장소, 곧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로마가 자리잡은 이탈리아 중서부 지역은 라틴 족과 사빈 족 같은 원주 종족들과 에트루리아 인, 그리스 식민자들이 접촉하기 좋은 위치였고, 외부의 영향력을 차단할 만한 지형도 아니었다. 더구나 도시국가를 형성한 시기가 주변의 세력들보다 결코 빠르지 않았던 로마 인들이 외부와의 관계를 탄력성 있게 해석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악의만 없으면 양쪽이 대등한 관계가 되기 때문에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으나, 시간이든 장소든 문으로 된 경계를 지나기 위해서는 예상치 못한 위험한 상황도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로마 인들은 문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관심의 표출이 문을 관할하는 신, 야누스로 나타났다.

 

이름(야누아=, 야누스=통로)에서 알 수 있듯이 야누스는 장소에 국한된 좁은 의미로는 문을 여는 신’, ’유개(덮개나 뚜껑이 있음) 통로의 신;이었고, 넓은 의미로는 불연속 하는 시간이나 공간을 연결하는 개념이었다. 보통 앞뒤가 다른 행동이나 상황을 표현할 때 야누스의 얼굴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의 두 얼굴(야누스 비프론스[Ianus bifrons])은 성격상 입구와 출구, 과거와 미래, 앞과 뒤, 내부와 외부, 위와 아래 등 상반되는 존재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신은 떠올랐다가 지는 태양의 신도 되고 시간의 신도 되었다. 더 나아가 시작된 사업들의 결과를 보장해주는 신으로도 여겨졌다. 서민 가정에서도 아침마다 야누스에게 제사를 드리고 모든 집안 문제에 대해 이 신의 도움을 구하였다. 야누스는 종종 4개의 얼굴(야누스 콰드리프론스[Ianus quadrfions])을 가진 신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1 1일은 야누스 신을 부르는 날이었고, 1(Ianuarius)은 이 신에게 바쳐진 달이었다. 시간의 주기성 개념이 없는 로마 인들에게 새해와 지난해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당연히 그들은 새해의 첫 달, 첫 날, 아침을 중요시했고, 올바른 말과 행동이 시작을 잘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문지방을 밟거나 왼발을 먼저 디디는 게 불행한 일의 전조라고 여겨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전쟁 개시도 야누스 신의 소관 사항으로 여겨 전쟁 중에는 신전 문을 열어놓고 로마 인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이 신이 달려가 주길 바랬다.

출입문의 신이기 때문에 야누스는 출발과 복귀의 신이기도 했다. 이는 중심에서 출발해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인간의 소망을 반영하는데, 로마는 통로와 영역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중심(Caput mundi)이었고, 도로망은 로마의 실존적 공간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성질을 나타냈다. 야누스 관할인 출입문과 개선문은 도로망의 교점 역할을 했다.

문헌 증거들에 따르면, 야누스의 주 신전은 로마 광장의 원로원과 에밀리아 바실리카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활약한 시인 호라티우스[Q. Horatius Flaccus]야누스에서 재산을 다 날린 후 이제 다른 일에 전념하노라. ∙∙∙∙∙ 덕은 그다음 문제이고 돈 버는 게 중요하다고, 저 위에서 야누스 신이 가르치지 않느냐.” 했는데, 에밀리아 바실리카의 한편을 차지한 은행들이 이 야누스 신전 문 앞에 있었기 때문에 재산을 다 날린 곳 야누스는 이 은행거리를 가리킨 것이다. 이 신전은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주화에 나타난 모습에서 형태를 추정할 뿐이다. 동서 양쪽에 문이나 있고 그 사이에 야누스 신상이 양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문 모양의 건물이라 야누스 문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동서로 문이 나 있는 이유는 해가 뜨고 지는 것, 곧 하루의 시작과 끝을 관할했기 때문이다.

 

로마 시내에는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 시 밀라쪼 전투를 승리로 이끈 가이우스 두일리우스가 세운 또 하나의 야누스 신전이 있었다. 26 15m 크기의 직사각형 신전으로 마르첼로 극장에서 진실의 입 광장 쪽 바로 옆에 서 있는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San Nicola in Carcere] 교회 왼쪽의 유적지가 이 신전 자리이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세워진 벨라브로의 사방문(Arco quadrifronte al Velabro)은 야누스 신에게 바쳐진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아치형 문도 아닌, 사방으로 뚫린 통로로서, 상인, 은행가들이 만남의 장소로 사용하던 건축물인데, 앞뒤가 없기 때문에 야누스의 문이라 불리었다. 이 문은 중세 시대에 요새로 변형되면서 장식 판들이 사라져 버려 4개의 궁륭형 천장 끼움돌에만 여신들을 묘사한 작은 조각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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