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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황제들의 광장[Fori Imperiali] (1) -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광장

by TES leader 2020.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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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들의 광장[Fori Imperiali]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55년 마르스 평원에 거대한 극장과 회랑 건물을 완성시키자, 카이사르는 다음 해에 로마 광장에 율리아 바실리카를 건설하고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러 기능 수행이 여의치 않은 광장을 확장하는 사업을 벌였다. 정치가들이 세를 과시하기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었지만, 거금의 사재를 들여야 하고 동료 정치가들의 견제 대상이 되기도 했으므로 정상적인 공화제 하에서는 거대한 건축물이 쉽사리 들어서지 못했다. 결국 군사력과 속주를 배경으로 삼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각축하는 시기에 수세기 동안 쉽사리 들어서지 못했다. 결국 군사력과 속주를 배경으로 삼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각축하는 시기에 수세기 동안 그대로 유지되었던 로마 중심부도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광장 확장사업으로 원로원 뒤쪽에 포럼 율리움, 즉 카이사르 광장이 들어섰고,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황제들이 이 광장과 연결된 새로운 광장들을 추가시킴에 따라, 로마 광장 옆의 거대한 공간이 광장 제대로 바뀌었다. 이 광장들을 통틀어서 황제들의 광장이라고 부르는데, 현재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으로 난 황자들의 광장 가도[Via dei Fori Imperiali]와 양 옆에 유적지가 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카이사르 광장[Foro di Cesare, Forum Iulium]

착공한 지 10년 만인 기원전 44년에 옥타비아누스가 완공한 카이사르 광장은 총면적이인 직사각형 광장이다. 광장의 북서쪽 끝에 가문의 시조 여신 비너스[Venere Gentireice]의 신전이 자리 잡았고 양 측면에 두 줄의 복도를 이루는 열주 회랑이 늘어서 있었다. 한쪽 회랑의 벽에는 캄피돌리오 언덕 면을 파서 만든 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위에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상점들이 들어섰다. 이 상점들은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르겐타리우스 언덕길[Clivus argentarius] 쪽으로쪽으로 나 있었다.

갈리아 정복 사업 중이던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내 광장 부지 확보를 부탁했고, 카이사르와 교분이 있던 폼포니우스 아티쿠스[Titus Pomponius Attius](기원전 109~32)가 이 일을 대행했다. 광장이 들어설 자리에 개인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시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구입해야 했는데, 대지 구입에 들어간 돈이 거의1 얼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했다. 당시 일반 병사의 한 달 급료가 100 세스테르티우스 정도였으니 이는 병사 100만 명의 급료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이다. 물론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 그곳에서 가져온 전리품으로 자금 문제를 해결하였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8년 그리스 북부의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와 결전을 벌이기 전에,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비너스 여신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겠다고 맹세하였고, 기원전 46 9 26일에 신전과 미완성의 광장을 낙성함으로써 그 맹세를 이행하였다. 신전 내실의 후진(여러 진 가운데 맨 뒤에 친 진)에는 이탈리아 남부 타란토 출신의 그리스 조각가 아르케실라오스[Arkesilaos]가 조각한 비너스 상이 안치되었는데, 이 신전은 건축사에서 후진이 처음으로 도입된 건물이었다. 이 신전에는 전면에 6, 측면에 9개의 기둥이 있었는데, 현재 측면 기둥 3개와 내실의 각주 기반들만 남아 있다. 신전의 건축 장식들은 측면 회랑 방 안에 보관되어 있다.

이 광장은 그때까지 로마 광장에서 전개되었던 공무 회합과 정치 활동의 또 다른 무대가 되어 로마 광장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광장의 위치가 원로원을 대표로 하는 권력 중심부 가까운 곳이라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권력 과시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헬레니즘 신전 방식을 수용한 비너스 신전도 비너스와 율리우스 가문의 관계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 선전 도구였다. 카이사르 자신도 이러한 측면을 감추지 않고 동방 군주처럼 코끼리 행렬과 함께 광장에 나타나기도 했고, 공화국 규정을 어기고 신전 중앙에 앉아 원로원 의원들을 접견한 적도 있었다. 또한 의도적으로 신전 앞에 절대권력의 상징인 알렉산더 대왕의 명마 부케 팔로스의 상을 세우게 했다.

카이사르 광장은 80년 화재로 소실되어 113년 트라야 누스가 재건하였는데, 트라야누스는 캄피돌리오 언덕을 등지고 남서쪽 열주 회랑을 연장해 복도가 2개인 기둥 구조물을 건축했다. 이 건물이 아르겐타리아 [argentaria]바실리카로 은銀을 가리키는 아르겐 타리 아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은 제품을 비롯해 청동 제품과 도자기를 거래하는 시장으로 이용되었고, 고대 말기에는 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 학생들이 벽에 낙서해놓은 아이네아스의 구절과 스케치들이 남아 있다.

남동쪽에 늘어서 있는 기둥들 사이의 반원형 화장실도 트라야 누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지금까지 발견된 로마 시대 화장실 중 최대 규모로, 광장 바닥 밑에 위치한 이 벽돌조 화장실은 하수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반지형 볼트 천장은 채광과 환기를 위해 구멍을 뚫어놓았고, 대리석으로 장식된 벽 하단에 석회화로 약 50개의 선반형 좌변기가 붙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광장[Foro di Augusto]

기원전 42,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피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이우스를 제압했다. 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옥타비아누스는 군신 마르스에게 카이사르 살해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고, 원수를 갚으면 새로운 광장에 마르스 신전을 세울 것을 맹세하였다. 이 맹세대로 40년 후인 기원전 2 8 1일 복수자 마르스 신전(Marte Ultore)과 미완의 아우구스투스 광장이 낙성되었다.

카이사르 광장의 동쪽 면과 퀴리날레 언덕 사이에 세워진 이 광장은 면적이 125 x 118m인 직사각형 공간의 양 측면에 반원형의 공간(esedra)이 추가된 모양이다. 이 광장은 민사 재판소,학교, 종교의식을 수행하는 공간이었다. 양족 에세드 라와 천장에 있는 열주 회랑이 로마 시 담당 프레 토르들이 민사재판을 처리하는 장소였는데, 칸막이로 나누어진 열주 회랑의 공간들이 각 프레토 르에게 배정되었다.

복수자 마르스 신전은 흰 대리석 건물인데 높이가 15m에 정면에 8개의 원주가 배치되었다. 마르스가 군신이라는 특성 때문에 이 신전은 전쟁을 준비하거나 개선에 관해 논의할 때 원로원 의원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속주 총독 취임자가 출발 전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또한 군신 축제 같은 특정 종교의식이나 살리 사제단의 전통의식 축제가 진행되는 곳이기도 했다.

신전의 내실 후진에는 창을 들고 있는 군신 마르스 상이 놓였고, 이 상의 왼쪽에는 비너스 여신과 로물루스, 의인화된 팔라티노 언덕의 조각이, 오른쪽에는 포르투나 여신과 로마 여신, 의인화된 테베레 강의 조각이 있었다. 또한 내실에는 카이사르의 칼과 기원전 53년 카레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 빼앗긴 후 아우구스투스가 외교적인 방법으로 되돌려 받은 군단 휘장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높이가 33m인 높은 담장을 신전의 뒷벽으로 활용했는데, 이 담장은 인접한 비탈길 서민 구역 수부라[Suburra]와 아우구스투스 광장을 분리해 수부라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광장 쪽에서 불이 번지는 걸 막고 장식에도 이용할 목적으로 광장을 조성하기 전에 축조한 것이다. 목조 아파트들이 밀집해 있는 수부라는 화재 발생 빈도가 아주 높은 구역이었고, 사실 카이사르 광장도 수부라에서 발생한 화재 때문에 이미 여러 차례 피해를 보았다. 당시 일반 가옥들은 목조 건물이라 화재 피해가 컸는데, 이 목조 가옥들은 수부라를 포함한 11개 구역을 불태운 64년 화재 이후 네로의 재건 사업 시에 벽돌 가옥으로 바뀌었다.

신전 양옆에 통로 끝에 계단이 나 있는데, 왼쪽 계단 위에는 3개의 아치 문 안에 콜로 수스 방[Aula del Colosso]이 있고, 오른쪽 계단 위에는 수부라 구역을 통하는 판타니 아치 문[Arco dei pantani]이 나 있다. 콜로수스 방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정령(Genius)에게 바쳐진, 높이가 14m나 되는 거대한 상이 있었다. 현재 이 방에는 게 니우스 석상의 손등과 손가락의 일부로 추정되는, 크기가145츠쯤 되는 거대한 손과 발 조각이 복원되어 있다. 또한 거대한 발자국이 방 끝에 놓인 대리석과 설화 석고로 덮인 석회화 주춧돌 위에 남아 있다.

광장의 모든 장식은 아우구스투스의 지배 이데올로기 구도와 연계된 것이었다. 마르스 신의 계보가 로물루스를 통해 로마의 기원으로 연결되고 전설적인 아이네아스를 통해 비너스의 후손인 율리우스 가문이 합해져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새로운 로물루스, 새로운 도시 창건자로 등장하는 구도였다. 신전의 기단 북쪽에 깔린 대리석 판에는 마르스와 비너스의 결합을 의미하는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남아 있다.

에세드 라와 열주 회랑에 놓은 수많은 공화정 시대 위이 너희들의 상은 공화정 전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콜로 수스 방에 세운 아우구스투스 게 니우스 상과 광장 중앙에 놓인 승리의 여신과 함께 있는 자신의 사두마차 상 등을 통해 자신이 권력의 정점에 자리 잡은 새로운 체제의 이념적 기반들을 상징적으로 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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