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광장[Foro della Pace]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황제(69~79년)는 71~75년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전리품과 네로가 모은 미술품들을 전시할 평화의 신전(Templum Pacis)을 지었다. 신전의 이름 ‘평화’는 베스파시아누스의 군사적인 승리가 가져온 보편적인 평화를 의미했다. 이 신전은 거대한 정사각의 열주 회랑 정원 때문에 광장의 모습을 갖게 되어 평화의 광장 또는 베스파시아누스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광장 남쪽의 신전 건물은 후진이 있는 커다란 방으로 후진에는 평화의 신상이 놓여 있었다. 광장의 열주 회랑과 4개의 사각 후진은 도서관과 박물관으로 쓰였는데, 그 안에는 페르 가뭄에서 가져온 갈라티아 인 군상을 비롯해 레오 카레스와 피디아스, 폴리클레토스의 상들, 니코마코스의 그림들을 포함한 많은 미술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노老 플라니우스는 네로가 황금 궁전에 모아놓은 것들을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민들에게 공개했다고 기록했다. 이 사각 후진 중의 하나는 카부르 가도 입구에 있는, 13세기에 콘티 디 세니 가문의 교황 인노첸트 3세가 세운 콘티 탑(Torre dei Conti)의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평화의 광장은 다른 광장들과 달리 일부분이나마 후속 건물들로 덮여 살아남았다. 현재 로마 광장 입구 왼쪽에 열주 회랑의 흰 대리석 대들보 단편들과 원주 조각들이 남아 있고, 콘티 탑 지하의 사각판 벽 구조물도 이 탑 덕분에 보존되었는데, 책장으로 쓰였던 벽감이 남아 있어 도서관 건물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신전 광장은 192년 콤모두스 때 화제로 소실된 후 208~211년 사이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재건되었고, 5세기에 다시 소실되어 방치되었다. 526~530년 사이에 남쪽 모서리는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Santi Cosma e Damiano]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광장 끝에 자리 잡은 평화의 신전은 벨리아 언덕까지 뻗어있었는데, 1930년대에 무솔리니가 현재의 가도를 건설함에 따라 벨리아 언덕과 함께 파괴되어 사라졌다.
세베루스는 이 광장을 재건한 211년에 재물 조사 기록을 기념물로 제작한 로마 시 지도(Forma Uribis Severiana)를 신전 옆방 18m 높이의 벽에 걸어놓았다. 다행히 지도 벽이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교회 건물에 포함되어 보존되었는데, 1562년 발견되어 현재 로마 문명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1/246 축도의 지도 단편 151개는 로마 시 측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네르바 광장[Foro di Nerva]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광장과 평화의 신전 사이에 조금 남은 땅을 이용하여 새로운 광장을 착공하였으나, 암살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원로원의 추대로 즉위한 네르바[Nerva] 황제(96~98년)가 공사를 재개해 97년에 완성한 이 광장은 공식 명칭이 네르바 광장이지만, 그 모양이 길쭉한 데다 다른 광장들과 평화의 신전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고대 말부터 통로를 의미하는 트란시토리움 광장[Forum Transitorium]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광장은 공화정 시대에 원로원과 에밀리아 바실리카 사이에서 시작해 로마 광장과 서민 구역인 수부라를 연결하던 아르 길레 툼[Argiletum]길과 주변 지대에 길게 뻗어 있었다. 광장 끝의 신전은 도미티아누스의 보호 여신인 미네르바 신전으로 1606년까지 보존되었으나, 이 해에 교황 파울루스 5세가 자 니콜로의 아쿠아 파올라 분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재를 구하려고 분해했다. 1995~1996년 발굴 시 이 광장 자리에서 64년 화재로 완파된 주택지 흔적이 나타났다.
또한 원로원과 에밀리아 바실리카, 네르바 광장의 남쪽 지역 발굴 결과, 기원전 3세기 도로로 추정되는 포장층이 드러났다. 도로의 오른쪽은 아우구스투스 때 복구되어 건물들이 집중된 흔적이 있는데, 공화정 시대에 지붕이 있는 시장(Macellum)이 있던 자리다. 왼쪽에는 원로원층 명사들의 가옥과 임대 가옥들이 있었다. 부자들의 가옥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숙소인 에르 가스 툴라[ergastula]가 있던 자리다. 왼쪽에는 원로원층 명사들의 가옥과 임대 가옥들이 있었다. 부자들의 가옥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숙소인 에르 가스 툴라[ergaastula]유적들도 드러났는데, 그중 상태가 완벽한 한 채의 에르 가스 툴라에는 돌고래 사이에서 수영하는 남자 모습이 있는 정사각 모자이크 바닥과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만든 흑백의 직사각형 모자이크 바닥이 남아 있다.
트라야 누스 광장과 트라야누스 시장
두 차례의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지역) 원정으로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고 막대한 양의 다키아 왕실의 보물과 금광을 차지한 트라야누스 황제가 카이사르 광장과 아우구스투스 광장 북쪽에 새로운 광장과 바실리카를 건설하기로 한 것은 이 황제가 제국 전역에 걸쳐 추진한 건축 사업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연한 것이었다. 퀴니날레 언덕의 비탈면을 깎아내고 기존의 길과 건물들을 철거하여 확보한 부지에 다마스쿠스 출신의 당대 최고의 건축가 아폴로도로스가 설계한 트라야 누스 광장[Foro di Traiano]과 울 피아[Ulpia]바실리카가 들어섰다. 이 광장이 들어섬에 따라 황제들의 광장은 최종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기존의 광장 지대와 신시가지인 마르스 평원이 직접 연결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공사 개시 5년 만인 112년 1월 15일에 완공된 이 광장은 총면적이 300ⅹ180m, 지붕이 덮인 부분의 면적이 120ⅹ90m인 가장 큰 광장으로, 직사각형 광장의 양 측면 벽 중간에 커다란 반원형 유개 광장이 추가된 모양이다. 현존하는 트라야 누스 시장 앞의 반원형 광장이 그중 하나다. 트라야누스 광장 중앙에는 트라야 누스의 기마상이 서 있었다.
광장의 북쪽 면에 자리 잡은 울 피아 바실리카는 복도 5개에 중앙 복도가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면적이 180 ⅹ 60m로 웬만한 광장과 비슷한 규모였고, 바실리카 전면 회랑 벽 위에 다키아 인들의 상이 올려져 있었다. 이 바실리카 뒤에 그리스 도서관과 라틴도서관이 마주 보고 있었고, 그 사이에 트라야 누스 원주가 들어서 있었다.
이 광장은 공공의식을 수행하는 공간이었다. 11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시민들이 국가에 진 빚을 탕감해주기 위해 부채를 기록한 서류들을 불태워버린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측면의 반원형 회랑에서는 시 낭독회나 회의가 열렸고, 바실리카의 후진은 재판소로 사용되었다. 도서관들은 중요한 국가 서류를 보관하였는데, 공화정 시대 실록도 이곳에 보관되었다.
113년에 울 피아 바실리카의 뒤에 들어선 트라야 누스 황제의 기념 원주[Colonna di Traiano]는 지금도 원래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원주는 거대한 대리석 원통 블록들을 쌓아 올린 것으로 원통 내부를 파서 만든 달팽이관 모양의 계단을 통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데, 현재 원주의 정상에는 16세기에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제작한 베드로의 청동상이 서 있다. 원주 표면에 나선형으로 감아 올라가는 띠 모양의 부조 작품들은 두 차례의 다키아 원정과 당시 로마 인과 다키아 인들의 풍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2,500명 이상의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부조 판은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커지는데, 그 이유는 광장에서 올려다보는 시민들의 눈에 위아래 작품들이 똑같은 크기로 보이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조각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무기들을 묘사한 부조 판이 4면에 붙어 있는 기단을 자신의 무덤으로 쓰려고 기단의 내부를 파내게 했고, 실제로 117년에 자신의 군사 대업을 상징하는 이 원주 밑에 안장되었다. 이 원주의 높이는 38m로, 이 자리에 있던 퀴리날레 언덕 능선의 높이에 해당한다.
트라야 누스의 후계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25~138년 사이에 트라야누스 신선[Tempio di Traiano]을 세웠다. 그동안 이 신전은 트라야누스 원주 북쪽 광장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7년 이곳을 발굴했을 때 신전이 아닌 다층 가옥 흔적이 발견되어 고고학계를 뒤흔들었다. 현재 발굴 중인 광장 중앙부에서 신전 유적이 나오리라 기대하고 있다.
울 피아 바실리카 유적지에서는 표면에 물결무늬 테가 있고 그 성분이 회색 분말인 박편(벗겨져 떨어진 조각, 약 15cm)이 보이는데, 신전 기둥들 중 하나의 윗부분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엄청나게 큰 기둥을 만들려면 돌 하나만으로는 힘들었을 것이고, 다른 돌을 덧붙여 세웠을 것이다. 이렇게 돌과 돌을 이어 붙일 때 맞닿은 부분을 감추기 위해 석회를 칠하고 물결무늬 테로 모양을 낸 것으로 보이는데, 이 방법은 기둥의 몸통과 윗부분을 좀 더 강하게 결합시키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트라야 누스 광장 동쪽 회랑에 대리석 단편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다키아 원정에 참가한 부대들의 비문이 기록된 기단 2개가 있다. 위층에 있는 원형 구멍들은 군부대 깃발을 세우는데 쓰였다.
트라야누스 광장의 북쪽 반원형 회랑 뒤에 역시 반원형인 2층 건축물이 남아 있는데, 이 건물과 그 위 비베 라티카 길과 민병대 탑[Torre delle Milizie] 공원 사이에 위치한 건물을 통틀어 트라야 누스 시장[Mercati di Traiano]이라 부른다. 이 건물은 트라야누스 광장의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절단된 퀴리날레 언덕 경사면을 축대로 해 세워졌으며, 총 6층의 건물이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시장 건물은 소매시장과 국가의 식량 창고, 배급 장소로 쓰인 복합 기능 건물로 상점들과 곡물배급청[Curia Anonae]을 비롯한 사무실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의 반원형 건물은 트라야 누스 광장과 동시에 건축되어 광장과 조화를 이루는 대칭형 건물이다. 방들의 일부는 원로원 의원들의 안전금고로 사용되었다. 반면 94~95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위의 건물은 비대칭에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현재 퀴리날레 언덕에 입구가 있으며, 중앙홀과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홀은 천장이 거대한 6개의 십자가형 볼트로 된 직사각형의 시멘트 벽돌 건물로 로마 상점가의 전형적인 구도를 보여준다.
로마가 몰락한 후 이 건물은 한때 수도원으로 사용되었고, 13세기에 42.5m 높이의 민병대 탑과 함께 카에타니 가문의 요새로 전용되었다. 민병대 탑은 12세기에 석회화 블록으로 세운 정사각형 탑으로 13세기 중반 이후 높이가 확장되었으나 지진으로 확장된 부분은 무너져버렸다.
트라야누스 시장과 아우구스투스 광장 에세드 라 사이에 회랑형 테라스가 있는 벽돌 건물은 원래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지어진 개인 가옥으로 12세기에 개축되었다. 이 건물은 15세기에 몰타 기사단의 전신인 로디 기사단이 구입해 사용했기 때문에 로디 기사의 집[Casa dei Cavakueri di Rodi]이라 불리게 되었다. 정문은 시장 뒤쪽의 그릴로 광장 1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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