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 칼리스투스의 이력
신생 크리스트교는 로마 세계에서 공인된 종교로 자리잡기까지 이교도 사회 안에서 비슷한 성격의 다른 종교들과 경합을 벌이며 교세를 확장해나갔다. 크리스트교로 개종하는 이교도들이 늘어나면서, 하층민 거주 구역뿐 아니라 귀족층 내부에도 독실한 교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크리스트교인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이나 교인들 사이의 관계도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지하묘지의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칼리스투스 교황의 이력은 2세기 말~ 3세기 초 로마 시 크리스트교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칼리스투스는 155년경 노예로 태어났으며, 현재 카라칼라 목욕장 유적과 유엔 산하 국제 식량기구(FAO)가 자리 잡고 있는 아피아 가도 옆 변두리 구역(12구역)에서 은행을 운영했다. 오늘날 대형 은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하는 물건’에 불과한 노예가 은행을 운영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맡기는 돈의 중량과 순도를 검사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어 이자 수익을 돌려주는 초보 단계의 로마 시대 은행은 큰 자본 규모를 지닌 곳이라 해도 대체로 주인과 한두 명 정도의 점원이 일하는 사설 은행이었다. 그러니 한산한 변두리 구역에 있던 칼리스투스 은행의 규모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로마 사회의 노예는 궂은일만 하는 단순 노동력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고도의 지식을 요하는 일도 맡고, 주인의 신임도에 따라 다양한 재량권도 가진 존재였다는 점이다. 수익을 내는 상업 종사 노예나 전문직 노예는 수익의 일부를 일종의 인센티브로 받아 저축했고, 저금이 몸값에 이르면 자기 몸을 자기가 사는 방식으로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자유민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지만, 개인의 능력도 공식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는 점이 로마 노예제의 특성이었다. 재정기의 거부(큰 부자)들 중에는 노예 신분으로 시작해 재산을 모은 자들이 많았고, 이들, 곧 해방 노예들은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정무관직을 맡을 수 없었지만, 그 후손들 중에서는 고위 관직은 물론이고 황제가 되는 인물이 나오기도 했다.
칼리스투스의 은행도 주인인 황실 해방 노예 카르포포루스가 자본을 대고 재정 보증도 해주었으며, 주인은 칼리스투스를 개종시키고 세례도 준 동료 교인이었다. 이 지역에는 상당수의 크리스트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칼리스투스는 크리스트교도들이 저금한 돈을 유대인들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일을 했다. 그런데 이 은행이 파산하면서 그의 인생에 전기가 왔다. 칼리스투스의 은행이 파산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의 운영 능력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콤모두스 황제의 물가 상승 억제책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경제 불황에 있었다. 사실 경제불황은 변두리 구역의 하층민들에게 더 심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 여파로 그의 은행이 이자 회수를 제대로 못 해 파산하고 만 것이었다. 줄행랑을 놓은 칼리스투스를 붙잡은 주인은 은행 파산의 책임을 물어 그를 쉴 새 없이 맷돌을 돌리는 강제노동 소에 수감시켰다.
강제노동형을 마친 칼리스투스는 유대인 예배당에 찾아가 유대인들이 대부분 이자를 갚지 않아 파산했다고 소동을 벌였고, 유대인들은 그를 시 장관에게 고발하여 재판을 받게 했다. 그가 크리스트교인이라는 유대인들의 고발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 장관은 확인 심문을 했는데, 그는 주인의 위증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집해 사르데냐 광산 노동형에 처해졌다. 3년 동안 광산에서 노역을 살던 칼리스투스는 189년 황제의 후궁 마르키 아가 형기 중인 크리스트교도들의 사면을 얻어냈을 때 이 그룹에 속해 있어서 풀려날 수 있었다. 3년 후 주인으로부터 해방 되어 자유민이 된 칼리스투스는 집사로 성당 활동에 전념하다가 제페 리누스 교황의 눈에 들어 지하묘지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뛰어난 자질과 행정력을 발휘하여 교황 사후 후임자 자리에 올랐다. 그가 관리자로 있었던 칼리스투스 지하묘지(Catacomba di San Callisto)는 3세기 교황들 대부분이 매장된 곳이다. 지하묘지의 소유권은 그 위 지상의 토지 소유자에게 있었으므로 크리스트교도 지하묘지는 대개 크리스트교나 크리스트교에 호의적인 사람의 소유지 내에 있었다. 따라서 지하묘지 관리자가 된다는 것은 크리스트교 공동체 내에서 인정을 받은 경우에만 가능했고 관리 능력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칼리스투스의 이야기는 당시 크리스트교도라는 점이 직업이나 활동 면에서 실질적인 제약이 되지 않았고, 크리스트교도들이 지역 사회에서 경제, 사회적으로도 공동체로 엮여 있었다는 점, 주인과 노예, 보호자와 피보호자 사이의 보호 관계가 강한 로마 사회의 성격 때문에 종교적인 유대감도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크리스트교 성향의 후궁 마르키아는 이미 황실 내부에도 크리스트교 사상이 상당히 침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종교와는 무관한 이유로 고발당할 경우에도 크리스트교 도라는 점이 쟁점이 되고 실형으로 이어지는 애매하고도 복잡한 상황도 나타났다. 이는 적어도 2세기 말에 국가와 크리스트교 공동체의 관계가 일방적인 탄압이나 색출이 아니라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문제로 부각되는 경우에만 법이 적용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가내 성당
공인 되기 전, 크리스트교도들이 예배드리던 장소는 일반 가옥 안의 가내 성당이었다.오늘날 중국이나 북한의 경우처럼 로마의 교인들은 평시에 성당에 모여 비밀리에 예배를 드렸고, 간헐적인 박해기에는 이곳을 은신처로 삼아 목숨을 부지하였다.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에는 이러한 가내 성당 자리에 들어서거나 가내 성당을 활용한 성당들이 시내 곳곳에 나타났다.
'이탈리아 Italy > 로마사 (Roma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 카타콤베[Catacombe]의 역사 (0) | 2021.01.03 |
---|---|
산타 푸덴지아나 / 산타 프라쎄데 / 산 마르티노 아이 몬디 /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0) | 2021.01.02 |
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 - 크리스트교 박해 (0) | 2020.12.31 |
신전 건축의 백미 - 로마와 비너스 신전(Tempio di Roma e Venere) (0) | 2020.12.30 |
판테온[Pantheon] (0) | 2020.12.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