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
■ 크리스트교 박해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 시에 들어왔을 때 아피아 가도에 있는 역관까지 마중을 나온 사람들은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다. 이 시기에 이방인들의 개종이 전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동안 폼페이 유적지에서 크리스트교 문양이 발견되어 이 도시가 화산재에 덮이는 79년 이전에 이미 로마 시 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들에도 크리스트교인들이 있었다는 주장의 증거로 이용되었지만, 후대의 도굴꾼들이 저지른 짓으로 판명되어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로마 인들은 복속된 민족의 종교에 대해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체로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에 대해서는 가혹한 편이었다. 신학적인 동기뿐 아니라 사회, 정치, 도덕적인 면에서 특히 크리스트교에 대해 더욱 심했는데, 이는 크리스트교의 메시지가 로마의 전통적인 덕성에 어울리지 않는 청빈과 박애를 중시하여 로마 인들의 도덕적 가치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의 영원성과 결부된 선제(선대의 황제)의 신격화는 제정 로마의 현실이었으므로, 크리스트교의 유일신 사상도 로마의 정치와 이념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로마 정부가 보기에 초대 교회가 이룬 조직들은 어느 순간에 반도(반란의 무리)조직으로 바뀔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크리스트교를 기소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수단과 절차가 필요했으므로, 이교도들은 크리스트교들의 생활습관과 제사 의식을 가지고 트집을 잡았다. 성찬식의 의미를 곡해하여 인육을 먹고 아이를 죽인다거나, 공동체 내에서의 생활방식을 두고 간통을 한다고 비난하였고, 네로 시대의 로마 화재나 군 생활, 정치 활동, 전통 종교 활동에 대한 반감 등 크고 작은 범죄의 책임을 그들에게 지웠다. 공인될 때까지 약 250년 동안 많은 크리스트교도들이 순교했지만 제국 정부의 크리스트교 박해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우연한 사건과 결부되거나 황제 개인의 종교정책에 따라 간헐적인 박해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첫 크리스트교 박해 사건은 64년 대화재를 기화로 발생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대전차 경기장 옆 선술집 거리에서 시작된 화재의 규모가 너무 컸기에 별장에 가 있던 네로가 서둘러 돌아와 구호 작업을 펴고 물가 안정 조치를 취했지만,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황제가 자신의 궁전을 새로 지을 목적으로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았다. 로마 시가 수없이 겪은 자연 화재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지만 소문이 진정되지 않자, 네로는 이를 누르기 위해 크리스트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신생 크리스트교와 교도들에 대한 세간의 평판이 좋은 편이 아니었던 데다 이 화재가 일부 과격한 크리스트교도들의 소행이라는 소문도 나돌았으므로, 방화범으로 몰 이유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네로의 박해는 정치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로마 시에 국한되었고, 크리스트교 교리를 모르는 이교도 사회에까지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가 향후 크리스트교 세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유일신 신앙 때문에 크리스트교도들이 희생당한 종교 탄압 사건은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발생했다. 그러나 이 박해는 크리스트교만 표적이 된 것이 아니라 이교 전통을 거부하는 크리스트교와 유대교를 포함한 유일신 종교들과 비교들이 모두 대상이 되었고, 박해 지역도 이탈리아에 한정되었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크리스트교 박해라 하기 어렵다. 도미티아누스는 이전의 황제들과 달리 현신으로 행세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인해 로마 지도층 인사들이 상당수 희생당했다. 한편, 이미 30년대 말에 카리굴라가 현신 행세를 해 유대인 폭동이 발생하였으나, 신생 크리스트교는 발아 상태에 불과해 피해를 입을 이유가 없었다.
2세기 초 비타니아 총독 소小 플리니우스[G. Pinius Secundus]가 이 속주의 크리스트교도들 동향과 대처 방안에 대해 트라야 누스 황제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황제의 답신 내용은 로마법을 어기거나 전통 종교를 무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크리스트교도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후임 황제들도 관용책을 폈기 때문에 크리스트교는 교세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갈리아 속주에서 국지적인 박해가 발생하여, 177년 리용 시의 원형경기장에서 크리스트교도들이 사자 밥이 되었는데, 이는 서방 속주에서도 크리스트교도들이 지역 이교도들과 마찰을 일으킬 정도로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세기 말에 등장한 세베루스 왕조는 황비가 시리아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하여 크리스트교의 개종을 금지하고 전통 종교 외에도 시리아의 태양신 등 동방 기원의 다른 종교들을 지원해 반反 크리스트교 전선을 강화하는 정책을 썼다. 앞에서 이야기한 헬리오가발루스는 이 경향의 정점에 선 황제였다.
크리스트교 박해는 3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군인황제 시대는 끊임없는 대외전과 내전으로 얼룩진 시대여서 황제들이 명도 짧았고, 대부분 속주 출신으로 군대에서 출세한 인물들이라 종교정책 자체가 일관되지도 않았으므로, 출신 지역이나 주둔 지역의 종교를 숭배하고 황제 숭배를 강화하는 경향이 강했다. 250년에 데키우스[Decius](249~251년)는 크리스트교도들이 전통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강요했는데, 일부 크리스트교도들은 공포에 질려 굴복하였고, 일부는 관리를 매수해 가짜 증명서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박해를 피했지만, 적지 않은 크리스트교도들이 죽음을 택했다.
크리스트교도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박해는 세기가 바뀌면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였는데 이것이 마지막 박해였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에서 칙령을 공포해 예배당으로 사용되는 건물(가내 성당)과 성서를 몰수하고 집회를 금지시켰다. 개종하지 않은 크리스트교도들은 목숨을 잃었고 그들의 재산은 당연히 몰수되었다. 공식적인 박해는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크리스트교 공인을 합의함으로써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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