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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산타 푸덴지아나 / 산타 프라쎄데 / 산 마르티노 아이 몬디 /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by TES leader 2021.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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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푸덴지아나 성당

현자 비미날레 언덕 내무부 옆에 있는 산타 푸덴지아나[Santa Pudenziana] 성당은 가내 성당으로 시작된 성당이다. 네로의 박해 때 사도 베드로의 전도로 개종한 원로원 의원 푸덴스는 자기 집을 베드로의 은신처로 제공했다고 하는데, 베드로가 순교한 후 푸덴스의 집은 가내 성당으로 발전하였고, 4세기에 그 자리에 푸덴스의 큰 딸 이름을 딴 산타 푸덴지아나 교회가 들어섰다. 이 성당은 비미날레 언덕으로 올라가는 파트리키우스 길(Vicus patricius)가에 있는데, 실제 2세기 공중목욕탕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파트리키우스 길은 오늘날의 우르 바나 길(Via urbana)이다. 후대 로마 인들이 주변 지대를 흙으로 덮어 지면이 상승했기 때문에 현재 교회 바닥이 도로 면에서 4m 지하에 위치한다. 이 교회 바닥 아래에서 푸덴스의 집으로 추정되는 2층 가옥의 한쪽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1층 바닥은 기원전 1세기의 것이다.

성당 정면의 정교하게 다듬은 로마 시대 원주와 그 위에 있는 장식 벽에서는 11세기에 제작된 성 목자와 희생양 조각을 볼 수 있는데, 중세 조각의 세련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교회 내부 후진에는 모자이크 그림인 <옥좌에 앉은 예수>가 있다.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예수의 양 옆에 사도들이 앉아 있고 그 뒤에 2명의 여인이 서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먼저 로마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물화라는 점, 인물들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는 점, 또한 후진 천장의 복음서 저자 상징들이 로마 성당에 처음 등장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등장인물과 재경이 철저하게 로마식이라는 점도 이 그림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황제(또는 콘술)와 원로원 의원들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로마식 회랑이 배경 건물로 등장하는데, 이교도 세력이 아직도 강력한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보다 친숙한 인물과 배경을 통해 동방 기원의 크리스트교를 토착화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간단히 말해 크리스트교 이데올로기와 로마의 정치, 종교적 특성이 상징적으로 결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성당은 원래 기둥 12개가 복도를 셋으로 나누는 구조였으나 1588년 복구작업 때 단일복도 구조로 바뀌었다가 1930년 복원사업으로 원래의 벽체와 바닥 모자이크, 로마 시대 목욕탕 욕조가 드러났다. 중세기 측면 벽에는 고대 성당 기둥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타원형 구조의 쿠폴라는 이탈리아 최초로 이 교회에 설치된 것이다. 왼쪽 복도에는 목욕탕 하수구가 남아있는데, 중세인들은 이 하수구를 순교자들의 피를 모아놓은 성스러운 우물로 여겼다.

 

산타 프라쎄데 성당

푸덴스의 둘째 딸 이름이 붙은 산타 프라세데[Santa Prassede] 성당도 가내 성당 기원의 성당이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옆 골목길에 있는 이 성당은 고대 말엽에 세워졌으나 중세 시대에 무너져 9세기에 교황 파스칼 1세가 성당이 있던 자리에 직접 재건하였다. 후진과 개선아치는 거의 독보적인 중세 모자이크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9세기 초 로마 모자이크 화파가 장식했다는 후진의 그림은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인도로 구원자 예수 앞에 나온 프라쎄데와 푸덴지아 자매에게 예수가 축복하는 내용으로 양끝에는 성 제노와 파스콸레 교황이 서 있다. 생존 인물인 교황인 사각 후광으로 표시되어 있고 두 자매는 비잔틴식의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다.

이 성당이 자랑하는 명소는 중세 시대에 천국 정원이라 불렸을 정도로 유명한 산 제노네 예배당(Cappella di San Zenone)으로, 이 예배당은 로마에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비잔틴 유적이다. 파스칼 교황은 어머니 테오도라를 기리기 위해 순교자 제노에게 바치는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이곳은 예수와 천사들, 성인들을 묘사한 모자이크화로 덮여 있고, 바닥에는 코스마(Cosma)풍 장식 미술을 예고하는 대리석 장식이 깔려 있다.

이 예배당 옆에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벽옥 기둥이 서 있는데, 중세 로마인들은 예수가 이 기둥에 묶여 채찍질을 당했다고 여겼고, 이 기둥을 옮겨온 십자군 병사를 시조로 한 콜론나(기둥) 가문이 생겨났다. 성물실에는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가 그린 <채찍질 당하는 예수>가 있다. 복도 각주 위에 있는 <산토니 대주교의 흉상>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16세 때인 1614년에 처음으로 제작한 조각품이다. 교회 입구 근처 바닥에는 우물을 덮은 자주색 원판이 있는데, 푸덴지아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 우물에 순교자들의 피를 담았다고 한다. 벽의 비문에는 순교자가 약 2,3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산 마르티노 아이 몬티 성당

3세기에 아퀴티우스라는 사제의 집에서 크리스트교도들이 모임을 가지면서 형성된 가내 성당 자리에 6세기에 들어선 성당이 프라쎄데 성당 남쪽에 위치한 산 마르티노 아이 몬티[San Martino ai Monti] 성당이다. 이 성당 옆길로 들어서면 성당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기원전 2세기 건물의 응회석 블록 구조물을 볼 수 있다. 이 건물은 로마 신전들에게 가져온 원주들과 선지자 엘리아 이야기를 그린 가스파르 뒤게[Gaspard Dughet]의 프레스코 벽화가 유명하지만, 진짜 볼 만한 것은 17세기 지하납골당을 지나 더 내려가면 나오는 3세기 유적이다. 계단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2층 이상의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 보이는데, 수부라 언덕길을 향해 출구가 나 있는 이 건물이 바로 에퀴티우스의 집이자 가내 성당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건축 양식이 공용건물의 그것과 비슷해 인근의 트라야누스 목욕탕 부속 건물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현재 성당은 9세기 건물을 17세기에 일부 개축한 것이다.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쇠사슬의 베드로) 성당

산 마르키노 성당에서 세떼 살레 길을 따라 내려가면 쇠사슬의 베드로 성당(San Pietro in Vincoli)이가 나온다. 현재 로마대 공과대학이 둘러싸고 있는 이 성당은 원래 3세기 가내 성당 자리에 교황 레오 1세가 기증한 쇠사슬을 보관하기 위하여 440년경 황모 에우도씨아가 건축한 성당이다. 가내 성당 유적은 1957년에 발견되었는데, 그 아래에 기원전 2세기의 두 채의 가옥 유적과 더 아래에 기원전 4~3세기의 가옥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당이 자리 잡은 파구 탈 비탈길은 아주 오래된 주거구역이었음이 분명하다.

5개의 아치로 꾸며진 주랑 현관뿐 특별한 장식이 없어 외면상 성당 느낌이 들지 않는 이 성당은 8세기 말에 확장된 후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도 개축과정을 겪었지만, 24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3면의 복도를 이룬 초기 성당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가 로마 광장의 마메르티노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묶여 있었던 쇠사슬과 팔레스타인에서 가져온 쇠사슬이 닿자마자 달라붙었다는 전설이 중세 시대에 생겨났고, 1706년 파로디[Parido]가 나무로 조각된 천장 중앙에 이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이 성당이 유명한 이유는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이 소장되어 있어서이다. <모세 상>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 장식용으로 제작되었으나, 실제 교황의 무덤과 관계없는 이 성당 안에 놓이게 되었다. 원래 율리우스 2세는 베드로 대성당 중앙부에 자신의 영묘형 무덤을 세우기로 하고 1505년에 미켈란젤로에게 무덤 공사를 맡겼는데, 이 공사는 미켈란젤로 자신이 훗날 무덤의 비극”, “이 무덤에 사로잡혀 허송세월한 젊은 시절이라고 표현한 거서럼 그를 괴롭힌 악몽이었다.

대작을 맡아 꿈에 부푼 미켈란젤로는 카라라 채석장에 가서 작품에 쓸 대리석 덩어리 40여 개를 직접 골라 작업장에 옮겨오는 열의를 보였으나 그 사이에 미켈란젤로의 재주를 시기한 미술가들과 이들을 후원하는 정치가들의 입김이 작용해 무덤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들은 교황이 브라만테에게 맡긴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를 먼저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미켈란제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리게 된 것도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를 물 먹이려고의도적으로 추천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이 천재 조각가는 브라만테를 비롯한 다른 미술가들의 질시 대상이었다.극도로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가 교황과 브란만테와 라파엘로를 대놓고 비판하여 피렌체와 교황청 사이의 외교관계까지 어색해졌다.

교황의 사면과 화해로 로마에 다시 온 미켈란젤로는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천자와 <천지창조>를 완성한 후 율리우스 2세 무덤에 쓸 조각 작업을 재개해 현재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배반한 노예><죽어가는 노예>, 그리고 1515년에 <모세 상>을 제작하였으나 후임 교황 메디치가의 레오 10세와 클레멘트 7세의 압력으로 무덤 공사가 수포로 돌아갔다. 율리우스 2세의 실제 무덤은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자리잡았지만, 메디치가의 교황청 지배가 끝난 후 율리우스 2세 후손들의 요청으로 미켈란젤로의 제자들이 쇠사슬의 베드로 성당 오른쪽 복도 끝에 소규모 무덤 장식을 세웠고, 제작한지 30년 만에 <모세 상>은 이 무덤 장식 한가운데 자리 잡게 되었다.

십계명 판을 겨드랑이에 꽉 기고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신으로 받든 백성들을 분노와 실망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니 벌떡 일어나 불호령을 내릴 것 같은 모습에서, 스탕달이 왜 이 조각품을 보지 못한 자는 조각의 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라고 단언했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머리의 뿔은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처음 번역될 때 광채로 오역하는 바람에 모세의 상징으로 굳은 것이다. (출애굽기 34 29)

<예술가 열전>의 저자 바사리[Giorgio Vasari] <모세 상>과 경합을 벌일만한 작품이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하면서, 당대 로마 유대인들이 토요일마다 <모세 상>에 경배하러 몰려들었는데 경배를 받아 마땅한, 신성이 깃든 작품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이 작품을 완성한 후 미켈란젤로가 스스로 도취되어 왜 말을 하지 않아?”라고 물으면서 망치로 모세 상의 무릎을 쳤다는 일화가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양 옆의 여인상은 경건한 삶과 활동적인 삶을 상징하는 야곱의 처 라헬과 레아 상으로 <모세 상>을 만든 지 30년 만에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작품이고, <모세 상> 위의 율리우스 2세의 와상은 마소 델 보스코의 작품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의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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