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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로마 7대 초대 성당 - 산 피에트로 [San Pietro](베드로) 대성당 (1)

by TES leader 202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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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시로 324년에 시작되어 그의 사후에 완공된 옛 베드로 대성당, 즉 콘스탄티누스 성당은 바티칸의 거대한 무덤 지대에 들어선 것으로, 성당을 건축할 때까지도 무덤 지대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건축물들이 기존 건물을 토대 삼아 올라선 것과 달리 기초공사를 완전히 새로 했다. 초기 성당은 85 ⅹ 64m 넓이에 복도가 5개인 바실리카 건물로, 후진은 반원형이고 측면 복도는 매우 좁은 편이었으며 졍면은 모자이크 장식되어 있었는데, 16~17세기에 현재의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완전히 해체되어 르네상스 시대 회화작품에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의 발굴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기반과 장식들, 그리고 카리굴라 기념비가 발견되었는데, 이 기념비는 경기장 벽에 붙어 있던 것이다.

로마 초기에, 토양이 척박해서 농민들 대신 점술가(바테스[Vates])들이 자리잡은 언덕과 주변 지대를 바티카누스 [Vaticanus]라 불렀는데, 서북구 해안으로 향하는 아우렐리아 가도(Via Aurelia)가 뚫리면서 중요성이 커진 이 지역에 제정 초기에는 황실 별장과 카리 굴라 전차경기장이 들어섰으며, 2세기부터 경기장 측면부에는 이교도들의 네크로폴리스가 형성되었다.

바티칸 네크로폴리스는 옛 성당 후진에는 중앙 복도 왼쪽에 길게 자리잡았고, 경기장은 왼쪽 복도 아래에 있었다. 전차 경기장 측면을 따라가는 작은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무덤들은 125년경부터 2세기 중반까지 형성된 이교도 무덤 지대와 260년대에 들어선 크리스트교도의 무덤 지대로 구분되는데, 3세기 초에는 사용 중지된 경기장 트랙 분리대까지 잠식하였다. 전자는 부유한 해방 노예 가문들의 무덤들도 화장 무덤과 매장 무덤이 섞여 있고 디오니소스, 이시스, 아폴로의 그림이 남아 있는 반면, 후기 것들은 모두 매장 무덤이고 크리스트교 신앙을 보여주는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한편,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제단 아래에서 7 ⅹ 4m 정도의 작은 광장을 둘러싼 2세기 크리스트교도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이 광장에는 높이가 2.3m쯤 되는 2세기 중반경의 벽감 장례비 2개가 서 있고, 3세기 중반경의 것으로 보이는 광장 바닥이 모자이크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을 사도 베드로가 묻힌 크리스트교 무덤 지대라고 여긴 2세기 크리스트교도들이 광장을 조성해 기념하고, 광장 주변에 계속 무덤을 씀에 따라 무덤 밀집 지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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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시대에 베드로의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대리석 상자에 보관했다고 하는데, 이 광장의 무덤에서 60대 남자의 뼛가루와 금실이 든 자주색 천이 발견되었다. 자주색 옷은 로마의 고위층 인물들이 입었으므로, 이 유해의 주인공이 당시 크리스트교 사회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히다. 크리스트교 전승은 64년 화재를 기화로 발생한 네로의 박해 때 사도 베드로가 카리 굴라 경기장에서 순교했으며, 그 옆 무덤 지대에 매장되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사도의 무덤 위치에 대한 크리스트교 전승이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음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셈이다.

이 성당은 베드로의 순교지와 매장지라는 명성 때문에 각별한 취급을 받아 중세 초엽부터 순례자들이 기적과 효력을 찾아 몰려들었다. 또한 교황청이 자리잡기 수세기 전부터 세례를 받으러 오거나 제관을 쓰기 위해 각국의 명사들과 권력자들이 찾아들었다. 이들 중에는 색슨 족 왕비 케드웰도 있었는데 그녀는 세례를 받은 후 로마에서 죽었고, 사를마뉴의 숙부는 죄를 고백한 후 수도사가 되었다. 한편 제관을 받으러 온 대표적 인물은 800년 성탄절에 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은 샤를마뉴였다.

아비뇽 유수를 겪은 후 교황청이 바티칸에 자리 잡게 되자, 이미 1,000년 세월이 흘러 규모도 작고 붕괴될 위험이 있는 성당을 개축할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피렌체 출신의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권유에 따라 교황 니콜라스 5(1447~1455)는 옛 성당을 허물고 교황청의 위상에 걸맞은 웅대한 건물을 세우고자 했다. 베른나르도 로쎌리노[Bernardo Rossellino]가 설계한 새 교회 건축 사업은 교황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는데, 그 흔적이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 니콜라스 예배당(Cappella Niccolina)에 남아 있다.

반세기 후 율리우스 2세가 브라만테에게 새 성당 건축을 의뢰함에 다라 1506 4 18일 시작된 베드로 대성당 신축공사는 교황들의 잦은 교체로 인해 일관된 공사 추진이 어려웠던 데다가 복잡한 국제정세와 재정 부족으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은 후 1626년에 마무리되어 그해 11 18일에 우르바누스 8세가 축성하였다. 공사기간에 교황이 19명 바뀌었고, 재정문제가 면제부 매매와 관련해 종교개혁의 원인으로 작용했음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브라만테는 당대 유행대로 그리스 십자가형, 즉 중앙 복도와 측면 복도의 길이가 같은 건물을 구상하였으나, 1514년 그가 사망한 후 라파엘로가 이를 중앙 복도가 긴 라틴십자가형으로 수정하였다. 그러나 1546년 책임자로 임명된 미켈란젤로가 그리스 십자가형 건축을 다시 채택하여 더 나아가 중앙집중식 구조로 바꾸었으나 1564년 그의 사망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비뇰라[Vignola]와 피고 리고리오[Pirro Ligorio], 자코모 델라 포르타. 도메니코 폰타나가 원래의 설계를 일부 수정하였고, 마지막으로 칼르로 마데르노[Carlo Maderno]가 중앙식 그리스 십자가형 건축 대신, 복도의 길이를 늘려 고전기 바실리카식 구조로 건물을 완성하였는데, 성당 정면도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132m 높이의 쿠폴라는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1588~1589년에 완성되었다.

엄밀히 말해 이 성당은 2개의 성당 공간을 합쳐놓은, 즉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중앙집중식 그리스 십자가형 성당 건물과 마데르노가 덧붙인 입구 쪽의 측면 예배당들과 중앙 복도 건물이 결합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거대한 그리스 십자가형 구조물 위에 환상적인 쿠폴라가 올라선 이 천재적인 장인의 빼어난 건축물을, 마데르노가 추가시킨 전면 복도와 역시 그의 작품인 지나치게 넓은 성당 정면이 가리고 있는 게 애석할 따름이다. 양쪽의 바티칸 성벽 때문에 측면에서 둘러볼 수도 없으니 천상 쿠폴라와 뒷부분을 감상하려면 멀찌감치 떨어져 서야 한다. 물론 교황 파울루스 5세가 현관 회랑을 길게 해 양쪽에 시계탑을 세우길 바랐다고 하니, 이를 마데르노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구조를 바꾼 이유는 라틴십자가형인 옛 성당 공간을 다 덮어야 하고, 길이가 그리스 십자가형보다 긴 라틴 십자가형의 성당이 더 웅장해 보인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나마 광장을 감싼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열주 회랑이 불균형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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