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로마 카타콤베의 종류 & 크리스트교 공인과 국교화

by TES leader 2021. 1. 3.
728x90
반응형

카타콤바 디 산 세바스티아노 [Catacomba di San Sebastiano]

4층 깊이의 지하통로로 이루어진 묘지로 성 세 비스티 아누스가 순교한 후 그의 유해를 지하 2층에 안치하여 그의 이름을 붙였다.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중세 시대에 흑사병으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하는 수호성인으로 알려졌는데, 크리스트교 전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젊은 근위대 장교 세바스티아누스가 비밀리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것이 발각되어 화살형에 처해졌으나 죽지 않고 살아나 황제에게 잔인한 탄압행위를 중지하라고 항의하다가 고문당해 죽었다고 한다. 화살을 맞은 세바스티아누스의 모습은 후대 예술가들의 훌륭한 작품 소재가 되었다.

 

 

카타콤바 디 산타 도미틸라 [Catacomba di Santa Domitila]

도미틸라 지하묘지(Catacomba di Santa Domitila)는 로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하 5층 규모의 묘지로, 3세기 초부터 5세기까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서 약 1마일 떨어진 아르 데아 티나 가도(Via Ardeatina)를 따라 점차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지하묘지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조카딸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소유한 땅(praedium Domitilla) 지하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도미틸라와 그녀의 남편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클레멘스는 처형되고, 도미틸라는 유배당했다고 한다.

플라비우스 가문의 히포 게움 [Hypogeum], 즉 지하에 있는 유해 안치실로 여겨졌던 히포 게움은 이 가문의 것이 아니라 3세기의 다른 가문의 것으로 밝혀졌는데, 크리스트교와 무관한 가문 무덤이었다. 이 히포 게움은 크리스트교의 영향으로 4세기에 카타콤바에 포함되었으며, 이때 내부는 벽화로 장식되었다. 히포게움 입구 왼쪽에는 샘터가 있고 깊이가 11m나 되는 우물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궁륭형 천장으로 된 큰 방이 있는데, 이 방은 장례식을 위한 공간이었다.

현재 이 카타콤바는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의 무덤 위에 이들을 기리기 위해 축조된 4세기 바실리카식 교회의 측면 복도와 입구가 연결되어 있으며, 상당수의 크리스트교 벽화와 비문들을 보관하고 있다.

 

 

카타콤바 디 산 칼리스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칼리스투스 교황은 교황이 되기 전에 이 카타콤바의 관리자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으므로, 이 카타콤바는 훗날 칼리스토 카타콤바라는 이름을 붙게 되었다. 아피아 가도와 아르 데아 티나 가도가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이 카타콤바는 235년 사망한 폰티아누스 교황을 시작으로 3세기의 모든 교황과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다음 해에 서거한 멜키아데스 교황까지 13명의 교황이 매장되어 있어서 유명하다. 교황들의 지하 납골당(Crypata)에는 교황들의 그리스어 비문과 납골당을 전면 개축한 교황 다마 수스(366~384년)가 기록한 라틴어 비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교황들의 납골당을 지나면 산타 체칠리아[Santa Cecilia]의 납골당에 이르게 된다. 303, 로마의 귀족 집안 출신이며 크리스트교 도인 체칠리아를 목욕탕에 가두고 불을 때 뜨거운 증기로 데워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참수형을 시켰는데, 몸과 머리가 분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순교하여 음악인들의 수호 성녀가 되었다. 1500년대에 건립된 로마의 음악 전문학교의 이름이 산타 체칠리아다.

이곳에는 성녀 체칠리아의 순교를 묘사한 대리석상이 있는데, 목에 칼자국이 선명하다. 16세기 초에 성녀의 관을 연 일이 있었는데, 1,000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유해는 순교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관을 여는 현장에 있던 스테파노 마데르노[Stefano Maderno]가 대리석 조각을 남겼는데, 현재 이곳에 있는 대리석상은 그의 작품을 복제한 것이다.

지하 묘지의 통로 벽돌에는 요나의 생애’ ‘바위를 쳐서 샘이 솟게 하는 모세’ ‘이삭의 희생’ ‘그리스도의 사례’ ‘무덤에서 일어난 나사로’ ‘오병이어의 기적등 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한 프레스코 벽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1960~1961년에 지하묘지의 북쪽에서 커다란 지하 성당이 발굴되었는데, 이름을 알 수 없어 무명의 교회(Basilica Anonima)라 부른다. 지금까지 발굴된 내부의 통로는 약 20km에 달한다.

 

 

크리스트교 공인과 국교화

312년 밀비오 다리 앞 평원에서 벌어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막센티누스 황제의 패권다툼은 초대 성당이 수면 위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다음 해에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 황제와 만나 완전한 종교의 자유와 크리스트교 교회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냈다. 이 합의 내용이 크리스트교 역사의 전기가 된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 교회들은 전대에 진행된 박해로 몰수당한 재산을 회복하고 부역을 면제받았을 뿐 아니라 법인의 성격도 갖게 되었다. 311년 갈레리우스[Galerius](305~311)가 동방의 황제 리키니우스[Licinius](308~324)의 압력을 받아 관용력을 공포한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진행되던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Maciminus]의 박해도 중단되어 이 칙령은 전국적인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국가로부터 라테란에 교구청을 지을 부지와 자재를 제공받은 크리스트교는 조직망을 신속히 확보해나갔으며,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여타 종교들을 몰아는 데 앞장섰다. 그동안 비밀리에 또는 묵인하에 가내 성당에서 예배를 보던 크리스트교도들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은 성당 건물에서 공식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전승대로 계시 때문에 마음을 바꾼 것인지, 크리스트교 세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크리스트교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는 로마 인들이 특별히 탄압 정책을 펴지 않았고, 크리스트교의 교리도 하층민을 중심으로 서서히 사회 각층에 침투하여 비공식적으로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크리스트교가 공인되기 전 몇십 년 동안 박해가 집중적으로 진행된 점은 크리스트교 세력이 표적이 될 만큼 커졌다는 뜻이고 이는 로마 사회가 조만간 크리스트교를 정치적, 사회적으로 끌어안아야 할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크리스트교를 수용하는 로마 정부의 태도는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개선문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신의 힘을 언급했을 뿐이지, 불굴의 태양신 숭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임종 시에 개종했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다만 그의 치세가 크리스트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 324년 리키니우스를 제압해 통일제국을 회복하고 337년 자신이 만든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할 때까지 4 반세기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권력 정상에 서서 이교 중심의 사회에서 크리스트교 중심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완충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교 세력은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택한 390년대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뿌리 깊었으므로, 이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를 짧은 기간에 크리스트교 중심의 사회로 완벽하게 전환시킬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황제 사후 4 반세기 만에 이교 회복 정책을 편 배교자 황제 율리아누스가 3년 만에 죽는 바람에 정책도 흐지부지되고 만 점을 생각해보면, 장기간의 치세와 통일 그 자체가 크리스트교 공고화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