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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_ 음모 (3)

by TES leader 2021.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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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오 (Domenico Ghirlandaio)

이 대목까지 언급한 로셀리는 미켈란젤로가 절대 천장 프레스코 건을 맡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브라만테가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성하, 제 생각으로는 미켈란젤로 선생은 이 일을 해낼만한 충분한 용기나 배포가 없습니다. 선생은 아직 인물화 경험이 충분치 않습니다. 더구나 천장에 그리는 인물화는 그에 필요한 원근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건 땅에 발을 디디고 그리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미켈란젤로와 달리 수많은 프레스코를 그리며 경력을 쌓아온 브라만테는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브라만테는 15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거장 중 한 사람인 우르비노 태생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문하에 들어가 화가 수업을 받았다. 그런 뒤에 베르가모와 밀라노로 가서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이때 그린 것 중 하나가 현재 스포르차 성에 남아 있다. 또한 로마 동쪽 라테란 궁 부근의 성년의 문(Porta Santa)을 프레스코화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도 미술학교에 입문할 당시 화가 수업을 받았으나, 정작 현장에서는 붓을 쥔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미켈란젤로는 13세가 되자 피렌체에서 도메니코 기를란다오(Domenico Ghirlandaio)에게 회화 수업을 받았다. 기를란다요라는 이름은 원래 화관을 만들어 파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로 미루어 볼 대, 부친은 여자들의 머리를 장식하는 최신 유행의 화관을 제작하던 금세공사였을 것이다. 기를란다요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스승이었다. 모험적인데다 연고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도안공 겸 숙련된 다작 화가였다. 그림 그리기에 애착이 엄청나 피렌체를 둘렀싼 성벽(둘레길이가 8km를 넘고, 곳곳에 높이가 14m에 달했다)에다 한 치도 빠뜨리지 않고 그림을 그려 넣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제작에도 관여했던 기를란다요는 20여 년간 화가로 경력을 쌓으며 무수한 프레스코를 그렸다. 최대 작품은 1486년부터 1490년까지 피렌체에 소재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부속 토르나부오니 예배당 벽에 그린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일생 Lives of the Virgin and of St. John the Baptist>이다. 이 주문 받은 프레스코와 함께 그려야 할 패널의 총 면적은 550평방미터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엄청나게 컸다. 화면을 다 채우려면 수십 명의 조수와 도제들이 필요했다. 다행이 이때 기를란다요는 커다란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거기에는 두 동생인 다비데와 베네데토, 그리고 아들 리돌포도 함께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의 문하에 들어간 것은 기를란다요가 토르나부오니 성당을 프레스코 하던 무렵이었다. 그것은 로도비코 부오나로티(Lodovico Buonarrito) 1488 4, 2년 기한의 작업 참가 계약서에 아들인 미켈란젤로를 대신해 서명한 사실로 인해 밝혀졌다. 미켈란젤로의 수습기간은 원래 3년이었으나 겨우 1년 만에 끝났다.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정원 학교에서 조각과 교양을 배울 학생들을 추천해 달라고 기를란다요에게 부탁한 직후였다. 기를란다요는 재빨리 자신의 새 문하생을 넘겨주었다.

 

기를란다요와 미켈란젤로의 관계는 도저히 우호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질투심이 강한 기를란다요는 전에도 재능 있는 제자 베네데토를 기량 연마를 핑계 삼아 프랑스로 보낸 적이 있었는데, 사실은 최고 미술가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회화보다는 조각을 주로 가르치는 산 마르코 정원 학교로 내보낸 것도 비슷한 동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콘디비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미켈란젤로의 재능에 질투심이 발동한 기를란다요가 그에게 미술 교본을 빌려주길 거부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수습생들은 학습 과정의 하나로 이 교본의 그림들을 목탄이나 은필(뾰족한 끝에 은()이 붙어 있는, 금속으로 된 소묘 용구. 은회색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자국을 남겨 선묘화에 널리 사용된다.)로 묘사해야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미켈란젤로는 기를란다요에게서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폭탄 발언으로 옛 스승에게 앙갚음했다.

기를란다요에게서 더 이상 대우지 않게 된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프레스코 건을 주문받을 때까지 거의 붓을 놓다시피 했다. 1506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확실시되는 유일한 작품은 친구인 아뇰로 도니에게 헌정한 <성가족 Holy Family>이었다. 이 작품은 크기가 1m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그마한 원형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림의 제작은 도중에 중단되어 버렸으나, 어쨌든 프레스코를 한번 시도해 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1504년 대리석 조각 <다비드>를 완성한 직후,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공화국의 주문으로 시뇨리아 궁의 의사당 벽 한 칸을 프레스코 한 적이 있다. 맞은편의 다른 한 칸은 또 다른 피렌체 출신의 미술가로 그에 못지않은 명성을 누리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프레스코로 장식할 예정이었다. 이때 52세였던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하다가 얼마 전 피렌체로 귀향해 줄곧 그림을 그려왔다. 밀라노에 있을 때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휴게실 벽에다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 Last Supper>을 그리기도 했다. 이런 당대 최고의 명예를 누리던 두 미술가가 마침내 진검 승부를 벌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미술가의 한판 승부는 익히 잘 알려진 대로 서로를 향한 혐오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무뚝뚝한 기질의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가 전에 밀라노에서 청동 기마상을 제작하다 실패한 사실을 들먹이며 공개적으로 그를 비웃었다. 이에 레오나르도는 자신은 조각가들을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고 쏘아붙였다. 그는 조각 작업은 어디까지나 기계적인 단순한 일로 한참 하다 보면 엄청나게 많은 땀이 난다.”라고 썼다. 나아가 대리석 먼지에 뒤집어쓴 조각가의 꼴을 보면 영락없는 제빵공이며, 지저분하고 시끄럽기만 한 집은 우아한 화가들의 집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피렌체인들은 결과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높이 6m, 길이 16m의 프레스코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최후의 만찬> 면적의 두 배에 가까웠다. 미켈란젤로에게는 1364년 피사와 혈전을 주제로 한 카시나 전투, 레오나르도에게는 1440년 밀라노와 대적한 ‘안기아리 전투장면을 그려 달라는 주문이 각각 떨어졌다. 미켈란젤로는 산토노프리오의 염색업자협회 병원의 방 한 칸을 빌려 스케치 작업에 들어갔다. 미켈란젤로의 걸출한 상대도 산타 마리아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작업실을 얻어 작업에 돌입했다. 몇 달 동안 비공개로 작업해 온 두 사람은 1505년 초에 그간 노고의 결실을 들고 마침내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실제 그림 크기의 초크 스케치였는데 초크를 호방하게 움직여 전체 디자인을 구도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들은 프레스코 할 그림의 일종의 원판인 셈이었는데, 카르토네라는 큰 종이 위에 그렸기 때문에 카툰(Cartoon)’, 다시 말해 밑그림으로 불렸다. 1백 평방미터나 되는 밑그림들을 본 피렌체인들은 가히 종교적이라 할 만큼 열광했다. 화가는 물론 재봉사, 은행원, 상인, 직조공 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이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전시장으로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앙기아리 전투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은 훗날 그의 전매특허가 되다시피 한 근육질의 누드(근육이 불끈거리면서 동시에 우아하게 뒤틀린)로 꽉 채워져 있었다. 밑그림에서 선택한 소재는 피렌체 병사들이 아르노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임전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가짜 경보를 울리자 벌거벗은 남성들이 강둑으로 허겁지겁 뛰어올라가 옷을 주워 입는장면이었다. 그와 달리, 레오나르도는 인체 해부보다 기병의 전투 장면에 초점을 맞추고, 기병들이 서로 상대 진영의 군기를 뺏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을 그렸다.

카시나 전투

만일 두 그림이 성공적으로 대의사당(천사들의 도움으로 건축했다는 커다란 의사당) 벽에 프레스코가 되었다면, 틀림없이 세계 미술사상에 남는 걸작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기적인 대결을 엄청난 반항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완성으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프레스코를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초대형 밑그림을 완성한 직후인 1505 2,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분부에 따라 바로 로마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영묘 조각에 들어갔다. 한편 레오나르도는 <안기아리 전투>에 실험적인 방식을 접목했지만, 새로운 시도는 물감이 벽 아래로 뚝뚝 떨어지면서 참담한 실패로 끝나버렸다. 굴욕적인 실패로 낙담한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밀라노로 되돌아갔다.

 

율리우스는 <카시나 전투>가 사람들에게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은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따라서 일 년 후에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프레스코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시뇨리아 궁의 프레스코는 완성은커녕 시작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미켈란젤로는 그때까지 중간 사이즈의 프레스코조차 손 대본 적이 없는 셈이 되고 말았다. 시뇨리아 궁 벽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천재조차도 부담을 느낄 만큼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가 그처럼 말할 수 없이 까다로운 프레스코 미술에 있어 꼭 필요한 경험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천장의 높고 둥근 면에 환상적인 효과를 내는 프레스코 기술에 무지하다는 사실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안드레아 만테냐 같은 천장화 전문 화가들은 신체를 묘사할 때 단축법(신체 아랫부분은 전경에, 머리는 뒤쪽 배경에 두는 기술)을 구사해 마치 인물이 관람객 머리 위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이와 같은 단축법은 디 소토 인 수(Di sotto in su, 아래에서 위로)’라고도 불렀는데 어렵기로 악명 높은 고난도의 기술이었다. 미켈란젤로 시대의 화가 중에서 한 사람은 디 소토 인 수가 회화 기술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시스티나 천장 프레스코 건을 신출내기가 다름없는 인물에게 발주하는 것에 브라만테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가 의심한 것과는 정반대로 기독교에서 중요시하는 예배당의 천장 위에 재앙이 가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피에로 로셀리는 미켈란젤로의 재능과 의지력에 대한 브라만테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로셀리는 미켈란젤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라만테의 험담을 더 이상 참고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두 사람 간의 이야기에 끼어들어 그에게 아주 무례한 언사를 퍼부었네.” 로셀리는 자랑스럽게 그때의 일을 언급하여 그 자리에 없던 친구를 옹호하고 싶은 충정으로 가득 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했다. “성하, 저자는 미켈란젤로와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자가 성하께 이야기한 것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하고 브라만테를 가리키며 큰소리를 쳤다.

피렌체의 고향집에서 편지를 본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가 자신을 중상모략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특히 천장 작업을 해낼 만한 배포나 담력이 부족하다는 평가에서 더욱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점에는 별로 반박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브라만테가 지적한 바로 이런 문제점들과 영묘 조각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겹쳐 미켈란젤로는 예배당 천장의 프레스코를 꺼림칙한 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성당 천장 프레스코는 통상 조수나 무명 미술가들에게 할당되어 왔기 때문에 교황의 영묘 제작에 비해 훨씬 덜 중요한 주문으로 취급받았다. 벽화는 온갖 명성과 관심을 낳았지만 천장화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교황은 브라만테와의 만찬 자리에서 천장 프레스코의 주문에 관한 한 어떤 구체적인 결정도 내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미켈란젤로가 로마로 돌아오길 고대했다. “만일 끝내 오지 않겠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가 실수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엔 돌아오겠지.” 교황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어조로 나직이 말했다. 로셀리도 이에 동의했다. “성하의 뜻대로 미켈란젤로는 결국 돌아올 것입니다.”하고 그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교황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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