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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_ 음모 (2)

by TES leader 202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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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바티칸 풍경

로마가 처한 암울한 상황을 일신하고자 한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에게 큰 건물과 기념물을 되도록 많이 세우도록 했다. 그로 인해 로마를 명실공히 가톨릭 교회의 성지이자 주민과 순례자 모두에게 훌륭한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브라만테는 우선 티베르 강 양변의 도로를 확장하고, 포석을 깔고, 포장할 것을 주문했다. 우기가 되면, 로마의 도로는 나귀의 꼬리까지도 진흙탕에 처박힐 만큼 난장판이 되었다. 브라만테는 낡은 하수관을 교체하거나 수리했고, 티베르 강 바닥을 준설해 위생과 운항 능력을 높였다. 또한 상수도관을 새로 깔고, 로마 시 외곽에서 청정수를 끌어다 자신이 건축한 산 피에트로 광장의 중앙 분수에 댔다.

브라만테는 바티칸 궁을 미화하는 작업에도 나서, 1505년 교황 궁과 벨베데레 궁전을 잇는 3백 미터 길이의 바티칸 부속 벨베데레 정원의 설계와 건축 감독직을 맡았다. 당시 이 정원에는 아케이드와 안마당, 극장 분수, 투우 경기장, 그리고 요정의 사원이라는 뜻을 지닌 님페움이 여전히 남아 있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외에도 궁전에 여러 가지 새로운 것을 보태거나 개선했는데, 바티칸 궁의 돔 가운데 하나를 목재로 지은 것이 한 예이다.

바티칸 건축 작업 중에는 특히 교황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었다. 숙부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건설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작은 예배당을 개수하는 작업이었다. 로마 재건을 향한 야망에 불탔던 율리우스 2세는 식스투스 4세의 종적을 그대로 따라갔다. 로마에는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재위기간(1471~1484) 중 도로의 기능이 향상되고, 많은 교회가 복원되고, 티베르 강에 새로운 다리가 놓였다. 그러나 식스투스 4세가 맡은 최대의 사업은 단연 바티칸 안에 새로 예배당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카펠라 파파리스(capella papalis)’, 교황의 제식에 참여하는 단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예배 장소로 2~3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미사가 열렸다. 카펠라 파파리스의 예배 참석자들은 교황과 추기경, 주교 등 2백여 명의 고위 성직자들이었다. 그리고 바티칸을 방문한 군소국가의 군주나 원수 등 최고위 세속 관리들과 교황의 시종이나 비서 같은 바티칸 관료들로 구성되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이 단체의 예배당 역할 외의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추기경 회의의 개최 장소라는 또 다른 핵심 역할도 수행했다.

브라만테의 바티칸 개량 계획 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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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 공사는 1477년에 시작되었다. 건축 설계 총책임자는 바치오 폰텔리(Baccio Pontelli)라는 젊은 피렌체인이었다. 폰텔리는 예배당을 성서에 기록된 예루살렘 성전의 면적 비율과 똑같이 세로가 높이의 2, 가로의 3(세로 40m ⅹ 가로 13m ⅹ 높이 20m) 크기로 설계하여 건축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새로운 솔로몬 성전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철통 같은 요새 기능을 담당했다. 기단의 벽 두께가 자그마치 3m나 되어 파수병들은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면서 벽에 설치된 통로를 통해 시 전체를 감시할 수 있었다. 궁수들이 화살을 쏠 수 있는 화상 구멍과 펄펄 끓는 기름을 아래층의 침입자들 머리 위로 쏟아부을 수 있는 용도의 특수한 구멍도 냈다. 건물 꼭대기에 설치된 방들은 병사용 숙소로 쓰이다가 나중에 감옥으로 바뀌었다.

이 정도로 견고한 예배당의 설계를 놓고 볼 때, 폰텔리가 프란치오네로 통하는 건축 설계사인 프란체스코 디 조반니(Francesco di Giovanni) 밑에서 수습과정을 마치고, 주로 군 시설 전문 건축 설계사로 활동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조반니는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한 포탄으로부터 성채를 보호하기 위해 보루(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 형태를 착안해 내 인물이기도 하다. 폰텔리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완공하고 로마 근교에 머물던 중 해안에 면한 티베르 강 하류의 오스티아 안티카 항에 최신식 요새를 설계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 요새와 시스티나 예배당은 매우 흡사했다. 요새가 터키 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새로 지은 예배당은 제멋대로 날뛰는 로마의 폭도들에게서 바티칸을 지키기 위해 설계되었다. 식스투스는 1471년 교황에 선출된 뒤에 폭도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하면서 그들의 난폭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했다.

식스투스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착공한 것은 앙숙인 피렌체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하던 무렵이었다. 1480년 예배당은 전쟁의 종결과 함께 준공되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화의(그림을 그리려는 마음. 그림 속에 나타난 뜻. 그림의 배포인 의장)의 표시로 상당수의 화가들을 로마로 파견해 프레스코 작업을 하게 했다. 우두머리 격은 당시 31세의 피에트로 페루지노였다. 그 외에 산드로 보티첼리, 코시모 로셀리, 제자인 피에로 디 코시모, 그리고 당시 33세로 훗날 미켈란젤로의 스승이 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등이 팀에 속했다. 나중에 프레스코에 경험이 풍부하고 재능도 출중한 화가 루카 시뇨렐리도 합류했다.

이 미술가들은 예배당의 벽 전체를 유리창 아래의 격실과 일치하도록 6개의 패널로 나눴다. 패널 하나에 화가 한 사람과 공방 소속 조수들을 배정해 폭 6m, 높이 3.6m 크기의 프레스코를 그리게 했다. 본당의 한쪽 벽면에는 모세 일대기 장면이, 맞은편에는 예수의 일대기가 프레스코 되었다. 유리창 상단 지점까지의 공간에는 밝은 색 옷차림을 한 역대 교황 32명의 초상화를 그려 넣었는데, 마치 아랫부분의 그림들을 둘러싼 띠 모양의 작은 장식처럼 보였다. 천장에는 밝고 푸른 바탕색을 칠한 뒤, 황금별을 박아 넣은 하늘을 그려 넣었다. 이런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주제로 한 그림은 쿠폴라 양식(둥근 천장, 지붕)에 흔했고, 성당의 경우 특히 더했다. 사실 이런 양식의 천장화는 과거 1천 년 동안 기독교 장식미술에 흔히 나타난 형태였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천국이 형상은 페루지노 파 화가들의 작품이 아니라 필리포 리피의 제자로 그들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진 피에르마테오 다멜리아(Piermatteo d’Amelia)라는 미술가의 것이다. 피에르마테오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리면서 부족한 독창성을 보완하기 위해 프레스코 전용 안료 중에서도 가장 밝고 비싼 금색과 군청색을 풍부하게 사용했다.

공식적으로 새 예배당이 처음 공개된 것은 프레스코가 완성되고 몇 달이 지난 1483년 여름이었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504년 봄, 율리우스가 교황에 선출된 지 아직 서너 달도 채 되지 않을 무렵에 불길한 전조를 나타내던 예배당 천장이 마침내 쩍 갈리지고 말았다. 구조상의 결함은 바치오 폰 텔리의 설계 하자 탓이 아니었다. 폰텔리는 벽을 매우 두껍게 쌓아 올리고,천장도 견고하게 만들어 아주 튼튼한 예배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지반침하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예배당 남쪽 벽이 바깥으로 기울면서 천장의 균열이 생겨났던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즉각 폐쇄되었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는 지반 이동을 억눌러서 벽의 균열을 막고자 천장 벽돌과 마룻바닥에 수십 개의 쇠막대를 박아 넣었다. 이렇게 하여 1504년 가을에 예배당이 다시 개방되었다. 그러나 병사 숙소용으로 사용되었던 옥상의 방들은 천장 복구공사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예배당의 수난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천장의 균열을 벽돌로 메우고 위에 석고를 새로 바른 탓에 피에마테오 다멜리아가 그린 천장화의 북서쪽 부분에는 비뚤비뚤한 흰 선이 가로질러 길게 쭉 그어졌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의 균열 문제는 만찬 중인 교황과 브라만테 사이의 대화에서 주 화제로 떠올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제 3의 인물인 피렌체 출신의 벽돌공 피에로 로셀리(Piero Rosselli)는 편지를 통해 미켈란젤로에게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자세히 알렸다. 로셀리는,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프레스코를 맡기고자 줄리아노 다 상갈로를 피렌체로 보내 그를 데려올 계획이라고 브라만테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가 틀림없이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대꾸했다. “성하, 그렇게 하시면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저도 미켈란젤로 선생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선생도 역시 예배당 건은 관심 밖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미켈란젤로 선생은 성하의 영묘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고, 프레스코 또한 예외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하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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