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우스 2세는 1443년 제노아 부근의 알비솔라에서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라는 세례명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어부였던 그는 페루자에서 로마법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신부 서품을 받은 후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줄리아노의 이력을 뒤바꾼 운명의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1471년의 일이었다. 저명한 학자였던 숙부가 그 해에 교황 식스투스 4세로 선출된 것이다. 교황의 조카라면 누구나 당연히 초고속 승진의 행운을 기대했을 것이다. 네포티즘(족벌주의)은 사실 이탈리아 어인 니포 테(Nipote),다시 말해 네퓨(Nephew, 조카)에서 나온 말이다. 역대 교황들이 네포티즘에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조카(실제로는 서자인 경우도 많았다.)들을 승진시키는 일에 발 벗고 나섰지만, 줄리아노는 순전히 자력으로 성직 계급에서 혜성처럼 승승장구했다. 28세에 이미 추기경에 오른 후 계속해서 대수도원장, 볼로냐 주교, 베르첼리 주교, 아비뇽 대주교, 오스티아 주교 등 명망 있는 요직을 두루 거쳤다. 교황에 선출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칠 줄 모를 것 같던 줄리아노의 출세가도에 타격을 가한 것은, 앙숙이던 로드리고 보르자가 교황에 선출되어 1492년 알렉산더 6세로 등극한 일이었다. 알렉산더가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독살하려고까지 하자 줄리아노는 프랑스로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했다. 1503년 여름에 알렉산더가 죽고 피우스 3세가 세 교황에 선출되자, 망명생활도 장기화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피우스는 즉위한 지 채 몇 주도 되지 않은 1503년 10월에 급서하고 말았다. 그리고 11월 1일 끝난 시스티나 예배당의 교황 선출 추기경회의에서 줄리아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얼핏 보면 그것은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줄리아노 델레 로베레가 동료들(대부분 그를 미워하고 두려워했다.)에게 뇌물공세를 펴 긍정적인 확답을 끌어내 교황에 올랐던 것이다.
알렉산더 6세는 주색으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수십 명의 아들을 두었고, 바티칸 궁으로 정부나 매춘부들을 끌어들여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딸인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근친상간 중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율리우스는 그정도로까지 쾌락을 탐하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비종교적인 기질은 알렉산더 못지않게 왕성했다. 원래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탁발 수사들은 금욕과 궁핍 생활을 엄숙하게 맹세한다. 그런데 율리우스는 추기경 시절부터 금욕과 궁핍에 대한 맹세를 그때그때 편리한 대로 교묘히 피해 나갔다. 그는 매번 승진할때마다 한밑천 끌어 모아 자신의 명의로 된 아방궁을 3채나 차지했다.
또한 고대의 희귀 조각품들을 다른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부지기수로 수집해 산티 아포스톨리 궁의 정원에 전시했다. 율리우스는 펠리체 등 세 딸을 두었는데 장안이 떠들썩할 정도로 미인인 펠리체를 귀족과 강제로 결혼시켜 로마 북쪽의 어느 성으로 쫓아내 버렸다. 마시나라고 하는 로마의 고급 매춘부에 홀딱 빠진 후에는 그녀의 어머니조차 내쫓아버렸다. 결국 율리우스는 애인들 중 한 사람에게서 매독에 감염되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누군가가 이 신종 질병을 가리켜 ‘신부를 좋아하는 병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돈 많은 신부(성직자)를 좋아하는 병’이라고 했다. 교황은 이 질병 외에 산해진미의 탐닉으로 통풍에 걸려 고생했지만, 여전히 강인한 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율리우스는 교황에 선출되자 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기보다 교황권과 그 영광을 높이는 데 진력했다. 율리우스가 선출될 당시만 해도 교황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1378~1417년 로마와 아비뇽이 적대적으로 대립하면서 각기 할거 통치한 ‘교회의 대분열’ 사태 때문이었다. 보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알렉산더 6세의 지나친 낭비벽 때문에 교회 재정이 바닥나버렸다. 율리우스 6세의 지나친 낭비벽 때문에 교회 재정이 바닥나버렸다. 율리우스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온갖 교묘한 방법을 고안해서 무자비할 정도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새로운 동전을 발행해 통화가치의 평가절하를 막는 한편 위폐범을 철저히 단속했다. 훗날 성직을 사고 파는 성직매매(단테는 이 죄를 저지른 자들을 지옥의 8번째 원주 속에 몰아넣었다. 이들은 거꾸로 선 채로 생매장되어 다리부터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로 수입의 증대를 꾀하기도 했다.
1507년 율리우스는 은전(나라에서 은혜를 베푸는 혜택)을 베푸는 교서를 공포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친구나 친척들이 연옥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대개 9천 년으로 정해졌다.)을 단축하기 위해 금전적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율리우스는 이런 논란의 소지가 많은 조치를 통해 끌어 모은 돈을 모두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비로 쏟아부었다.
율리우스는 나아가 교황령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해 교회 금고를 채울 계획까지 세웠다. 당시 대부분의 교황령은 교회에 대해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이나 야심에 찬 외세의 손에 넘어갔다. 교황령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통치권을 가진 도시나 요새, 또는 대토지 등이었다. 교황은 지상에서 예수의 대리자인 동시에 다른 어떤 군주 못지않은 권세와 특권을 가진 세속의 일시적인 군주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교황보다 더 큰 영지를 소유한 군주는 나폴리 왕뿐이었다. 교황은 또 백만 명이 넘는 신민을 보유했다.
율리우스는 군주로서의 임무를 아주 성실히 수행했다. 교황에 선출된 후 행한 첫 번째 조치들 중에는 교황령을 당장 반환하라는 이웃 나라를 향한 엄중한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은 특히 볼로냐 남동쪽 일대의 소공국 연합체인 로마냐를 심중에 두고 있었다. 이 소공국들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교회의 봉신인 제후들이 통치했다. 그러나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알렉산더 6세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가 암살이나 잔혹한 정벌을 통해 자신의 공국으로 만들려 했던 땅이다. 부친의 사망으로 체사레 보르자의 권력 기반이 붕괴하자 그 틈을 타 베네치아가 로마냐 침공을 감행했다. 베네치아는 율리우스의 요구에 따라 로마냐에 속한 11개의 요새도시와 촌락을 교회에 반환했지만 리미니와 파엔차의 분할 요구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했다. 두 도시 외에 다른 두 도시, 페루자와 볼로냐도 교황의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 두 도시의 패권자들인 잔파올로 발리오니와 조반니 벤티볼리오가 교황에 대한 표면적인 충성 맹세와는 달리,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대외정책을 펴 나가려 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는 네 도시를 기어이 되찾아 자신의 수중에 두기로 결심했다. 1506년 봄, 율리우스는 마침내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만찬석상에서 피에로 로셀리가 교황에게 장담한 것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밀사로 파견된 친구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함께 로마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그 대신 상갈로에게 자신은 여전히 “성하의 영묘 작업을 맡을 의향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하고 전제한 뒤, “성하께서 동의하신다면 피렌체에서 영묘 조각을 완성해 로마로 운송하고 싶습니다.”하고 자신의 뜻을 교황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로마보다 여기서 일하는 편이 훨씬 낫고, 일할 기분도 더 생깁니다. 로마에서 일할 때처럼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하며 심경의 일단을 드러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보다 피렌체를 선호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1503년 피렌체의 모직 조합은 핀티 거리(Via de’ Pinti)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대로 널찍한 공방을 준비했다. 미켈란젤로는 원래 여기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에 전시할 2m 높이의 대리석 조각품을 12점 팔 계획이었다. 그러나 교황의 영묘 작업을 맡기 위해 <카시나 전투> 프레스코 건과 함께 계획을 포기했었다. 이제 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 순조롭게 되면, 이전 것까지 합쳐 모두 37점의 조각품과 각기 다른 크기의 부조들을 제작하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대역사가 머지않아 이루어질 참이었다. 조수들과 함께 일생동안 바삐 움직여도 도저히 다 해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감이었다. 또한 피렌체 대성당에 해 줄 12점의 조각품 외에 시에나 대성당 제단을 장식할 15점의 성인과 사도들의 작은 대리석 조각품을 제작해 달라는 주문도 이미 받아 놓고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뜻대로 로마보다 피렌체에서 교황의 영묘를 조각하면 전에 받은 주문량의 상당 부분을 마무리할 수 있는 말미도 생기는 셈이었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 머물고자 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도시에는 부친, 형제들, 고모와 삼촌 등 대식구가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4명의 형제가 있었다. 어머니는 2년 터울로 사내아이를 다섯 낳고, 미켈란젤로가 여섯 살이 되던 해인 1481년 사망했다. 리오나르도(Lionardo)가 장남, 미켈란젤로가 차남, 부오나로토(Buonarroto)가 삼남, 조반시모네(Giovansimone)가 사남, 시지스몬도(Sigismondo)가 막내아들이었다. 부친 로도비코는 1485년 재혼했으나, 그 부인도 1497년 죽는 바람에 다시 홀아비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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