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1년은 미켈란젤로에게 매우 참담한 한 해였다. 침대 하나를 세 사람이 써 비좁은 잠자리 문제로 마음이 영 편치 않은 데다,볼로냐 산 포도주는 값만 비쌌지 아주 저질이었다. 거기다 기후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름이 되자 미켈란젤로는 드디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여기 오고 나서 비라고는 단 한 차례밖에 내리지 않았다. 날씨는 도 얼마나 더운지, 여기처럼 더운 데도 없을 거야.”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확신했다. 볼로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생 부오나로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여튼 조만간 무슨 일이 터져 내 인생도 여기서 끝장날 것 같구나.”하고 말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적이라고 단정한 브라만테가 여전히 볼로냐에 남아 있고, 교황 숙소도 시내에 설치되어 있는데다 무기상들이 넘쳐나는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또한 볼로냐는 불한당과 망명한 벤티볼리오 추종자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려 난폭한 위험지역이 되고 말았다.
동상 제작을 개시한 지 두 달 만에 교황이 몸소 공방을 찾아와 진흙 모형을 살펴보고 갔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고향의 부오나로토 앞으로 편지를 썼다. “일이 잘 될 수 있게 꼭 기도해다오. 그러면 내게도 틀림없이 성하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생기겠지.” 다시 교황의 총애를 누리면 영묘 작업도 다시 맡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상 제작은 제대로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적어도 부활절까지는 동상 제작 준비를 끝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교황이 공방을 방문할 당시에 두 명의 조수, 즉 석공인 라포 단토니오(Lapo d’Antonio)와 로티로 알려진 금세공상 로도비코 델 부오노(Lodovico del Buono)가 모두 공방에서 쫓겨나 작업을 답답할 만큼 지지부진했다. 미켈란젤로는 두 사람 중 42세의 피렌체 출신 조각가 라포에게 특히 진저리를 쳤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고향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그 작자는 내가 바라는 건 손톱만큼도 하지 않는다고! 정말 아주 짝에도 쓸모없는 사기꾼이야.”하고 말했다. 특히 이 조수가 자신과 동업을 한다고 볼로냐 시내에 떠벌리고 다닌 것에 분통이 터졌다. 사실 두 사람이 조수라기보다는 대등한 입장에서 동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었다. 우선 두 사람 모두 나이가 열 살 위였다. 미켈란젤로는 그들 중 유명한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의 제자였던 로티를 좀 더 높이 평가했다. 로티의 기술과 경험이 동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로티가 심술궂은 라포에게 물들어 몹쓸 인간이 되었다고 단정하고 두 사람을 함께 내보냈다. 세 사람이 한 침대를 사용한 만큼 해고될 때까지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 뒤편의 작은 공방은 심한 언쟁으로 매일 불쾌한 밤을 맞이했을 것이다.
볼로냐에서의 상황은 곧 더 악화되었다. 라포와 로티의 해고 직후에 교황은 이곳이 건강에 해롭다며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그 말에 힘을 실어주듯 교황이 떠난 직후에 전염병과 반란이 잇달아 발생했다. 교황이 로마에 미쳐 도달하기 전에 벤티볼리오 일가와 추종자들이 볼로냐를 재 장악하려 한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화약 냄새를 조금만 맡아도 줄행랑쳤을 미켈란젤로였다. 하지만 성벽 밖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는 위험한 상황이라 별도리 없이 공방에 남아 있어야 했다. 벤티볼리오 일당이 만일 권좌에 복귀한다면 자신들의 원수를 위해 조각 작업을 해 온 사실을 결코 관대하게 봐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쳐갔을 것이다. 그러나 망명 세력은 수주 만에 완전히 소탕되고, 율리우스를 향한 독살 음모도 무위로 끝났다.
작업을 개시한 지 6개월 만인 1507년 7월 초에 미켈란젤로는 마침내 본격적인 대형 동상 주물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물틀에 주입한 청동이 완전히 녹은 쇳물이 아니어서 결국 다리와 발만 있고 몸통과 팔, 머리가 없는 기형적인 동상이 되고 말았다. 가마를 일단 1주일가량 식혀 해체한 후에 굳어 있는 동상을 꺼내고 재가열해 녹인 다음 주물틀에 붓는 2차 시도를 하다 보니 제작은 그만큼 지연되었다. 조수로 새로 고용한 베르나르디노 단토니오(Bemardino d’Antonio)는 “무지하거나 사고로 가마 온도를 충분히 올리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으며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 미켈란젤로가 모든 잘못이 베르나르디노에게 있는 양 사방팔방에 떠들고 다니는 통에 그는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닐 수도 없었다.
2차로 시도한 주물 작업의 결과는 그래도 지난번보다 양호했다. 미켈란젤로는 이후 6개월간 끌질과 광택질로 수정 보완 작업을 한 후 동상을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 현관에 설치하는 준비단계로 들어갔다. 미켈란젤로에게 동상의 완성은 곧 개인적인 승리이기도 했다. 높이가 4m나 되고 무게가 5톤 이상 나가는 이 동상은 규모면으로 볼 때 고대 이후 제작된 것들 중 단연 최대였기 때문이다. 덩치로 보면 당시 동상의 크기를 견주는 척도였던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성당 앞에 우뚝 서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필적했다. 미켈란젤로는 일 년 전에 이 거창한 일을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한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다. “볼로냐인 전체가 하나같이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라고 미켈란젤로는 부오나로토에게 말했다. 추측컨대 동상 제작 임무를 완수한 미켈란젤로는 한 번 더 교황의 은총을 입었을 것이다. 동상이 미처 완성되기 전에 미켈란젤로는 막강한 우군이자 지지자들인 줄리아노 다 상갈로, 알리도시 추기경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편지에서 영묘 조각 작업을 계속 추진하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동상의 모형을 뜨고 주물을 제작하는 일에 신물이 났다. “나는 지금 여기 살고 있지만, 생활의 불편이 말로 다 할 수 없고 육체적인 피로도 극에 달한 상태다. 그저 밤낮없이 죽어라 하고 일만 할 뿐이다.”라며 피렌체로 하루빨리 돌아가길 갈망했다. 피렌체의 고향집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어려움이 있지만 불과 8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인내심은, 동상을 대성당 현관에 설치할 때까지 볼로냐에 남아 있으라는 교황의 엄명으로 또다시 시련을 겪게 되었다. 교황 전속 점성술사가 1508년 2월 21일을 동상 설치의 길일로 잡은 후에야 비로소 피렌체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볼로냐를 떠나기 전에 미켈란젤로는 조수들이 마련한 간소한 송별 파티에 참석했다. 귀향의 기쁨에 들떠 말을 급히 몰고 가다가 아펜니노 산길에서 낙마하는 어처구니없는 불상사도 겪었지만 귀향 길은 여전히 흥겹기만 했다. 그러나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교황에게서 속히 로마로 오라는 소환 명령을 받았다. 이번 소환은 소환장에 비친 것처럼 영묘 조각 작업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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