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석고 패널이 마련되면 프레스코 화가들은 그 위에 미리 준비해 놓은 밑그림을 부착시킨다. 벽이나 천장에 갖다 대고 작은 못을 박아 고정시킨 밑그림을 각 인물과 장면의 형판(석공 등이 어떤 모양을 만들 때에 사용하기 위하여 일정한 모형을 새겨 만든 널빤지.)으로 쓰인다. 밑그림을 부착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각기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선택해 쓴다. 첫 번째 방식은 스폴베로(spolvero)로 밑그림에 포함된 소묘의 선을 따라 미세한 구멍을 무수히 낸 후, 구멍 안에 목탄가루를 뿌리거나 색 가루 주머니를 구멍 난 밑그림 위에 탁탁 친다. 그런 뒤 석고 표면 위에 일단 대략적인 윤곽을 남기고 붓으로 강화해 나가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식은 첫 번째에 비해 좀 더 신속한 편이다. 밑그림에 칠해진 초크 선을 따라 철필을 쫙 그어 석고 바탕에 자국을 남기는 방식이다. 전초 작업이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화가들은 물감과 붓을 가지고 본격적인 프레스코에 들어간다.
프레스코 회화의 배후에 작용하는 과학에는 일련의 간단한 화학적 결합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인토나코는 화학적으로 말하면 수산화칼슘이다. 수산화칼슘을 얻는 첫 단계는 가마 속에 석회석이나 대리석을 집어넣고 가열하는 것인데, 이로 인해 고대 로마의 기념물이 수도 없이 사라졌다. 암석을 가열하면 내포한 탄산이 생석회(산화칼슘)라는 흰 가루로 바뀐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에게 수산화칼슘은 프레스코 미술의 배후에 숨은 마법적인 요소였다. 이것을 모래와 혼합해 벽에 바르면 역화학적 반응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다. 먼저 혼합물 속의 물이 증발하면 산화칼슘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반응해 석회석과 대리석의 주요 구성물질인 탄화칼슘을 만든다. 그러므로 미끈한 반죽을 미장이의 흙손으로 벽면에 바르면 단시간 안에 석화하면서 색조를 탄산칼슘 결정 안에 가둔다. 따라서 프레스코 화가들은 안료를 희석하는 데 있어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템페라 회화에 사용하는 접합 매체를,예를 들면 달걀 노른자위, 아교, 트래거캔스 고무, 귀지 등은 안료가 인토나코에 고착된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프레스코에서는 불필요했다.
그런데 프레스코 화법이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 해도 늘 잠재적인 재앙이 따라다녔다.프레스코의 핵심 문제는 인토나코에 그림을 그릴 때 소요되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인토나코가 젖은 상태를 유지하는 시간은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20시간에서 24시간을 넘지 않는다. 이 시간을 넘기면 석고는 더 이상 안료를 흡수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따라서 화가들은 인토나코를 자신들이 해낼 수 있는 용적 범위 내에서 준비했는데, 이것을 조르나타(하루에 해낼 수 있는 용적)라고 불렀다. 벽이나 천장의 표면이 거대하면 전체 용적을 크기와 형태에 따라 나누어 조르나타를 작게는 열댓 개에서 많게는 수백 개까지 만들었다. 일례로 기를란다요는 토르나부오니 성당의 거대한 벽면을 250조라느타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하루 평균 가로 12.5m ⅹ 세로 1.5m (커다란 캔버스 정도의 크기)의 벽면을 그려 나갔음을 뜻했다.
그러므로 프레스코 화가들은 무엇보다 석고가 굳어지기 전에 각각의 조르나타를 완성하기 위해 시간과 싸워야 했다. 이 때문에 프레스코화는 캔버스화나 패널화와 크게 다른 것으로 구분된다. 캔버스화나 패널화는 수정 작업이 가능해 굼벵이처럼 느리고 질질 끄는 화가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티티안은 평생에 걸쳐 계속 그림을 바꾸고 수정하고, 이따금 물감이나 투명한 웃칠을 40차례나 덧칠하기도 했다. 급기야 그림을 보다 충동적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물감을 손가락으로 마구 문질러 덧칠하기도 했다. 캔버스에 끊임없이 어설픈 수정을 가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은 그런 식으로 시간적 사치를 부릴 여유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프레스코 화가들 중에는 일에 속도를 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붓을 양속에 쥐고 작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한 손에는 어두운 색 계통의 물감을 먹인 붓을, 다른 한 손에는 밝은 색 계통의 물감을 칠한 붓을 쥐고 작업했다. 아미코 아스페르티니는 이탈리아에서 붓을 가장 빨리 놀린 화가로 통한다. 아스페르티니는 1507년 루카의 산 프레디아노 성당에서 생애 첫 성당 벽화를 그렸다. 화가로서 좀 유별나 두 손을 동시에 따로 놀리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럴 때면 허리띠에 매달린 물감통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을 본 바사리는 “플라스크 통을 여러 개 찬 산 마카리오의 귀신같았다.”며 깔깔 웃었다.
아스페르티니는 빠른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시스티나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산 프레디아노 성당 벽을 프레스코하는 데 2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또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큰 공방을 가졌지만 토르나부오니 성당을 프레스코로 장식하는 데 무려 5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토르나부오니 또한 시스티나보다 표면적이 작은 성당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미켈란젤로도 주문 건을 모두 끝내려면 앞으로 장장 여러 해가 걸릴 것을 충분히 숙지했을 것이다.
시스티나 천장의 프레스코 작업에서 미켈란젤로가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는 천장에서 석고를 한 층 떼어내는 것인데, 석고 위에는 피에르마테오 다멜리아의 프레스코화가 손상을 입은 채로 남아 있었다. 물론 기존의 프레스코 위에 새로운 프레스코를 그리는 ‘마르텔리나투라(martellinatura)’라는 방식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기존의 프레스코 표면을 마르텔로라는 뾰족한 망치 끝으로 거칠게 긁어내고 위에 석고를 새로 바른 다음 새로운 그림을 프레스코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 방식을 쓰지 않았다. 이제 곧 피에르마테오가 별들을 그려 넣어 장식한 하늘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피에르마테오의 엣 프레스코가 그려진 석고를 한 겹 떼어낸 후, ‘아리치오’라는 새 석고를 천장의 표면 전체의 2cm 두께로 발라 틈새나 벽돌 블록 사이의 고르지 않은 연결 부위를 반듯하게 골랐다. 이제 아무 때나 인토나코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천장에서 떼어내 교회 밖으로 내다 버린 옛 석고만 수 톤에 이르렀고, 아리치오를 만들기 위해 예배당 안으로 들여온 모래주머니와 석회 주머니가 수백 개에 이르렀다.
미켈란젤로는 피에르마테오의 프레스코화를 한 조각 한 조각 뜯어내고, 그 자리에 아리치오를 까는 중요한 작업을 같은 피렌체인이자 브라만테의 험구로부터 자신을 구한 피에로 로셀리에게 넘겼다.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34세의 로셀리는 물론 이 일을 맡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에게 ‘가장 친애하는 형제’로 불릴 만큼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미장이들과 7월 말까지 세 달 동안 이 일로 분주할 그에게85 두카트가 지급되었다.
로셀리 팀이 별들이 반짝이는 피에르마테오의 천국을 가능한 한 빨리 지우려면 무엇보다 예배당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으로 이동하면서 작업이 가능한 비계(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임시 가건물)가 필요했다. 비계는 13m 폭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마루에서 18m 위로 상승할 수 있어야 했다. 천장 끝에서 40m 아래로 하강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중에 미켈란젤로 팀도 천장 표면에 붓을 제대로 갖다 대려면 역시 같은 종류의 비계가 필요하게 될 것이었다. 미장이에게 필요한 것은 화가에게도 필요했다. 미켈란젤로 팀은 나중에 로셀리 팀의 비계를 당연히 인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선 이 구조물을 설계 제작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로셀리가 받은85 두카트 중 상당 액수가 목재 구입비로 지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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