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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_ 젖은 석고 위의 회화 (1)

by TES leader 202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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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 5 10, 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 교황 성하에게서 교황 전속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을 프레스코 하는 대가로 우선 5백 교황두카트를 받고 그림 작업에 들어갔다.”

이 비망록은 미켈란젤로가 자신 앞으로 쓴 것으로 작성 시기는 로마에 돌아온 지 한 달 가까이 되던 무렵이었다. 천장화에 관한 계약이 성사될 수 있던 건 무엇보다 교황의 친구인 알리도시 추기경 덕분이었다. 자존심강한 추기경은 성질이 고약하기로 난형난제인 율리우스와 미켈란젤로 사이에 중재자로 적극 나서 타협안을 도출했다. 추기경은 전에 동상 규모 문제로도 미켈란젤로와 긴밀히 접촉하며 수없이 서신교환을 했었다. 또한 동상이 완성된 후에는 산 페트로니오 성당의 현관에 설치하는 일을 감독하기도 했다. 볼로냐에서 미켈란젤로가 거둔 성과에 만족한 교황은 신임하는 추기경에게 새롭고도 이전보다 훨씬 거대한 작업의 발주와 관련한 세부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알리도시 추기경이 작성한 계약서는 현재 분실되고 없다. 계약서에는 조각가(미켈란젤로는 항상 자신을 이렇게 불렀다.)에게 천장 프레스코가 대가로 총 3천 두카트를 지불하기로 명시되어 있었다. 3천 두카트는 미켈란젤로가 동상 제작으로 받은 돈의 3배로 매우 후한 보수였다. 또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궁의 토로나부오니 성당에 벽화를 그리고 받은 보수의 2배였다. 긜고 금세공사 같은 자격을 갖춘 미술가들의 평균 연봉의 30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전에 교황의 영묘 건으로 제의 받은 보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돈을 쪼개어 붓과 안료, 작업용 발판 제작에 필요한 밧줄과 목재 같은 재료 구입비로 써야 했다. 또한 조수들에게 줄 급료와 숙박할 수 있도록 집을 개조하는데 드는 비용으로도 사용해야 했다. 제반 경비를 다 제하고 나면 미켈란젤로에게 돌아갈 몫은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일례로 율리우스 동상 제작 때 보수로 받은 1천 두카트에서 재료비, 조수 급료, 숙박비 등을 제하고 최종적으로 손에 쥔 것은 겨우 4,5두카트에 지나지 않았다. 동상 제작에 소요된 시간은 14개월이었지만,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프레스코의 경우 훨씬 많은 시간이 들어간 게 뻔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 작업에 착수한 것은 5월 중순께였다. 그때까지 1천 평방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면적을 프레스코 하기 위한 사전 준비와 작품 구상에 몰입했다. 미술에서 프레스코가 대단하게 평가된 것은, 이것이 널리 알려진 대로 통달하기 무척 힘든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스타레 프레스코(stare fresco)’라는 이탈리아어 표현이 곤경에 빠지다라는 뜻이듯이 프레스코 작업에는 온갖 고초가 뒤따른다. <안기아리 전투>에서 대실패를 맛본 레오나르도 다 빈치뿐만 아니라 수많은 화가들이 벽이나 천장에 프레스코를 하다가 수없이 난관에 부딪혔다.

경험 많은 프레스코 화가이기도 한 조르조 바사리는 대부분의 화가 나 템페라 회화나 유황서 성공을 맛보지만, 프레스코에서 성공하는 화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레스코는 다른 회화 양식과 비교할 때 보다 남성적이며, 정밀하고, 단순명쾌한데다 영구성이 강한 화법이라고 주장했다. 바사리의 동료였던 조반니 파울로 로마초도 프레스코가 다른 회화 양식과 뚜렷이 구분될 정도로 남성적인 반면, 템페라 회화는 여성스러운 애송이들한테나 어울리는 양식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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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석고 위에 그림은 그리는 화법은 B.C 2000년쯤 크레타에서, 이후 수세기 동안 에트루리아와 고대 로마에서 벽과 무덤을 장식할 때 쓰였을 만큼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프레스코 미술은 13세기 후반에 들어서 피렌체 같은 도시가 속한 중부 이탈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피렌체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 이후 건축 붐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 무렵 피렌체에만 최소 9개의 대성당이 이미 세워졌거나 세워지기 시작했다. 건축 붐이 막 일기 시작한 북유럽 지방에 세워진 신 고딕 양식의 대성당들이 주로 벽걸이 융단과 스테인드글라스로 눈부시게 장식되었다면,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가 대유행했다. 피렌체와 시에나 주변의 구릉지는 프레스코의 필수 광물들이 풍부했다. 키안티(이탈리아 산 적 포도주)의 재료가 되는 산조베세 포도처럼 토스카나 지방의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 날씨는 프레스코에 안성맞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프레스코 미술에 통용된 특수 화법은 에트루리아 인이나 고대 로마인들이 사용한 것과 대동소이(크게 같고 작게는 다르다, 즉 거의 비슷하다)하나, 1270년 피렌체가 아닌 로마의 화가 피에트로 데이 체로니(Pietro dei Cerroni)의 화방에서 질적으로 크게 개량되었다. ‘카발리니(작은 말)’라는 별명을 가진 피에트로는 프레스코와 모자이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어 유명해졌다. 100세라는 엄청난 고령에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에도 머리 위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카발리니의 프레스코 형식과 기술은 훗날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프레스코 화가인 조반니 체니 디 페피(Giovanni Cenni di Pepi)에게 전수되었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치마부에(소대가리)’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피렌체 출신의 화가였다. 치마부에는 조로조 바사리에게서 혁신적인 회화 미술의 원조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는데, 피렌체의 산타 트리니타 성당이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같은 신축 성당의 벽을 프레스코나 다른 회화 양식으로 장식해 명성을 날렸다. 또한 1280년쯤 아시시에서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위아래에 여러 폭의 프레스코를 그렸는데 오늘날 모두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 치마부에 ( 소대가리 )’ 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피렌체 출신의 화가. 조반니 체니 디 페피 (Giovanni Cenni di Pepi)

치마부에에게서 조수이자 훗날 자신의 실력을 능가하는 젊은 화가가 한 명 있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치마부에는 농사꾼의 아들이던 화가를 우연히 피렌체와 근처의 베스피냐노 읍을 잇는 노상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는 바로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였다. 조토는 치마부에가 사망한 후에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프레스코에 더욱 전념하기 위해 보르고 알레그리(즐거운 길)(길 이름이 이렇게 불린 것은 치마부에가 그린 한 점을 앙주의 샤를르 왕에게 보여 주기 위해 작업실 밖으로 갖고 나오자 동네사람들이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뜨겁게 환호한 데서 비롯되었다.)에 있는 스승의 집과 공방에서 나왔다. 조토는 치마부에한테서 배운 기술을 수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제자는 푸치오 카판나(Puccio Capanna)였다. 푸치오는 프레스코야말로 정말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들한테나 어울리는 미술 화법임을 오랜 고생 끝에 깨달았다. 바사리는 푸치오가 프레스코에 혹사당해시름시름 앓다가 요절했다고 주장했다.

프레스코 화법은 개념적으로는 단순했지만, 실행에는 숱한 난관이 뒤따랐다. 영어로 프레쉬(fresh)’를 뜻하는 이탈리아 어인 프레스코(fresco)’는 화가가 프레쉬, 다시 말해 축축하게 젖어 있는 석고 위에 그림을 그린 것에서 유래했다. 프레스코 작업에는 충분한 사전 준비와 정확한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먼저 기존의 마른 석고 위에 인토나코(마감 바탕제)라고 하는 새로운 석고를 흙칼로 반 인치 두께로 덧칠한다. 인토나코는 석회석과 모래로 된 부드러운 반죽으로 표면을 안료의 침투가 가능하다. 또한 표면은 건조 과정에서 방수 기능을 갖게 되어 흡착된 안료가 콘크리트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한다.

치마부에에 제자인 조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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