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Italy94 미켈란젤로_ 전사 교황 (2) 부오나로티 일가는 질박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미켈란젤로의 증조부는 은행가로 성공해 큰 부를 모았으나 실패한 은행가였던 조부에 의해 모두 날려버렸다. 말단 관리였던 로도비코는 피렌체의 위쪽 구릉에 자리 잡은 세티냐노 농장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이곳에서 나오는 수입에 거의 매달려 살다시피 했다. 미켈란젤로는 유년시절을 바로 이 농장에서 보냈다. 보모가 이 지역에 사는 벽돌공의 아내여서 망치와 끌을 사용하는 기술을 익히는 기회가 자연히 생겼다. 1506년 미켈란젤로의 일가는 농장을 세놓고, 피렌체에서 환전상을 하는 숙부 일가와 한 집에 살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형인 리오나르도는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25세부터 29세에 이르는 세 동생은 아직 집을 떠나지 않았다. 부오나로토와 조반시모네는 모포 가게에서 조수로.. 2021. 3. 8. 미켈란젤로_ 전사 교황 (1) 교황 율리우스 2세는 1443년 제노아 부근의 알비솔라에서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라는 세례명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어부였던 그는 페루자에서 로마법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신부 서품을 받은 후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줄리아노의 이력을 뒤바꾼 운명의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1471년의 일이었다. 저명한 학자였던 숙부가 그 해에 교황 식스투스 4세로 선출된 것이다. 교황의 조카라면 누구나 당연히 초고속 승진의 행운을 기대했을 것이다. 네포티즘(족벌주의)은 사실 이탈리아 어인 니포 테(Nipote),다시 말해 네퓨(Nephew, 조카)에서 나온 말이다. 역대 교황들이 네포티즘에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조카(실제로는 서자인 경우도 많았다.)들을 승진시키는 일에 발 .. 2021. 3. 6. 미켈란젤로_ 음모 (3) 이 대목까지 언급한 로셀리는 미켈란젤로가 절대 천장 프레스코 건을 맡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브라만테가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성하, 제 생각으로는 미켈란젤로 선생은 이 일을 해낼만한 충분한 용기나 배포가 없습니다. 선생은 아직 인물화 경험이 충분치 않습니다. 더구나 천장에 그리는 인물화는 그에 필요한 원근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건 땅에 발을 디디고 그리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미켈란젤로와 달리 수많은 프레스코를 그리며 경력을 쌓아온 브라만테는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브라만테는 15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거장 중 한 사람인 우르비노 태생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문하에 들어가 화가 수업을 받았다. 그런 뒤에 베르가모와 밀라노로 가서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이때 그린 것 중 .. 2021. 3. 5. 미켈란젤로_ 음모 (2) 로마가 처한 암울한 상황을 일신하고자 한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에게 큰 건물과 기념물을 되도록 많이 세우도록 했다. 그로 인해 로마를 명실공히 가톨릭 교회의 성지이자 주민과 순례자 모두에게 훌륭한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브라만테는 우선 티베르 강 양변의 도로를 확장하고, 포석을 깔고, 포장할 것을 주문했다. 우기가 되면, 로마의 도로는 나귀의 꼬리까지도 진흙탕에 처박힐 만큼 난장판이 되었다. 브라만테는 낡은 하수관을 교체하거나 수리했고, 티베르 강 바닥을 준설해 위생과 운항 능력을 높였다. 또한 상수도관을 새로 깔고, 로마 시 외곽에서 청정수를 끌어다 자신이 건축한 산 피에트로 광장의 중앙 분수에 댔다. 브라만테는 바티칸 궁을 미화하는 작업에도 나서, 1505년 교황 궁과 벨베데레 .. 2021. 3. 4. 이전 1 2 3 4 5 6 7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