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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Gladiator 로마 검투사의 역사

by TES leader 2020.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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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검투사들은 모두 야만족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출신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로마 인들에게 검투 시합은 분위기와 싸움 방식이 야만족의 그것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검투사들은 실제 포로가 된 야만족인 든 불행에 빠진 로마 인이든 상관이 없었지만 진짜든 꾸며내었든 간에 먼 곳에서 데려온 자들이었다. 검투사가 되기를 강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통 사형 언도를 받았거나 스파르타쿠스처럼 전시에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자들이 검투사가 되었고, 이들은 검투사 학교에서 혼돈한 훈련을 받았다. 전쟁포로들은 노예가 될 것인지 계약 기간 동안 검투사로 활동할 것인지 선택했고, 검투 시합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자유와 상당한 돈을 확보했다. 승률이 높은 검투사의 인기는 대단해서 귀부인들의 마차가 드나들고 사모하는 여인들의 한숨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점차 검투사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자유민들 중에서도 채무자나 절망한 자 또는 돈벌이나 모험을 원하는 사람들이 검투사가 되었다. 이들은 목적이 수입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죽을 때까지 싸우지는 않았다.

 

검투 시합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로마 군단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절대 사용하지 않고, 이국적이고 보기 드문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점, 그리고 쌍방의 무장상태나 출신, 체격 등의 조건이 서로 달라야 했다는 점이다. 검투 시합은 대등한 두 용사의 결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의식의 한 부분이었고, 인간이 아니라 의식에 쓰는 동물들의 싸움에 불과했다. 결혼 의식 때 바치는 동물의 피가 결합을 상징하듯이 검투 시합에서 흘리는 피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분리의 상징이었다.

 

검투사의 유형은 보통 둥근 방패와 단도로 무장한 트리키 안혀과 검과 투구를 쓰는 무르 밀로네스형,그믈과 삼지창을 쓰는 레티 아리 형으로 구분되었다. 많은 경우 결투 가상 시합이 치렀고, 피를 흘리지 않고 시합이 끝났다. 보통 2 1조가 되어 시합을 벌였는데, 동시에 여러 쌍이 시합을 하기도 했다. 떄로는 비무장 죄수와 맹수 사이의 목숨을 건 싸움도 있었다. 검투 시합의 활성화로 제정 시대에는 검투사 학교를 통해 직업적인 검투사들이 양성되었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설립된 4개의 학교 중 한 학교의 건물 잔해가 콜로세움 뒤쪽 길 건너 지하에 남아 있는데, 이 유적이 4개의 검투사 학교 중 가장 큰 루두스 마그누스 Ludus Magnus의 일부다. 왼쪽의 사각 공간들은 검투사들의 숙소이고, 오른쪽의 둥그스름한 부분은 연습장의 한쪽이다. 이 학교는 콜로세움 지하와 연결되어 있었다. 클라우디아 가도 옆길인 카포 다프 리카 길(Via di capo d’africa)에는 루두스 마투티누스Ludus Matutinus 유적이 있는데, 무기 창고, 양호실, 탈의실 등의 서비스 시설이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나머지 두 학교는 오피오 언덕에 있었다고 하는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검투 시합을 조직하는 주최 측은 정무관들이었고, 검투사들은 육성 관리하는 공연 사업자인 라니스타 Lanista들이 계약에 따라 검투사들을 공급했다. 검투사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체력 연마나 전기가 아니라아레나에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였고, 이것이 바로 라니스타들이 항상 조바심 낸 것이었다. 패자는 자신을 죽일 자에게 목을 들이대면서 위엄 있게 죽을 줄 알아야 했고, 승자는 나팔소리가 나면 칼을 공중에 휘둘러 관중에게 답한 후 상대방을 죽였다. 시합이 끝나면 저승사자 카론의 마스크를 쓴 진행요원들이 쓰러진 자들에게 다가가 막대기로 찔러서 죽었는지 확인하고, 살아 있으면 망치로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 그런 다음에는 메르쿠리오 Mercurio(=Hermes)가면을 쓴 진행요원들이 들어가 갈퀴로 시신을 끌어내고, 또 다는 진행요원들이 피 묻은 모래를 걷어내고 새 모래를 깔아 다음 시합은 준비하였다.

무기 유형에 따라 팀이 분류되었고, 결과가 불 보듯 뻔하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싸움 상대들 사이에 어느 정도 균형을 맞췄다.단검을 쓰는 검투사 팀과 그물과 삼지창을 T는 검투사 팀이 전형이었고, 단검을 의미하는‘글라디우스 gladius’에서 검투사를 의미하는글라디아토르gladiator’라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유능한 검투사라도 보통 5년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결린 8회에 경기에서 거의 1만 명이 죽어나갔고, 트라야누스 시대에도 비슷한 수의 검투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콤모두스는 직접 아레나에 내려가 검투사로 활약해 검투 시합의 인기를 고조시켰다. 이 유혈극에 매료되지 않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음은 세네카의 글에 잘 나와 있다. 크리스트교가 확산되면서 검투 시합은 그 처절한 성격이 완화되기 시작하다가 사라지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베리투스 칙령을 내려 검투 시합을 폐지하고 원형경기장에서 죄수를 사형시키는 대신광산 노동형으로 바꾸었다. 크리스트교 전통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즐기는 자는 살인의 방조자 혹은 공범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투 시합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어 검투 시합은 바로 재개되었고, 397년 호노리우스에 의해 또다시 금지되었다가 발렌티니아누스 Valentinianus세(423-455) 때 부활되었으며, 마침내 서로마가 몰락한 후 483년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정말 금지되었다. 맹수 사냥은 6세기 초에야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크리스트교들의 순교설은 델레 하이어 신부와 다른 학자들이 증명했듯이 역사적으로 전혀 증거가 없다. 물론 사형수들이 맹수 사냥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박해기에 사형 언도를 받은 크리스트교도들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전설일 뿐이다. 크리스트교도들은 다른 곳에서 처형되었고, 박해도 특별한 경우에 이루어졌다.

 

한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부상당한 검투사는 거의 살려주지 않았고, 특히 투구를 쓰지 않고 싸우는 그물을 쓰는 검투사들은 죽어가는 얼굴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단 한 명도 살리지 않고 이를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불구의 몸에, 오랜 기간 황실의 제위 계승 투쟁의 와중에서 살아남아 50대의 즉위한 인물인 데다 제위 시의 개인적인 행적과 정치 행정 면에서의 치적이 상반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의 행위를 로마 인들의 일반적인 행동으로 파악하는 건 잘못이다. 대체적으로 당대 저술가들은 황제의 정치력보다는 그들의 사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춰 서술했기에 그들이 경기장이나 연회장 같은 장소에서 보인 행위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카라굴라나 도미티아누스가 폭군임을 가리킬 때 원로원 의원이나 여인들을 경기장에 강제로 집어넣었다는 식으로 서술하거나 네로가 직접 아레나에 등장했다고 서술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사실 여부를 떠나 당대인들이 생각하기에 그러한 행동이 예외적인 것이었음을 가리키는 증거다. 로마 인들이 정말 목숨을 건 싸움을 보며 광분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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