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신격화 경향
그리스 동방에서 유입된 종교들이 일반적으로 전통 종교와 결합하여 사회 안정에 기여하였지만, 일부 일반시민들에게 영향력이 강한 종교나 비교는 국가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위험의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로마 귀족들은 전통 종교에 대한 열정 대신 철학적 대안을 찾고자 했다. 세계 제국으로 성장한 마당에 팽창하는 과정에서 중요시되었던 종교들의 가치가 떨어진 대신 새로운 구심점의 필요성이 부각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원전 1세기의 귀족들은 로마 제국이, 신이 다스리는 국가를 지상에서 구현한 것이고 이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는 정치가들이 신들의 보상을 받을 뿐 아니라 신들의 세계에 합류해야 한다는 논리를 세웠고, 당연히 귀족들이 취해야 할 행위나 태도도 이 논리에 맞추어 설정되었다.
기원전 1세기는 정복 전쟁을 주도한 공화제 과두 정부가 정복전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군사력을 쥔 장군 정치가들의 패권 다툼에 의해 희생당하고, 패권 다툼의 승자가 일인자로 등장하는 시대였다. 현실 상황이 1인 지배 체제로 굳어졌다고는 해도 공화정 전통이 순식간에 불식될 수는 없었고, 카이사르의 암살에 이어 또 한 차례의 내전을 거친 후에야 아우구스투스의 1인 지배 체제로 결말이 나게 되었다.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가 퀴리누스 신으로 숭배 대상이 된 걸 제외하고는 그동안 로마 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신격화한 일은 한 차례도 없었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 집권기와 사후의 상황에 신격화 논리를 결합시켜 자신의 양아버지인 카이사르를 신들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정계 입문 초기인 기원전 68년부터 율리우스 가문과 비너스의 연계성을 강조하였는데, 그 골자는 로마의 고향 알라룽가를 창건한 아스카 니우스가 율리우스 가문의 시조인 율루스라는 것이었다. 로마 신화에서 아스카니우스는 아이네아스의 아들이므로 그는 비너스의 손자이기도 하다. 또한 카이사르가 죽은 직후에 나타난 혜성이 그의 승천을 가리키는 징표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카이사르의 달력 개정
율리우스력은 카이사르가 직접 나서서 의도적으로 개정한 달력이다. 기원전 1세기 당신의 달력은 계절을 3개월이나 앞섰기 때문에 개정할 필요성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머무를 때 점성술에 눈을 떠 이집트 태양력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고, 기원전 46년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점성가 소시게네스와 마르쿠스 플라비우스에게 지시하여 달력을 개정하였다. 이 달력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력과년에 하루 정도의 오차가 나는 상당히 정확한 달력이었다.
개정 결과 개정 원년의 일수는 445일로 조정되었고, 다음 해부터 2월은 29일, 나머지 달들은 30, 31일이 교대하여 365일이 되었다. 이때부터 4년마다 2월은 하루가 추가되어 30일이 되었고, 3월 대신 1월이 첫 달로 정해졌다. 달력을 개정한 해에는 계약, 항해 계획, 세금 징수 등 날짜와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카이사르가 개정하기 전의 달력은 태음력이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 시대에 1년이 10개월에 304일이던 것을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가 해와 달의 주기를 근거로 야누스 월(Ianuarius)과 정화(淨化) 월(Februarius)을 추가시켜 12개월에 354일이 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태음력은 그보다 2세기 후인 6세기에 정해진 것이다. 첫 달이 마르스 신에게 바쳐진 3월이고 마지막 달이 2월이었다. 날수가 맞지 않아 2년마다 테르미날리아 축제(2월 23일) 다음에 20일짜리 윤달을 끼워 넣고 그래도 모자라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8년마다 윤달을 넣는 방식으로 오차를 줄였다.
사제가 달의 변화를 육안으로 관찰하여 새로 달이 생기는 날을 새달 첫날로 선포했는데, 구름이 껴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음날로 발표를 미루기도 했다. 또한 육안으로 관찰한 낮의 길이를10등 분해 시간도 정했으므로 그들에게 한 시간은 계절에 따라 실제 40분에서 80분까지 다양했다. 사제단이 비밀리에 보관하던 달력의 비밀을 담은 법전 사본을 평민들이 훔쳐내 광장에 전시했지만, 사제단의 고유 권한을 뺏을 수는 없어서 임의로 첫 날을 정하거나 윤달을 집어넣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정되지 않은 달력 체계는 임기 만료 시기를 연장하거나 선거일을 당기거나 늦추는 정치적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아주 민감한 사안이었다. 특히 기원전 1세기, 군사력을 기반으로 권력 투쟁을 벌인 정치가들은 콘솔과 속주 총독의 군 지휘권을 놓고 싸웠기 때문에 기한의 변동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카이사르의 달력 개정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성격의 조치였다. 결과만 놓고 볼 때 그가 정한 율리우스력이 불합리한 달력 체계를 정비해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큰 수정 없이 사용될 만큼 정확하다는 점 때문에 카이사르의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달력 개정의 이면에 깔린 의도는 이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정적들은 카이사르가 별까지 다스리려 한다고 비난하였는데, 권력을 잡은 후 카이사르가 취한 조치들의 상당수가 자기가 써먹었던 불법적인 방법들을 남들이 쓰지 못하도록 없애려는 의도에서 나왔고, 달력 개정도 이러한 의도가 다분한 것이었다.
기원전 44년 초에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업적을 기념해 퀸 딜리스 달을 율리우스 달로 개칭하였다. 달력의 이름들이 마르스, 마이아, 유노 가은 신들의 이름이었기에 이름 채택이 지니는 상징적 효과가 적지 않았는데, 몇 달 후에 벌어진 카이사르 살해 사건도 이 조치와 관계가 없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비명에 간 후 사제들이 다시 윤년을 3년에 하루씩 임의로 집어넣기 시작하자 아우구스투스는 청동 판에 기록해 율리우스력을 회복시켰고, 원로원은 섹스 틸리스 달을 아우구스투스 달로 개칭하여 이를 기념했다. 율리우스력의 7월, 곧 율리우스 달은 31일이고 8월 아우구스투스 달이 30일이라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균형이 맞이 않다고 해서 8월도 31일로 바꿈에 따라 9월부터 날 수가 뒤바뀌어 하루가 늘어나자 2월의 날 수를 하루 줄였고, 결과적으로 오늘날 사용하는 양력의 날 수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때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정해진 것이다. 한편 여론을 의식한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이 자기 이름을 달력에 넣겠다고 제안하자 나중에 황제 수가 달 수보다 많아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며 완곡히 거절했다. 이처럼 카이사르는 달력을 개정하면서 신과 관계가 없는 첫 달이자 자기가 출생한 달인 퀸 틸리스(3월부터 시작해서 5번째 달이라는 의미)를 율리우스로 바꿔 신격화의 길로가 가는 정치 문화적 틀을 마련해놓았고, 아우구스투스는 사회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전통 종교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하면서도 동시에 카이사르를 신격화하고 군주를 신으로 섬기는 데 익숙한 동방 속주 주민들이 자신을 숭배하는 걸 조심스럽게 고무함으로써 황제 숭배 제도를 확실히 해놓았다. 재정 시대에는 황제의 모습으로 구현된 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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