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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황제 신격화 경향 (2) - 카이사르 신전 /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 하드리아누스 신전

by TES leader 2020.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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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신전(Tempio di Giullo Cesare)

기원전 48년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제압하고 3년 후 폼페이우스 아들들의 반란을 진압해 명실상부한 일인자의 자리를 굳힌 카이사르는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내전의 재발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전면적인 재건 개혁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삼두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시리아 속주를 차지한 크라수스가 군사적 영예를 얻기 위해 기원전 54년 시도한 파르티아 원정은 7개 군단이 궤멸하고 군기들마저 빼앗기는 치욕적인 사건이었고, 그 자신이 죽는 바람에 삼두체제를 깨버리는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파르티아 보복 원정은 내전을 종결시킨 카이사르가 치러야 할 우선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그는 원정 출발 3일 전인 기원전 44 3 15일 공화파 의원들의 음모에 걸려 이 숙원 사업을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공모자들은 독재자를 제거한 원로원 의원들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동료 콘술 자격으로 원로원 회의를 주재할 권리를 가진 안토니우스가 공모자들의 죄를 묻지 않는 대신 카이사르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를 것을 타협한 후, 장례식 때 유언장을 공개함으로써 상황이 반전되었다.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들에게 남긴 재산의 액수를 밝히고 카이사르의 시신을 보여주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카이사르 암살 공모자들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 <줄리어스 시저>에서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을 아주 선동적인 웅변으로 묘사하였지만, 사실은 간결하고 평범한 내용이었다. 시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카이사르가 유언으로 자신들에게 돈을 남겼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카이사르의 권위를 충분히 드러내는 증거였고, 지도자의 시민에 대한 가부장적 보호관계를 재차 확인한 것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공모자들은 연초에 할당받은 속주로 떠나야 했다.

뒤이은 내란으로 공화파에 필리피 전투에서 패배해 섬멸된 후 원로원은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추모하는 제단을 설치하고, 그의 시신을 화장한 자리에 기념 원주를 세웠다. 현재 응회석 반원 모양의 유적이 있고, 이 반원 안에 보다 오래된 원형의 돌덩어리들과 봉분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카이사르 화장터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공개한 자리이기도 하다.

공화파를 제거한 후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지명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악티움 해전으로 결판이 난 기원전 31년에 옥타비아누스는 기념 원주를 없애고 대신 그 자리에 카이사르 신전을 세워 황제 신격화의 선례를 만들었다. 로마 광장 정문을 지나 비탈길을 내려가면 사크라 길과 만나는데, 그 맞은 편에 지붕으로 덮여 있는 유적이 카이사르 신전 자리이다. 기원전 29 8 18일 낙성된 카이사르 신전은 옆면과 뒷면에 열주 회랑(Porticus Iulia)이 있는 직사각형 신전으로, 앞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 함대에게서 빼앗은 이집트 함선 선수들로 장식한 전망대가 서 있었다. 현재는 신전의 시멘트 기단 일부만 남아 있다. 신전 전면에 있는 기다란 유적은 시 장관 집무실 자리이고 신전 뒤쪽에는 왕정 시대에 왕이 살다가 공화정이 되면서 대사 제청으로 바뀐 레지아 건물 유적이 있다.

카이사르를 신으로 격상시켜 황제 신격화의 선례를 만든 아우구스투스는 당연히 신의 반열에 올랐고, 통치력 측면에서는 문제가 없었으나 대인관계가 별로 좋지 않아 서거했을 때 로마 시민들이 환오성을 올렸다는 티베리우스나, 궁정 여인들과 해방 노예 대신들에게 휘둘린 클라우디우스도 신의 지위를 얻었다. 클라우디우스 신전은 첼리오 언덕에 있었는데, 64년 화재로 파괴된 자리를 네로가 연못으로 만들어버렸다. 네로의 사부 세네카는 자신을 유배시켰던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앙심을 장례식 추도시로 복수했는데, 이 시는 절름발이에다가 얼굴도 추하게 생각 황제가 호박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천상의 신들도 싫어해 지옥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쫓겨났다는 풍자적인 내용이었다. 폭군으로 알려진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두 황제, 카리굴라와 네로는 신격화 대상에서 당연히 제외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신전(Tempio di Vespasiano)

플라비우스 왕조를 연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바친 신전이 포로 로마노 북쪽 끝에 위치한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이다. 바로 뒤에 있는 타불라 리움 건물과 연결된 이 신전은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 화해의 신전과 사투르누스 신전 사이에 서 있었는데, 황제 신격화가 한 세기를 거치면서 더 이상 시민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제도로 자리 잡았음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건물이었다. 공간이 부족해서 기둥 간격도 상대적으로 좁은 이 신전의 현존하는 부분은 현관 기단 모서리와 그 위에 선 높이가 15.2m인 코린트식 기둥 3개뿐이다. 기둥 위 평방(architrave)에 세베루스가 복구했다는 기록과 제사 의식에 사용된 도구를 새겨놓은 부조물이 남아 있다.

 

 

피에트라 광장의 하드리아누스 신전(Tempio di Adriano)

살해당한 도미티아누스 뒤를 이은 오현제 시대(96~180)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라 불리는데, 이 시대에는 제위 계승이 원로원층 안에서 입양을 통해 이루어짐에 따라 황제와 원로원 귀족층 사이의 갈등이 줄어들었다. 황제의 신격화는 원로원에서 결정하는 사항이었으므로 원로원과 관계가 좋은 편이었던 이 시대의 황제들은 모두 신격화되었고, 아우구스투스의 부인 ㅇ리비아가 신의 지위를 얻은 전례에 따란 황비들도 신의 지위를 얻었다. 특히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19년 사망한 장모 마티디아[Matidia]에게 신전을 지어 바쳤는데, 트라야누스의 양자로 황궁에서 성장한 황제가 트라야 누스 황제의 질녀이기도 한 그녀에게 최고의 영예를 부여하는 걸 원로원이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판테온 북서쪽 카프라니카[Capranica] 광장에 있었던 마티디아 신전(Tempio di Matidia)의 유적은 광장 옆 골목에 있던 지름 1.7m의 원주뿐이다.

즉위 초 역모 주모자들을 처형해 원로원의 미움을 산 하드리아누스는 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완고한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하지 못했더라면, 신전의 주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안토니누스 황제에게 피우스(경건자)라는 별명을 붙게 된 한 가지 이유가 바로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일관되고 신실한 태도에 있었다. 145년 완공된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마티디아 신전과 코로소 길 사이, 현재 피에트라[Pietra] 광장과 보르사 궁전(Palazzo della Bora) 자리에 있었다. 신전 오른쪽의 내실 벽과 원주 11개가 보르사 궁전 벽으로 이용되어 현존하는데, 내실 벽과 원주 사이 지하에 4m 높이의 기단이 보인다. 또한 신전 내실의 궁륭형 천장 일부가 궁전 내부 천장에 포함되어 있다. 광장의 이름이 피에트라()인 이유도 이 석조 신전의 돌기둥들에 있다. 내실의 반원주 벽 받침대에 제국 속주들을 의인화한 그림들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현재 그 일부가 나폴리 국립 박물관과 캄피돌리오 언덕의 콘세르바토리오 궁전 안뜰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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