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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라파엘로의 방들. <엘리오도로의 방><보르고 화재의 방><콘스탄티누스의 방>

by TES leader 202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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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오도로의 방 (Stanza di Eilodoro)

2. 엘리오도로의 방(Stanza di Eilodoro)

원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이 있던 곳인데, 1512년에 라파엘로가 이를 지우고 새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4자의 벽화는 신앙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신이 개입하는 기적을 주제로 하고 있다.

1514년에 그린 <성 베드로의 해방>은 달빛과 천사의 후광, 병사들의 철갑 옷에 비치는 빛이 환상적인 효과를 주는 작품이다. 생기 있는 색깔과 그늘진 부분에 나타나는 깨끗한 윤곽들도 인상적인데, 이 작품은 렘브란트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

이 방의 첫 작품인 <볼세나의 기적> 13세기에 화체설을 의심하던 보헤미아의 한 사제가 미사를 드리던 중 축성된 성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오른쪽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교황은 율리우스 2세의 모습이며, 이 교황의 철저한 신앙심을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활력에 차 있는 근위대 장교들의 모습은 대기 상태의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데, 1503년 체사레 보르지아를 제압하기 위해 출정하는 교황 군대의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었다. 왼쪽의 혼란스러운 분위기와 사제의 유약한 모습이 대조적이다.

1513년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레오 1세와 아틸라> 452년에 이탈리아에 침입한 훈족의 왕 아틸라의 부대와 레오 1세가 로마 성문 앞에서 회담하는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 한가운데 흑마에 탄 아틸라가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난 성 바울과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 장면을 그렸는데, 사실은 로마까지 오는 과정에서 지치고 병든 훈족 부대에게 레오 1세가 보상금을 주어 물러가게 했다. 천장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방주에서 나온 노아, 야곱의 꿈, 불붙은 떨기나무 숲이 그려져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보르고 화재의 방 (Stanza dell Incendio di Borgo)

3. 보르고 화재의 방(Stanza dell Incendio di Borgo)

라파엘로는 1514년 교황의 개인식당을 장식하는 사업을 시작했으나, 이 해에 브라만테와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한 후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자로 임명된 데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안에 키지 예배당을 설치하고 브라만테가 2층까지 완성한 회랑을 중축하느라 매우 바빴으므로, 제자들이 대부분의 장식을 처리했다. <보르고 화재> 847년 보르고[Borgo] 마을에 발생한 화재를 교황 레오 4세가 성호를 그러 간단히 진화했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보르고는 베드로 대성당과 테베레 강 사이에 있는 중세 기원의 마을로, 교황청과 라테란 협정을 맺은 무솔리니가 화해의 길을 내기 위해 헐어버렸다. 레오 4세의 얼굴은 그림을 그릴 당시의 교황인 메디치 가문의 레오 10세의 모습인데, 레오 10세는 1515년에 33세의 라파엘로를 로마 문화재 관리책임자로 임명할 정도로 신뢰했으므로 이 후원자의 얼굴을 그려 넣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황이 서 있는 곳은 강북 회랑(Loggia delle Benedizioni)이고 신축 이전의 베드로 대성당이 왼쪽에 보인다. 이 성당은 라파엘로가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미 사라져버렸지만, 그가 처음 로마에 왔을 때에는 건재했고 그는 당연히 자신이 보았던 성당을 근거로 그렸을 것이므로, 이 그림은 옛 성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구도는 라파엘로의 것이고, 대부분의 그림은 줄리오 로마노와 다른 조수들이 그렸다. 왼쪽의 네 사람, 즉 트로이 멸망 시 아버지 앙키세스를 업은 아이네아스가 아들 아스카 니우스를 이끌고 불타는 성을 탈출하는 장면은 라파엘로 자신이 직접 그린 부분으로 보르고의 화재와 로마 건국과 관련된 전설상의 트로이 화재를 연관시킨 것이다. 이 인물들도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영향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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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티아의 전투> 849년 모슬렘 족이 침입했을 때 레오 4세의 교황 군대와 이슬람 군대가 벌인 해전을 묘사한 그림이다. 크리스트교와 이슬람 세계의 충돌 장면을 주제로 택한 데에는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성지를 차지한 오스만 터키에 대해 십자군을 조직하려는 레오 10세의 의도가 작용했다. <샤를마뉴 대관식>은 프랑크 왕 샤를마뉴가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모습이다. 교황과 황제의 얼굴은 레오 10세와 프랑수아 1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레오 3세의 서약은 전임 교황의 조카들이 그의 교황권에 시비를 거는 데 대해 교황은 주님에게만 평가받는다고 반박하는 장면이다. 사실 두 그림은 레오 3세가 자신에게 열악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역사적 순간을 표현했다.

799년 시가행렬 중 반대파에서 붙잡혀 수도원에 감금되는 수모를 당한 교황은 간신히 도망쳐 샤를마뉴의 궁전에 피신했고, 11월에 왕과 함께 로마에 돌아올 수 있었다. 교황은 샤를마뉴의 지원하에 종교회의를 소집해 주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사도권을 평가할 수 없다는 서약을 받아냈고, 성탄 이틀 전에 이를 공표하고 성탄 전야에는 샤를마뉴에게 제관을 씌워주는 행사를 치렀다. 말하자면 두 그림은 하루 사이에 이루어진 교권과 제권의 제휴를 묘사한 것이다. 이 사건을 성당에 대한 세속군주의 영향력을 명백히 드러내지만,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교황권 강화의 출발점이고, 레오 3세가 주장했듯이 주의 역사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들어맞는 사례였다.

 

콘스탄티누스의 방 (Sala di Costantino)

4.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stantino)

크리스트교 공인과 관련된 그림들로 채워져 있는 이 방은 라파엘로의 방들에 포함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제자들의 방으로 보아야 한다. <밀비오 다리의 전투>는 라파엘로가 잡은 구도에 따라 줄리오 로마노가 그린 막센티누스와 콘스탄티누스 사이의 전투 장면이다. 왼쪽에는 줄리오 로마노의 콘스탄티누스에게 보인 십자가’, 정면은 교황 실베스트로가 콘스탄티누스에게 세례를 주다’(사실 콘스탄티누스가 세례를 받을 때 교황은 이미 고인이었다), 창문 벽에는 줄리오 로마노오 잔 프란체스코 펜니[Gianfrancesco Penni]가 함께 그린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와 서방을 교황 실베스트로 1세에게 기증하다가 있다. 천장 작품은 1585년 톰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부서진 이교도의 우상에 대한 십자가의 승리>.

실제 라파엘로의 방들은 북쪽으로부터 콘스탄티누스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 ‘서명의 방’ ‘엘리오도르의 방순서로 연결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옆에는 16세기 말에 꾸민 키아로스쿠로풍의 장식들 때문에 명암의 방(Sala dei Chiaroscuri)’이라 불리는 방이 있다. 중세 궁전 경제 지점에 있는 이 방은 교황 알현 대기실이었으며, 한때 추기경 회의장으로도 이용되었다. 주카리[Zuccari] 형제의 사도들과 성인들, 14세기 조각군이 그리스도 태형이 있다.

이 방 큰 창문 벽 뒤로 라파엘로의 회랑이 보인다. 브라만테가 건축한 1, 2층 회랑을 1517~1519년에 라파엘로와 제자들이 장식했는데, 라파엘로는 네로의 황금 궁전 천장에 그려져 있는 기묘한 모양의 장식을 회랑 천장에 적용해 소위 그로테스크 기법을 유행시켰다. 브라만테 사후 라파엘로가 완성한 3층 회랑은 라파엘로의 조수였던 조반니 다 우디네[Giovanni da Udine] 1560~1564년 제자들과 함께 장식했는데, 색조가 변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명암의 방옆의 통로를 따라가면, 13세기 탑 안에 니콜라스 5세의 예배당이 있는데, 15세기 중반 프라 안젤리코가 장식했다. 위의 작품은 성 스테파누스, 아래는 성 로렌스로 엄숙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천장에는 4복음서 작가들이 그려져 있고, 바닥도 당대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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