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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루터의 종교개혁 / 예수회와 예수 성당

by TES leader 2021.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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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Martin Luter]

종교개혁과 가톨릭 종교개혁

 

1453년 로마 공화국을 세우려던 스테파노 포르카리[Stefano Porcari]의 음모가 발각된 후 아비뇽 유수와 대분열 시기를 겪으면서 땅에 떨어졌던 교황권은 예전의 위세를 되찾았다. 이후 교황들은 세속권력을 확대하고 성도(거룩한 도시) 로마를 치장하는 데 관심을 쏟았는데, 이와 함께 교황들의 축첩 행위와 재산 증식, 권력 다툼 등의 부정적인 현상도 심화되었다. 특히 스페인 출신으로 보르지아 가문을 일으킨 알렉산더 6(1492~1503) 교황은 애인 반노짜 카타네이에게서 세 자녀를 얻었는데, 맏아들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모델로 삼은 체사레 보르지아였다. 반노짜가 죽은 후 파르네제가의 공작녀 줄리아를 애인으로 삼은 이 교황의 생활방식은 종교개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씨앗은 포폴로 광장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폴로 성문을 통해 로마로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1510, 성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사로 성지순례에 나선 마틴 루터[Martin Luter]도 있었는데, 그는 성문 안 광장에 무릎을 꿇고,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 정화된 성도 로마여!”하며 감격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로마 체류 중 그의 눈앞에 드러난 로마의 모습은 신이교주의 정신의 산물이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옆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에서 숙식하면서 교황의 모母 성당이였던 이 성당에 드나든 루터는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이교 점성술 표식이 있는 예배당을 보면서 혼란을 느꼈고, 교황의 허영과 사치, 타락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로마를 떠나면서 남긴 말은 안녕, 로마여. 성스러운 삶의 바람직한 모든 영혼이 떠나버린 도시여.”였다.

교황청의 타락상은 교황령 국가의 존재 기반에 치명상을 입혀 교회국가의 강화와 안전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은 율리우스 2세의 호전적인 정책과 메디치 가문의 영예까지 염두에 둔 레오 10세의 자충수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20년 전 알렉산더 6세의 교황권에 반발한 사보나롤라가 쉽게 제압된 데 반해, 종교개혁은 교황령 국가와 유럽 전역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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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종교개혁

 

1516년 레오 10세는 라테란 종교회의를 개최해 교리상의 문제들을 다루었으나 교회 개혁에 대한 의지나 성과 없이 끝나버렸고, 1517 10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수 마틴 루터가 현직 주교들에게 보낸 95개 조의 반박문이 신학 논쟁의 물꼬를 텄다. 루터의 문제 제기는 로마 시대 거부(엄청난 부자) 크랏수스보다도 부자인 교황이 왜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고 가난한 교인들의 돈으로 베드로 대성당을 지으려 하는가?’였고, 친구가 이 서한을 인쇄하여 뿌리면서 순식간에 독일 전역에 파문을 일으켰다.

사실 면죄부는 죄를 완전히 사면하는 게 아니라 지은 죄에 대해 연옥에서 받을 벌의 일부 또는 전부를 사면해주는 것이었고, 이는 오래 전부터 교회의 실천 사항이자 구제 절차의 일부였다. 그러나 베드로 대성당 신축 사업을 추진한 율리우스 2세가 교회 주도의 면죄부 매매를 허용하고, 레오 10세가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기여하는 교인을 대상으로 면죄부를 매매하면서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었다.

종교개혁의 이면에는 교황청의 도덕성 문제나 교리, 의식의 문제 외에도 정치적∙경제적 동기가 내재해 있었다. 14세이 이래 유럽의 국가들과 국민들이 영역 국가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그 목표가 달성된 마당에 교회는 이를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게다가 교회나 수도원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는 군주들과 자본가들이 군침을 흘릴 만했다. 이 점은 제후국들이 할거하는 독일 지방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유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이 가한 충격이 큰 만큼 교황청의 자정운동과 수호 의지도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를 가톨릭 종교개혁이라 한다. 종교개혁의 위협에 직면한 교회가 반대 죄를 취했다는 의미에서 반反 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리지만, 개혁의 목소리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르네상스 시대 분위기도 작용했기 때문에 단순한 반종교개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534년 교황자리에 오른 파울루스 3세부터 16세기 말 식스투스 5세에 이르는 개혁 교황들의 시대에 교황청은 성직자의 윤리성을 확립하는 정책을 펴고, 교회 안의 부패를 척결하고 이교도, 이단에 대한 대책을 세워 교세를 회복하였다. 트렌토 종교회의에서 교황의 권위와 정통교리는 재확인 되었고 금서 목록 작성과 교황 직속 재판소 설치로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 잡았다. 교회 개혁은 한편으로는 강성의 이단 척결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장기적으로는 교황권의 절대성이 유지되면서도,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종교적 관용이, 특히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지고, 순례자들의 수도 증가하는 가톨릭 부흥을 가져왔다.

 

예수 성당 [Chiesa del Gesu]

▶ 예수회 운동과 예수 성당

가톨릭 종교개혁의 꽃은 예수의 운동이었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 출신으로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휘하 장교로 심증의 변화를 일으킨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설교와 교육 활동에 종사한 경험을 토대로 1539년 결성한 교단이 예수회다. 교황이 공식적으로 인가하고 지원한 이 교단은 엄한 규율과 복종을 요하는 준군사조직의 형태를 띠었고, 새로운 이단에 대항해 지성과 정치∙외교적 수단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심지어 전쟁과 암투도 마다하지 않았다. 창설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비롯해 이 교단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프란체스코 사베리오[Francesco Saverio], 알로시오 곤짜가[Alosio Gonzaga], 프란체스코 보르지아[Francesco Borgia]는 성인의 대열에 올랐다. 예수회는 청소년 교육, 신앙심 확립, 선교 사업 분야에서 탁월한 활약을 보였다.

베네치아 궁전 뒤쪽 예수 광장에 위치한 예수 성당[Chiesa del Gesu]와 부속건물이 예수회의 모 성당이자 교단 본부이다. 16세기 중반에 건축된 이 성당의 겉면은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지만, 내부는 베르니니와 보르미니의 바로크보다 더 화려한 스타일 때문에 가톨릭 종교개혁의 바로크라 불릴 정도로 압도적이고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미관 면에서 가톨릭의 우월성을 보여주어 의심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절친한 친구 바치치아[Baciccia](본명 Giovanni Battista Gaulli)가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 <예수 이름의 승리>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왼쪽 측면 복도에 있는 이그나티우스 예배당은 예수회 소속 신부 안드레아 포쪼[Andrea Pozzo]가 설계했는데, 원주들은 청금석으로 덮여 있고, 제단 중앙의 이그나티우스 상은 원래 전체가 은이었으나, 나폴레옹이 부과한 전후 복구비를 대느라 녹여서 썼기 때문에 현재는 머리만 은으로 되어 있다. 제단 왼쪽 아래에 <신앙의 승리>와 오른쪽 아래에 <이단 추방> 조각이 있다. 성당 옆 본부 건물에서 이그나티우스가 살다가 죽었다.

로마의 예수회 본부는 창설된 후 거의 2세기 동안 정치적 갈등의 진원지로 악명이 높았고, 음모와 분규, 야욕의 현장으로 여겨 일반인들은 물론 다른 교단 인물들이 기피하는 곳이었다. 이런 면에서 예수 성당 앞은 바람이 많이 분다는 농담이 나온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이유는 어느 날 악마와 바람이 산책을 하다가 이 성당 앞을 지나게 되었고, 악마가 마침 성당에 볼 일이 있으니 잠깐 기다리라고 해놓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는데 나오질 않아 지금도 바람이 밖에서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Ignatius Loy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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