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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물의 도시, 로마 / 천혜의 지형과 배수로 공사

by TES leader 2021.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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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세계적인 수상 도시 베네치아나 나폴리, 카타니아 같은 항구 도시들이라면 몰라도, 해안에서 30km나 떨어진 언덕 도시 로마를 물의 도시라 하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로마는 지리적으로 물과 별 관계가 없는 내륙 도시다. 물론 도시를 관통하는 테베레 강이 있기는 하지만 한강에 비하면 강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 규모가 작고, 강이 도시의 운명을 좌우하지도 않았다. 지형 면에서 결코 물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면서 첫 장의 제목을 물의 도시라 붙인 이유는 물이 2,0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도시의 운명을 상당 부분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도의 과학문명 덕분에 현대인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자연환경, 특히 그 중에서도 물의 수급 문제는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도시가 존립하고 발전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었다. 고대나 중세에 생겨난 도시들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 있어 기본 요소라 할 물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 점은 고대 로마 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의 도시 발전사는 유럽의 다른 대도시들에 비해 특이한 점을 보여준다. 인구 300만에 반경이 약 20km인 현재의 로마 시는, 거의 1,000년에 달하는 고대 로마 시대의 팽창기와, 수도 이전에 게르만 족 침입의 영향으로 거의 도시라 할 수 없을 정도의 자연부락 상태로 돌아간 쇠퇴기,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이루어진 또 한 차례의 두드러진 팽창 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팽창∙쇠퇴∙부흥 과정은 당연히 유럽 역사에서 로마가 차지하는 비중과 맥을 같이 하지만, 이 도시 자체의 지리적∙물리적 환경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았고, 각 국면마다 다른 모습의 도시 형태를 보여주었다.

 

 

클로아카 마씨마 (Cloaca massima)( 대하수로 )

▶ 천혜의 지형과 배수로 공사

 

도시의 형성과 발전에 지형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가 고대 로마 시다. 길이가 400km나 되는 테베레 강의 인접지역 중 로마가 자리잡게 되는 몇 개의 언덕만큼 괜찮은 자리는 거의 없었다. 이 언덕들은 티레니아 해와 뱃길로 연결되는 데다 중지도(中地島)를 통해 쉽사리 강을 건널 수 있는 교통요지였을 뿐 아니라, 굽이도는 물살에 언덕 비탈면들이 깎여 가파른 형세를 유지한 천연의 요새였다.

지세가 탁월한 이 자리에 이미 선주 종족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헤라클레스와 카 쿠스 전설 외에도 청동기∙철기 시대 유물들이 출토된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설상 로마 창건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8세기 중반~ 7세기 초반의 움막집 증거들이 팔라티노(Palatino) 언덕과 광장 지대에서 나왔고, 동시대의 무덤 지대가 에스퀼리노(Esquilino) 언덕과 퀴리날레(Quirinale) 언덕에서 발견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그리스산 수입토기까지 출토되었다. 기원전 7세기 말에는 언덕 비탈면에 움막집 대신 가옥들이 들어섰고,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과 퀴리날레 언덕에 사당들이 자리 잡았다.로마 고아장 지대에 후기 유적이 남아 있는 레지아(Regia)(대사 제청)와 베스타(Vesta) 신전, 쿠리아(Curia)(원로원), 코미디움(Coitium)(민회)도 그 원형이 이 시기에 건축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 들어서면, 감히 도시화 국면이라 부를 수 있는 건축활동이 이루어진다. 퀴리날레와 에스퀼리노 언덕 사이 골짜기에서 시작해 캄피돌리오와 팔라티노 언덕 사이를 관통하여 테베레 광과 만나는 계곡 저지대는 하천 범람이나 홍수 피해가 심한 늪지였다. 주위 형세상 이 늪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언덕 주민들의 앞날을 결정하는 변수였고, 그 해결책은 에트루리아의 선진기술로 이루어진 배수로 공사였다. 에트루리아 출신 왕들이 다스리던 기원전 6세기 초반에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 이 배수로 공사 덕분에 쓸모없던 늪지가 훗날 로마 세계의 중심이 되는 로마 광장(Foro romano)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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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아카 마씨마 (Cloaca massima)( 대하수로 ) 경로

오늘날의 카부르 가도(Via Cavour)를 따라 로마 광장 지대를 가로질러 진실의 입 광장 옆에는 빠져나가는 이 배수로는 처음에는 개천에 뚜껑을 덮은 형태였으나 에밀리아 바실리카(Basilica Emilia)를 건축하기 전에 볼트형 덮개가 있는 하수관으로 교체되어 지하 배수로로 바뀌게 되었으며, 로마인들은 이를 클로아카 마씨마(Cloaca massima)(대하수로)라 불렀다. 중요한 모든 사물에 신성을 부여한 로마 인들은 이 하천에도 사당을 지어 바쳤는데, 베네레 클로아나(Venere cloacina) 사당이 그것으로 에밀리아 바실리카 앞에 있었다. 퀴리날레와 비미날레(Viminale) 언덕 비탈면에서 광장에 이르는 서민 구역 수부라, 에스퀼리노와 팔라티노 언덕을 잇는 벨리아 능선 북쪽 비탈면, 캄피돌리오, 팔라티노 언덕에 설치된 집수통과 하수관이 이 배수로와 연결되어 홍수피해를 예방하고 생활하수를 처리함으로써 도시형성과 발전에 필수적인 물리적 기반이 확보되었다. 벨라브로 광장 산 조르노(S.Giorgio) 성당 앞 막다른 골목과 폰테 로또(Ponte rotto)(부서진 다리) 옆 테베레 강 왼쪽 기슭에서 지금도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이 하수관을 볼 수 있다.

하수 처리 사업이 향후 로마 시에 미친 영향은 단순한 물리적 환경 개선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것은 말라리아 감염의 위험을 완화시켜 언덕 거주민들의 주거공간을 확대시켰고, 이들이 모임을 가지는 넓은 상설공간을 제공했다. 이제 로마 인들은 로마 광장 북서쪽의 정치, 사법기구와 남동쪽의 종교시설을 공유한 시민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로마 광장은 이들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에트루리아 인들이 로마에 전수한 수많은 유산들 가운데서 로마 시 자체에 대한 기여도만 따진다면, 대하수로 클로아카 마씨마가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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