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
1561년 메디치가의 피우스 4세 교황이 86세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ioti)에게 목욕탕 건설에 동원되었던 크리스트교도들을 기리기 위해 성당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천재 건축가는 이 이교 유적을 크리스트교 걸작으로 탈바꿈시켜 고대 세계의 경이로운 건축술에 경의를 표했다. 그 결과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의 미온탕(tepidarium)과 중앙홀 자리에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성당의 정면은 온탕(caldarium)의 둥근 벽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1749년 이 성당을 재건한 루이지 반비텔리(Luigi Vanvitelli)가 측면 복도를 확장하고 측면 제단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웅장미와 비례감에 더해 다른 성당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횡축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1703년 제작된 오른쪽 측면 복도의 해시계(meridiana)는 이 후 150년 동안 정오를 알리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주 제단 벽 위에 세로로 길쭉한 틈이 있는데, 그 곳으로 들어온 햇빛이 바닥에 끼워진 황동 띠를 가로지르면서 정확하게 로마의 남북을 표시해주고, 정오가 되면 햇볕이 정확하게 띠 위에 겹치게 된다. 이 성당은 바티칸 시국이 아니라 이탈리아 공화국이 소유한 대표적인 성당으로 보통 국장(국가적 장례식)과 같은 국가적인 행사가 치러지고, 성탄절과 부활절 축제 때에는 종교음악 콘서트가 열리는 곳이다.
로마 시내에 마지막으로 들어선 목욕장은 콘스탄티누스 목욕장(Terme di Costantino)으로,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소규모 목욕장들을 포함한 총 11개의 국영 목욕장이, 수로 파괴로 기능을 멈추는 538년까지 운영되었다. 315년 퀴리날레 언덕의 동쪽 비탈면, 즉 현재 그레고리안 대학 뒤쪽에 세워진 이 목욕장 건물은 르네상스 말기에 한 차례 파괴되었고, 19세기 후반에 나치오날레 가도(Via Nazionale)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현재 몇 개의 조각상만 남아 있는데,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312~337년)와 콘스탄티누스 2세의 상은 캄피돌리오 광장 난간에, 테베레 강과 나일 강 조각상은 세나토 리오 궁전 아래 분수 옆에 있다. 디오스쿠리(카스토르와 폴룩스) 군상은 1589년 식스투스 5세가 퀴리날레 광장으로 옮겨놓았는데, 다음 세기에 피우스 6세가 아우구스투스 영묘에서 찾아낸 오벨리스크를 그 위에 올려놓았고, 1818년 피우스 7세가 로마 광장의 카스토르 폴룩스 신전 아래에 있던 대리석 수조를 가져다 분수로 꾸며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 밖의 조각상들은 라테란의 요한 대성당 회랑을 장식하고 있다.
■ 목욕탕 구조와 운영 방식
로마 시의 목욕탕 개장 시간은 화로에 불을 붙이는 시간인 정오부터 날이 어두워지는 시간까지였는데, 종소리로 시간을 알렸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환자들을 제외하고는 공무 마감시간인 오후 2시 이후에 입장하도록 규정을 바꿨는데, 일과시간에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속주 도시들, 특히 주민 수에 비해 목욕 시설이 부족한 곳에서는 밤 중에도 목욕탕을 열었다.
목욕탕의 난방은 화로 담당 노예가 목탄을 때서 얻은 뜨거운 공기를 이용하는 지하 히팅 시스템(Hypocaust)으로 이루어졌는데, 화로(Hypocausis)의 뜨거운 공기가 화로 벽에서 나가는 굵은 관을 통해 온탕과 라 코니 쿰(사우나실)바닥 아래와 벽 사이의 공간으로 퍼져나가 탕의 바닥과 벽을 데우는 방식이었다. 화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온탕에 도달할 때는 열기가 약해졌다. 이 방식이 효과를 내려면 바닥이 땅에 직접 닿지 않도록 벽돌 기둥들로 바닥을 받쳐서 뜨거운 공기가 순환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어야 했는데, 기원전 1세기에 세르기우스 오라타(Sergius Orata)가 이에 부응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욕탕 벽도 이중인 데다 속이 빈 벽돌로 쌓았기 때문에 난방효과가 매우 높았다. 이 목욕탕 난방 시스템은 1세기에 이미 중소도시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급수 시설에도 로마 인들의 실용적인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서로 연결된 3개의 황동 용기를 냉탕용, 미온탕용, 온탕용 용기 순서로 배치하고 냉탕용 용기에 물을 공급하는데, 이 용기와 관으로 직접 연결된 냉탕 욕조와 미온탕용 용기만이 아니라 미온탕 욕조와 온탕용 용기, 온탕 욕조 중 어느 한 곳이라도 물이 부족하면 자동으로 물이 채워져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게 된다. 화로 바로 위에 있는 온탕용 용기의 물은 뜨겁고, 인접한 미온탕 용기의 물은 미지근하며, 화로로부터 떨어져 있는 냉탕용 용기의 물은 차가운 상태를 유지했다. 이 방식은 뜨거운 물과 미지근한 물을 신속하고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했다. 폼페이의 보스코레알레(Boscoreale) 별장과 목욕탕 유적들은 당시의 난방과 온수 공급 방식을 잘 보여준다.
로마 인들이 목욕탕에 갈 때 꼭 챙겨가지고 가는 물건이 기름병과 갈고리 모양의 스트리 길레(Strigile),소다(Aphronitrum), 여러 장의 수건이었다. 이 시대에는 세척용 비누가 없었기 때문에 운동을 하거나 온수 욕을 한 후 기름을 바른 스트리 길레로 표피의 노폐물과 각질을 긁어내고 피부에 기름을 바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피부가 약해서 각질 제거를 할 때 스펀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주인이 목욕하는 동안 곁에서 시중을 드는 노예인 발네아토르(Balneator),마사지하는 노예인 운크 토르(unctor)(직업적인 마사지사는 야트랄립테스(Iatraliptes))와 털을 뽑는 노예 알리피루스(Alipilus)가 있었으며, 그 밖에 속옷을 가져다주는 노예, 탈의실에서 의복을 지키는 노예가 있었다. 서민들은 목욕탕에서 일하는 마사지사와 제모사를 썼고, 의복을 분실하지 않기 위해 관리인에게 돈을 주고 맡겼다.
목욕 방식은 취향, 연령, 건강 상태에 따라 다양했으나, 운동을 하고 나서 온수 욕과 냉수욕을 병행하는 방식이 보편적이었다. 로마의 목욕탕은 매우 다양한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이들 모두 목욕 절차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탈의실(Apoditerium)에는 벽에서 튀어나온 돌 의자와 눈높이에 설치된 사각 벽감이 있어, 의자에 앉아 벗은 옷가지를 벽감에 놓게 되어 있었다. 벽감에 문이 없어서 분실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노예가 지키거나 관리인에게 보관료를 내야 했다. 냉탕(frigidarium)에는 보통 작고 깊은 욕조와 천장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미온탕(tepidarium)은 냉탕과 온탕의 온도 차이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간 방이었는데, 대리석 벤치가 있어 목욕하는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잡담을 하면서 온탕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온탕(caldarium)이 있는 방에는 화로와 가까운 쪽에 욕조가 있고, 반대쪽에 분수가 있으며 분수 위에 채광용 구멍이 나 있었는데, 분수는 장식용이 아니라 온탕의 열기로 생긴 수증기를 차게 해서 물로 바꿔주는 기능을 했다. 볼트형 천장에 홈을 파놓은 이유도 표면적을 넓혀 수증기를 보다 쉽게 물로 바꾸고 물이 홈에 따라 벽으로 흘러내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규모가 큰 목욕탕에는 미온탕과 온탕 사이에 사우나실(assa sudation = Laconicum), 치료욕탕치료 욕탕, 향수욕탕도 있었는데, 사우나실에는 천장에 달궈진 청동 원판이 매달려 있어 이 원판에 접근하는 거리에 따라 입욕자 스스로 열기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땀을 냈다.
목욕탕에는 체육관(Sphaeristerium)과 부대시설로 몸에 기름을 바르는 곳(Unctorium), 운동 후 먼지를 털어내는 곳(Destrictorium)이 따로 있었고, 천장이 없는 대형 수영장(Piscinae natatoriae)을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목욕탕 내에서의 체육 활동은 로마 목욕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인들이 운동경기에 열을 올린 데 반해 로마 인들은 경영에서 관람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육체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그 대신 로마 인들은 그리스 인들에게서 전수받은 목욕과 운동을 목욕 문화라는 틀 속에 결합시켰다. 이들은 목욕탕 부설 체육관에서 체조, 씨름, 권투, 구기 종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동을 즐겼는데, 남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매우 제한되었던 그리스와 달리 로마 여성들의 사회활동 범위는 상당히 넓었고, 체육 분야에서도 이 점은 분명히 나타났다. 시칠리아의 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 제정 말기 별장 유적지에는 여인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바닥 모자이크가 있는데, 공놀이하는 여인뿐 아니라 원반 던지기와 아령 운동을 하는 여인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남자들이 몰리는 오후 시간을 피해 저녁에 목욕탕으로 운동하러 가는 여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목욕 과정은 느긋하고 오래 걸리는 것이라 로마 인들은 많은 시간을 목욕탕에서 보냈다. 오후가 되면 일과를 끝낸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와 목욕탕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책도 읽고 친구도 만나고 운동도 하였다. 목욕탕은 단지 목욕만 하는 곳이 아니라 생활의 중심이자 사회적, 문화적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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