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_ 소환
루스티 쿠치 광장(Pizza Rusticucci)은 로마에서 명소 축에 끼지 못했다. 바티칸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깝지만 티베르 강을 가로지른 산 탈 젤로 다리(Ponte Sant’Angelo) 서쪽으로 우후죽순 뻗은 주택과 상점, 골목길들 사이에 끼어 있어 꽤나 옹색했다. 중앙 분수대 바로 옆에 가축 여물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동쪽 끝으로 작은 종루의 아담한 성당 한 채가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성당 산타 카테리나 델레 카발레로테는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기독교 나라의 순례자들이 로마로 가져온 예수의 ‘진짜 십자가’ 파편이나 성인들의 유골 같은 성유물이 일절 없어 주변 사람들조차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시의 방벽으로 가려진 성당 뒤편의 좁은 길에는 당시 이탈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가의 공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납작코에 땅딸막한 키, 볼품없는 체격에 성미마저 괴팍하기 짝이 없는 피렌체 출신의 조각가, 바로 미켈란젤로의 공방이었다. 1508년 4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산타 카테리나 성당 뒤편의 이 공방으로 다시 불려왔다. 로마로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막상 교황에게서 출두 명령이 날아들자 미켈란젤로는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다. 2년 전 로마에서 줄행랑을 칠 당시, 미켈란젤로는 공방을 정리하고서 조수들에게 공방의 물건들을 몽땅 유태인에게 내다 팔라고 시켰었다. 그리고 그해 봄에 로마로 다시 돌아왔을 때, 공방이 텅 비어 있을 뿐 공방 부근의 산 피에트로 광장(Pizza San Pietro)에 야적해 놓고 달아난 백여 톤의 대리석 더미가 아직도 여전히 알몸을 드러낸 채 방치된 것을 목격했다.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이 흰 석재들은 재위 중인 교황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Ⅱ)의 영묘라는 전대미문의 초대형 조각 단지 작업용으로 미리 채석해 놓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미켈란젤로가 로마로 다시 불려 온 것은 이 초대형 조각 사업의 재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당시 33세였다. 1475년 3월 6일 생으로 조수의 말에 따르면, 수성과 금성이 목성의 집을 찾았을 때 태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행성들의 경사스런 배열은, 당시로서는 ‘회화, 조각, 건축 같은 오감을 기쁘게 하는 미술 분야의 일대 성공’을 예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성공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영재인 미켈란젤로는 15세에 이미 피렌체 군주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가 후원하는 전문 미술가 양성소 ‘산 마르코 정원 학교(Garden of San Marco)’에 입학해 조각을 익히기 시작했다. 19세에 볼로냐에서 조각 제작을 의뢰받아 본격적으로 조각에 돌입했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496년에 마침내 생애 첫 로마 여행에 나섰다. 로마에 도착한 미켈란젤로는 곧 <피에타 Pieta>상을 조각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피에타>의 계약서에는 이 작품이 “로마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품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피에타>가 마침내 완성되어 일반에 공개되자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었다. 요구조건은 이미 충족된 셈이었다. 본래 어떤 프랑스인 추기경 묘의 장식용으로 조각된 <피에타>는 동시대의 조각품들뿐만 아니라 당시 미술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잦대이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들마저 압도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미켈란젤로가 연이어 성공시킨 <다비드 David>상 역시 대리석 조각품이었다. 3년간의 각고 끝에 완성한 이 조각품은, 1504년 9월 피렌체의 시청사(Palazo della Signoria) 앞에 세워졌다. <피에타>가 섬세하고 우아한 여성미를 보여 주었다면, <다비드>에서는 반대로 남자의 누드로 거인의 힘을 표현하는 자신의 장기를 선보였다. 높이가 5m에 달하는 조각품 앞에서 피렌 체인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당장 이것을 ‘일 기간테(Il Giante)’ , 즉 ‘거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조각상을 미켈란젤로의 공방에서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까지 운반하는 작업은 친구이자 건축가인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가 떠맡았다. 조각의 덩치가 얼마나 컸는지, 천하의 재주꾼인 상갈로도 4백 미터에 불과한 거리를 악전고투한 끝에 나흘 만에야 겨우 옮길 수 있었다.
<다비드>가 완성된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은 1505년 초,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하던 일을 일체 중단하게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에 전시된 <피에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교황이 자신의 영묘 제작 건을 이 젊은 조각가에게 일임하려 했기 때문이다. 2월 말에 교황청 재무장관인 프란체스코 알리 도시 추기경에게서 미켈란젤로에게 일반 장인의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화 1백 플로린이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조각가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교황을 위한 일에 헌신하게 되었다. 훗날 미켈란젤로가 ‘영묘의 비극’이라고 부르게 될 일을 떠맡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황의 영묘 작업은 언제나 대형 사업의 성격을 띠었다. 1484년에 사망한 식스투스 4세의 경우, 매우 아름다운 청동관이었던 영묘는 제작하는 데에만 9년이 걸렸다. 그러나 검약이라는 것을 일절 모르는 율리우스는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일찍이 볼 수 없던 뭔가 대단한 것을 세우려는 야심에 차있었다. 1503년 교황에 선출되자 먼저 자신의 묘당을 지을 생각부터 했는데, 하드리아누스나 아우구스투스라는 고대 로마 제왕의 영묘를 능가하는 초대형 기념관을 고집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야망에 부응해 폭 10m, 높이 15m에 달하는 버팀목이 없는 건축물을 겁 없이 설계했다. 설계안대로라면 실물 크기의 대리석 조각만도 40점 넘게 제작해야 했다. 또한 이것들을 설치할 기둥이나 아치, 니치(장식하기 위해 두꺼운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공간) 같은 육중하면서도 치밀한 장식이 들어간 구조물도 동시에 제작해야 했다. 설계안은 기념관 맨 아래층을 나신상으로 가득 장식해 자유분방한 예술미를 과시하도록 했다. 반면에 맨 꼭대기 층은 삼중관을 쓴 높이 3m의 율리우스 상 하나만으로 장식토록 했다. 계약서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으로 조각가나 금세공사의 평균 수입의 약 10배에 달하는 1천 2백 두카트의 연年수입과 더불어, 완공 시에는 1만 두카트를 더 지불받기로 했다.
미켈란젤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사업을 진척해 나갔다. 우선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1백 킬로미터 떨어진 카라라로 가 8개월을 죽치면서 이 지방의 유명한 흰 대리석의 채석과 운반 과정을 직접 지휘했다. 운반 도중 짐배 한 척이 티베르 강에 가라앉고, 강물의 범람으로 수척의 배가 늪 속 깊숙이 처박히는 등의 불상사가 잇따랐다. 그런 중에도 1506년 초까지 화차 90대분에 달하는 대리석을 확보해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일시 야적했다가 산타 카테리나 성당 뒤편 자신의 공방 근처로 옮겼다. 대리석이 유구한 대성당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올라가는 것을 본 주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교황보다 더 흥분한 사람은 없었으리라. 이 무렵 바티칸 궁과 미켈란젤로의 공방 사이에는 별도의 통로가 만들어져 교황의 루스티 쿠치 광장 행차가 한결 수월해졌다. 공방을 찾은 교황은 이따금 이 대형 작업을 놓고 미켈란젤로와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대리석이 로마에 미처 다 반입되기도 전에 교황의 관심은 이미 그보다 훨씬 더 모험적인 또 다른 초대형 사업에 쏠려 있었다. 교황은 원래 묘당을 콜로세움 부근의 산 피에트로 인 빈 콜리 성당에 세울 참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마음을 바꿔 아예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훨씬 더 웅장한 무대에 세울 결심을 했다. 그러나 낙후한 대성당이 어마어마한 대 기념관을 수용할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성 베드로의 순교(서기 67년)로부터 250년 후, 유골은 카타콤(초기 기독교도의 지하 묘지)에서 성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곳으로 여겨지는 티베르 강변의 이 곳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그 위로 성 베드로의 이름을 딴 성당 건물이 세워졌다. 그런데 성 베드로의 돌무덤 위로 성당이 세워지긴 했지만, 그의 무덤을 안고 들어선 대성전 터가 본래는 아기를 통째로 삼킬 만큼 큰 구렁이가 집단으로 서식하던 저지대 늪 일대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런 바람직하지 않은 기초 때문에 1505년에 이르자 대성당의 벽은 2미터나 기울어져 버렸다. 물론 이 위험천만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가 수차례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이번에도 그답게 매우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완전히 헐고 성당을 신축하기로 한 것이다. 기독교 세계의 최고 성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카라라에서 돌아오던 무렵이었다. 환상과 치유, 그 밖의 수많은 기적을 일으킨 수십 명의 성인과 교황의 묘가 곤두박질하고, 건물 기초를 세우기 위해 7미터 깊이의 거대한 웅덩이가 파졌다. 주변 도로와 광장에는 고대 로마 시대 이후로 이탈리아에서 최대가 되는 건축 사업을 위해 방대한 양의 건축 자재가 운반되고, 2천여 명의 목수와 석수장이(돌을 쪼고 다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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