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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_ 도안 (1)

by TES leader 2021.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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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셀리가 인부들과 한창 피에르마테오의 옛 프레스코를 천장에서 뜯어내고 있을 때,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할 새 그림을 도안하느라 분주했다. 교황은 천장 프레스코 도안의 기본 지침을 자신이 직접 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정한 대강의 도안에 맞추어 세부 도안에 몰입했다. 교황이 제시한 도안은 실제로 직접 만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인지 확실치 않다. 미켈란젤로는 비망록에 자신은 다만 알리도시 추기경이 정한 조건과 합의대로 작업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런 진술은 추기경이 도안 작업에 깊숙히 개입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미술계에 있어 의뢰인이 작품을 주문할 때 이런저런 조건을 붙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화가나 조각가들은 주문자가 지불 청구서만 받아 준다면 어떤 요구든지 간에 작품에 반영했다. 그런 의미에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조반니 토르나부오니와 맺은 계약서는 의뢰자가 한 단짜리 대형 프레스코를 주문하면서 화가를 어떤 식으로 취급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고전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부유한 은행가였던 토르나부오니는 자신의 이름을 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예배당의 장식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온갖 조건들을 다 갖다 붙였다. 기를란다요의 상상력에 맡겨진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 화가는 어떤 벽면에는 무슨 장면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특정한 치수와 방식까지 강요받았다. 특정 색깔과 프레스코 개시 일까지 일방적으로 지정한 토르나부오니는 마지막으로 화면 전체를 온갖 종류의 새와 짐승, 다수의 인물들로 채울 것을 요구했다. 성실한 장인이던 기를란다요는 의뢰자가 기분 내키는 대로 실컷 주문하도록 내버려 두는 한편, 자신의 프레스코가 무수히 많은 생물로 채워지는 것에 흡족해 했다. 그 결과, 어떤 한 미술사가는 프레스코 장면 대부분이 그림뿐인, 삽화로 도배된 신문지 같다고 평했다. 어떤 장면에는 기린까지 들어가 있었다. 1487년 로렌초 데 메디치의 공원에 아프리카 기린이 살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이국적인 동물화의 모델은 실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피렌체의 비좁은 공간에 익숙하지 않던 기린은 결국 들보에 머리를 처박고 죽었다.

그러므로 미켈란젤로 시대의 미술가들에게서 미술 시장이나 의뢰자의 간섭에 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상상만으로 독창적인 작품을 빚어내는 천재들 특유의 낭만적 이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세기가 지난1615년에태어난 살바토르 로사 같은 화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의뢰자의 주문을 거만하게 퇴짜 놓는 미술가를 만나게 된다. 그는 주문자에게 “벽돌 업자한테나 가보시지! 그 사람들은 주문받은 대로만 만드니까.”하며 퇴짜를 놓았다. 1508년의 미술가들은 벽돌 제작자들처럼 주문자의 요구에 그대로 따랐다.

이런 관례로 1508년 봄, 미켈란젤로는 교황에게서 시스티나 예배당 장식에 관한 세부 지침을 전달받고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측컨대 율리우스의 머릿속에 그려진 형상들은 피에르마테오의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그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했을 것이다. 율리우스는 예배당 창문 바로 윗부분을 12사도로 빙 돌아가면서 채운 후, 나머지 천장 공간은 직사각형과 원형을 기하학적으로 연결해 배치할 것을 요구했다. 율리우스가 선호한 것은 이런 만화경 같은 도안이었다. 이 도안은 기본적으로 15세기 후반에 집중적인 관심을 끈,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티볼리 별장 같은 고대 로마 시대의 장식을 본 딴 것이다. 율리우스는 같은 해에 이미 다른 미술가들에게도 유사한 도안을 기초로 한 작품들을 주문했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핀투리치오로 최근 브라만테가 완공한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합창단석 부분의 천장 프레스코를 주문받았다. 또 한 사람은 바티칸 궁 안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서명의 방)의 천장을 프레스코 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교황은 이곳을 장차 자신의 서재로 바꿀 계획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마음에 드는 무늬와 인물 배열판을 짜내기 위해 소묘를 수없이 시도했고, 영감을 얻기 위해 핀투리치오에게도 도움을 청한 것 같다. 애주가이며, 도색 그림을 많이 그려 핀투리치오(부유한 화가)’로 더 잘 알려진 베르나르디노 디 베토(Bernardino di Betto)는 당시 로마의 프레스코 화가들 중에서 경륜이 가장 많은 화가로 보인다. 그는 54세까지 전 이탈리아를 누비며 수많은 성당을 장식했다. 시스티나 예배당 벽의 프레스코 작업에도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조수로 참가한 것 같다. 핀투리치오는 1508년까지 자신의 프레스코를 단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지만, 미켈란젤로가 찾아간 그해 초여름에 프레스코용 소묘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아주 크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요으로 그린 소묘들은 핀투리치오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합창단석 바로 위 천장용으로 그린 도안과 매우 흡사해 여러 가지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시도해 온 소묘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가장 큰 난제는, 교황의 계획대로12 사도를 그리면 천장에는 빈 공간이 별로 남지 않아 자신의 주 관심 대상인 인간 형체의 탐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기획에 날개 달린 천사와 여성 조각 형태의 기둥을 보탰다. 그래도 틀에 박힌 인물상들은 결국 기하학적인 장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카시나 전투>에 등장하는 강렬한 느낌의 상처를 뒤트는 누드와 크게 달랐다. 그뿐만 아니라 교황의 영묘용으로 조각하다 포기한 용트림하는 초인의 누드를 대체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했다. 미켈란젤로는 그다지 흥미가 나지 않는 이러한 도안과 마주치자 교황이 주문한 범위를 가능한 한 대폭 축소해 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때까지 미켈란젤로가 토해내는 온갖 불평을 듣는 데 이골이 난 교황은, 이 미술가가 어느 초여름 날에 또다시 나타나 새로운 이의를 제기할 때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거침없이 할 말을 쏟아내면서 교황이 제시한 도안대로 하면 결과는 코사 포베라(형편없는 것)’가 될 거라고 불평했다. 그의 주장에 율리우스는 반박하기보다는 동의한 것 같다. 미켈란젤로의 말에 따르면, 어깨만 한 번 들썩거리고는 프로그램을 독자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한다. “교황 성하는 새로운 주문을 내리셨다.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주문을.”

그러나 교황에게서 백지 위임장을 받았다는 미켈란젤로의 주장은 일단 의심의 여지가 있다. 아무리 상대가 미켈란젤로 같은 화려한 명성을 지닌 미술가라 할지라도 기독교에서 중요시하는 성당의 장식 작업을 몽땅 그냥 떠맡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매우 드문 일이다. 그처럼 중요한 장식 작업에는 거의 대부분 신학자들이 차출되어 그림 내용과 관련해 미술가들에게 일일이 조언을 해왔다. 라틴어와 신학에 무지한 화가들이 프레스코로 시스티나 예배당 벽에 모세와 예수의 일생을 박식하게 대비할 수 있을 만큼 신학적 소양을 겸비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에 새긴 비문은 사실 교황의 비서관 겸 신학자인 안드레아스 트라페준티우스가 손수 지은 것이다. 화가들은 트라페준티우스 외에도 새로 개관한 바티칸 도서관의 초대관장으로 플라티나라고 불리는 방대한 학식을 갖춘 바르톨로메오 사치에게서도 지시를 받았다.

만일 이 야심 찬 새 천장 도안에 자문하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알리도시 추기경 외에 역할을 맡을 만한 첫 번째 후보는 아우구스티누스 회의 선임 총장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에지디오 안토니니(Egidio Antonini)로 자신의 출생 지명을 딴 에지디오 다 비테르보(Egidio da Viterbo)로 더 잘 알려졌다. 39세의 에지디오는 이 일을 감당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최고 수준의 학자에 속해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 어, 유태어, 아랍어까지 능통했다. 그러나 명성의 실제 원천은 바로 불 같은 설교에 있었다. 제대로 빗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 검은 수염, 반짝이는 눈매와 창백한 피부의 에지디오는 검은 제복을 입고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청중을 매료시키는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웅변가였다. 설교의 탁월함은, 설교 시작 15분이면 영락없이 조는 것으로 유명한 율리우스마저 평소와 달리 에지디오가 열정적인 연설을 하는 2시간 내내 깨어있음으로써 입증되었다. 달변의 에지디오는 교황을 찬미하는 연설의 일인자였다. 율리우스는 다른 주문들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시스티나 천장을 자신의 치적을 미화하는 데 쓸 작정이었다. 따라서 구약성서 전반에서 자신에 대한 예언적 언급을 추출해낼 만한 능력을 가진 에지디오를 당연히 적임자로 천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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