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는 우울증과 자기연민. 부오나로티 가가 옛 귀족가문의 자손이라는 속물적 확신 밖에 없다시피 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부오나로티 가 사람들이 카노사 왕실의 직계 후손이라고 확신했다. 이 주장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카노사 가문은 대백작 부인인 토스카나의 마틸다를 조상들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워 왔다. 돈과 학식이 모두 풍부했던 마틸다는 이탈리아 어, 프랑스 어, 독일어에 능통했는데, 편지를 쓸 때에는 꼭 라틴어로 했고, 필사본의 수집가였으며, 중부 이탈리아 땅의 대부분을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마틸다는 꼽추인 고드프레이와 결혼해, 그가 살해될 때까지 레조넬에밀리아 부근의 성에서 살았다. 그리고 1115년 사망하면서 소유한 영지의 전부를 교황청으로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한 통의 편지를 마치 무슨 보물인 양 고이 간직한 모양이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당대에 실존했지만 인물의 비중으로 볼 때 마틸다보다 훨씬 쳐지는 카노사 백작이었다. 백작은 편지에서 아주 교묘한 논리로 자신과 미술가가 친족 관계로 얽혀 있음을 확신시킨 후, ‘미켈레 안젤로 보나로토 데 카노사(Michelle Angelo Bonaroto de Canoss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노년의 미켈란젤로는 부오나로티 가의 옛 영광을 되찾는 일이 남은 생애의 유일한 목표라고 큰소리쳤다. 설사 명문가 출신이라는 주장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가문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네 형제와 때로는 부친까지 합세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짓을 함으로써 계속 낭패를 겪었다. 그리고 정착 부친 로도비코는 미켈란젤로가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왜 하필이면 그까짓 미술가가 되겠다고 설쳐 집안 망신을 시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스카니오 콘디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자 부친과 숙부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며 사흘이 멀다 하고 두들겨 팼다고 한다. 예술의 위력과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미술을 비하하고, 집안에 미술가가 출현하는 것을 수치스러워 했다.
로도비코가 집안에서 미술가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한 것은 미술이 점잖은 사람한테 어울리는 직업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손으로 일하는 화가들은 장인 취급밖에 받지 못했고, 사회적 지위는 이발사나 장화 제작자 수준에 머물렀다. 그들 대부분은 하층민 집안 출신이었다. 안드레아 델 사르초는 이름에서 말해 주듯이 재단사의 자식이었고, 금세공사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의 아버지도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회적으로 하층민 취급을 받는 양계업자였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는 원래 소몰이꾼이었다. 치마부에가 처음 조토를 발견했을 때, 그 역시 소몰이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상에 나름대로 긍지를 가졌던 로도비코는 미술가들과 출신 집안의 이런 상관성 때문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같은 화려한 명성의 화가라도 자식을 견습생으로 문하에 보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사실 기를란다요는 15세기 최대의 벽화를 완성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광주리 둘레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 같은 허드렛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 1508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가문의 명예를 먹칠한 것은 정작 미켈란젤로가 아니라 동생들, 특히 31세와 29세의 부오나로토와 조반시모네였다. 로렌초 스트로치의 모포가게에서 줄곧 일해 온 두 동생의 낮은 사회적 지위가 미켈란젤로에게는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한때 동생들에게 모포가게를 차려 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또한 나중에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 미리 장사를 배워 보지 않겠느냐고 현명하게 충고까지 했다. 하지만 부오나로토와 조반시모네는 이보다 훨씬 더 야심찬 계획을 이미 세워 놓고 있었다. 그들은 형이 로마에서 일자리를 찾아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무더운 초여름 날씨 속에 조반시모네는 이런 기대를 품고 로마를 향해 남녘 길에 올랐다. 한 해 전에도 볼로냐로 형을 찾아가려고 했었지만, 이에 기겁한 미켈란젤로가 역병과 정치적 혼란 같은 완전히 거짓은 아닌 이유를 내세워 오는 것을 막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를 막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로마는 조반시모네에게 형이 단지 교황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출세 가능성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에게서 기대한 일자리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피렌체는 모직 산업으로 부를 누렸지만, 로마에는 그에 견줄만한 산업이 아직 없어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율리우스 2세 치하에서 로마는 비로소 미술가와 건축가를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하고 나섰지만, 조반시모네는 그 쪽 방면으로 경험은 고사하고 아예 재능조차 없었다. 야심은 있었지만 침착성이 부족한데다 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젊은이로 무슨 일을 하든지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미혼으로 아직 부친에게 빌붙어 살았지만, 살림에 한 푼이라도 보태기는커녕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아버지나 다른 형제들과 충돌을 일삼았다.
조반시모네의 로마 행은 결국 예상대로 허탕으로 끝났고, 형에게 골칫거리만 안겼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소묘와 그 외의 여러 가지 준비 관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미켈란젤로에게 조반시모네의 존재는 한마디로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조반시모네는 로마에 온 지 얼마 안돼 큰 병을 얻어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미켈란젤로는 동생이 역병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졌다. “제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면 조반시모네는 당장 피렌체로 돌아갈 테지요. 이곳의 공기는 그 애에게 정말 해롭습니다.”하고 미켈란젤로는 부친 로도비코에게 편지를 썼다. 로마의 나쁜 공기는 가족들을 로마에서 쫓아낼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는 핑계거리였다.
병상에서 일어난 조반시모네는 결국 미켈란젤로의 성화에 떠밀려 피렌체로 돌아갔다. 그런데 로마를 떠나자마자 이번에는 부오나로토가 로마에 가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부오나로토는 십 년 전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조각할 당시 로마를 이미 두 번이나 다녀갔다. 로마에서 본 것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그 후 몇 년 동안 로마에 정착할 마음으로 미켈란젤로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한 번도 그 일로 부오나로토를 격려한 적이 없다. 조반시몬에게 “뭘 알아내고 찾아봐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차갑게 대꾸했을 뿐이다.
부오나로토는 그래도 조반시모네보다는 좀 더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 애착이 갔다. 미켈란젤로는 다른 형제들에게도 자주 편지를 써 보냈는데, 주소 칸에 언제나 “부오나로토 디 로도비코 디 부오나로타 시모네”라고 당당하게 썼다. 로마에서 2~3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피렌체의 집으로 편지를 보냈고, 끝에는 항상 “조각가 미켈란젤로, 로마에서”라고 부기했다. 당시까지 이탈리아에서는 공식 우편제도가 없어 편지들은 모두 피렌체로 가는 친구나 매주 토요일 아침 로마를 떠나는 노새 수송대에 의해 개인적으로 배달되었다. 미켈란젤로 앞으로 오는 편지는 공방이 아니라 거래 은행인 발두치오로 배달되어 그곳에서 편지를 받아갔다. 미켈란젤로에 집안 소식은 매우 소중했다. 그래서 부오나로토에게 집안 사정을 좀 더 자주 써서 보내지 않는다고 야단치기도 했다. 부오나로토의 로마 행 의지는 피렌체에서 꼭두서니의 뿌리를 발효해 만든 주홍색 안료인 레드 레이크를 매번 1온스씩 사서 보내달라는 형의 설득으로 시들해졌다. 부오나로토는 모포가게의 꿈에 이어 로마 행 꿈까지도 접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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