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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_ 조수들 (2)

by TES leader 2021.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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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봄날, 피에로 로셀리가 천장에서 옛 석고를 뜯어내는 작업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프레스코 선발대가 루스티쿠치 광장의 공방에 도착했다. 그러나 27세로 화가 명단에 포함된 4명 중에서 최연소이기도 한 건축가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는 이미 로마에 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흉상과 닮았다고 해서 아리스토틸레라 불렸던 바스티아노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조카였는데,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켈란젤로에게 추천되었을 것이다. 어릴 적인 1494년 기를란다요가 죽는 바람에 더 이상 배울 기회를 놓친 바스티나오는 기를란다요의 아들인 리돌포 밑에서 회화를 배운 후에 미켈란젤로의 경쟁자 중 한 명인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 들어갔다.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의 페루지노 조수직은 단명으로 끝났다. 바스티아노는 1505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에서 페루지노와 함께 제단용 회화를 그리다가 우연히 그곳에 걸린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소묘를 보았다. 이 밑그림이 보여 주는 현란한 대가적 솜씨에 비교하면 페루지노의 그림은 밋밋하고 유행이 한물간 것 같이 보였다. 한때 페루지노의 그림은 천사 같은 분위기의 감미로운 멋이 감돈다는 평을 누렸다. 그러나 바스티나오는 <카시나 전투>의 격렬하고 근육이 불끈 솟은 인물들에게 회화의 미래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미켈란젤로의 과감하고 새로운 양식에 넋이 나간 바스티아노는 돌연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빠져 나와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을 모사하기 시작했다. 곧 피렌체에서 페루지노에게 쇄도하던 주문들이 증발했고, 일 년 만에 56세의 페루지노는 영영 피렌체를 등지고 말았다. 15세기를 풍미하던 감미롭고 우아한 미가 미켈란젤로가 창조한 헤라클레스 풍의 새로운 양식의 압도된 것이다.

페루지노 공방을 이탈한 바스티아노는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경쟁자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다. 바스티아노는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 공급할 대리석 석재를 캐고 석회를 불로 태우는 일을 도맡았던 건축가이자 동생인 조반 프란체스코와 함께 살면서 건축에 발을 들여놓았다. 애당초 동생의 가르침을 받았고, 아이러니하게도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작업 경쟁에서 줄리아노 아저씨를 물리친 도나토 브라만테를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다.

그러나 바스티아노는 브라만테와의 관계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서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그는 팀 내 다른 조수들과 달리 프레스코의 경험이 일천했지만, 건축가라는 점을 고려해 고용된 것으로 보인다. 건축가는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에 포함시키려고 한 환상적인 건축물의 도안과 관련해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줄리아노 부자르디니(Giuliano Bugiardini) 또한 기를란다요의 공방 출신이었다. 미켈란젤로와 동갑으로 기를란다요가 토르나부오니 성당을 프레스코할 때 조수로 참가할 만큼 나이가 꽤 되었다. 프란체스코 그라나치가 일종의 거세된 화가로 미켈란젤로에게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면, 부자르디니는 이를 넘어서 아예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기를란다요의 가르침을 계속 받았다면 부자르디니는 좀 더 나은 화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사리는 부자르디니를 얼치기 화가이자 바보스런 구석이 많은 인물로 묘사했고, 미켈란젤로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모델의 한쪽 눈을 관자놀이에 갖다 박아놓을 만큼 한심스러운 인물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런 부자르디니도 이후 몇 년간의 호시절에는 성당 제단에 들어갈 성 카타리나의 순교 장면 도안 때문에 꽤나 머리를 쥐어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장 프레스코에서 원근법적인 단축 기술을 이용해 인물을 그리는 방법을 미켈란젤로에게서 습득했을지라도, 실제로는 기술을 거의 써먹지 못했을 것이다.

기를란다요 공방 출신의 줄리아노 부자르디니 (Giuliano Bugiardini)

그라나치가 부자르디니를 미켈란젤로에게 추천한 것은 빼어난 예술적 재능보다 인격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바사리는 선척적으로 타고났다고 할 만큼 생활방식이 선량한 그라나치는 단순할 뿐 아니라 질투나 악의에서 해방된 인물이라고 평했다. 미켈란젤로는 심성이 어진 그라나치를 베아토(축복받은)’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별명은 훨씬 재주가 뛰어난(그러나 그처럼 선량해 베아토 안젤리코로 통했던) 토스카나 출신의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것이기도 했다.

42세의 아뇰로 디 돈니노(Agnolo di Donnino)는 코시모 로셀리의 공방 출신 화가였다. 아뇰로는 로셀리가 68세를 일기로 죽기 한두 해 전까지 절친한 사이였다. 조수들 중 가장 연장자로 14세이던 1480년부터 로셀리에게서 일찌감치 가르침을 받았고, 조수로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작업에까지 참가했다. 또한 로마에 오기 얼마 전까지 피렌체의 기아 보육원인 산 보니파치오에서 여러 점의 프레스코를 그리는 등 중간 크기의 프레스코 경험도 이미 충분히 쌓았다. 그러나 부지런하다 못해 항상 자신이 그린 것을 뜯어 괴는 데 매달린 나머지 정작 제대로 완성한 회화 작품은 하나도 남기지 못했고, 그 결과 궁핍에 시달리다 죽었다. 또한 일 마치에레(카드 딜러)’로도 통했는데, 이 별명은 왜 일을 앞에 두고 미적거리다가 무일푼으로 죽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이를 통해 아뇰로도 유희를 즐긴 그라나치나 상냥한 부자르디니처럼 사교적이고 파티를 좋아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라나치가 편지에서 언급한 네 번째 조수는 야코포 디 산드로(Jacopo di Sandro)로 이따금 야코포 델 테데스코(Jacopo del Tedesco)독일인야코포로 불리기도 했다. 부친은 산드로 디 체셀로라는 이탈리아 식 이름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나, 몸에는 여전히 독일인의 피가 흘렀던 모양이다. 야코포도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속했다. 초기 경력에서는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으나, 그래도 최소한 10년 동안은 화가로 적극 활약했다. 그라나치는 야코포의 신상에 대해서는 단지 이름만 언급하고 넘어갔는데, 그 역시 미켈란젤로가 잘 알던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조수들과 달리 로마에 가서 예배당 조수직을 맡는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우려했다. “야코포는 급료가 얼마인지 확실히 알고 싶어 했다.”라고 그라나치는 기록했다.

이들 네 명은20 두카트라는 목돈을 받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받게 될 20 두카트 중 10 두카트는 로마에 왔다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조수직을 중도에 그만둘 때 위약금으로 물리기 위해 따로 떼어놓았다. 미켈란젤로가 볼로냐에서 조수 라포 단토니오에게 준 급료는 매달8 두카트였다.이로 미루어 보면 20 두카트는 능력을 인정받은 미술가가 두세 달이면 벌어들일 수 있는 금액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급료를 이렇게 적게 내놓은 것을 보면, 미켈란젤로는 애당초부터 적어도 몇 년이 소요될 작업에 그들을 풀타임으로 고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단기간만 고용해서 작업에 관한 구체적인 자문을 받아 일을 시작한 후에 얼마 안 가서 보다 싼 노동력으로 대체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야코포 델 테데스코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피렌체를 떠나면 시스티나 예배당 건 외의 다른 일을 수주할 기회를 놓칠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새로 자리를 잡아야 하는 데다 말단 조수직이나 떠맡아야 하는 등 일정 수준의 자기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형편없는 보수에다 작업 기간마저 짧은 이 일을 위해.

그러나 곧 야코포는 이미 받아놓은 주문까지 모두 포기했다. 훗날 야코포와 미켈란젤로 둘 다 그렇게 한 것을 평생 후회할 테지만, 그리고 1508년 여름, 나머지 조수들도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프란체스코 그라나치도 부리나케 뒤따라 와 미켈란젤로의 로마에서의 작업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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