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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_ 심연의 샘(1)

by TES leader 2021.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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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붉은 초크를 사용해 그린 <리비안 무녀 The Libyan sibyl> 스케치

프레스코는 여러 가지 복잡한 준비 단계가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소묘는 도안을 잡은 다음, 벽이나 천장에 옮기는 과정에서 밑그림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붓을 대기 전에 수백 장의 스케치를 그려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행동과 다양한 장면들을 다룬 포괄적인 구도를 짜려고 했다. 각 인물의 손의 위치와 얼굴 표정까지 포함해, 수없이 다룬 인물들의 자세는 모두 대여섯 번에 걸친 습작 끝에 완성한 것들이다. 따라서 프라스코 전 과정을 통해 그린 소묘만 해도 1천 장이 넘었다. 조그마한 크기로 대충 그려 프리모 펜시에리(첫 번째 생각)’라고 명명된 간결한 스케치로부터 실물보다 더 크고 아주 상세하게 묘사된 수십 장의 밑그림에 이르기까지 소묘의 범위는 아주 광범위했다.

미켈란젤로가 천장용 밑그림으로 그린 소묘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모두 70장도 안 되지만, 모두 실버 포인트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그린 것들이다. 실버 포인트로 소묘하는 방식은 기를란다요에게서 터득했다. 이 방식은 사람들이 고기 살만 뜯어먹고 남긴 뼈다귀를 가루로 빻아 흰 수은을 넣고 저은 다음, 접착제를 첨가해 뭉친 것을 종이 표면에 엷게 바르고 나서 첨필(점토나 왁스판 위에 글자를 쓸 수 있도록 고안된 딱딱한 침 모양의 필기구)로 그리는 것이다. 종이의 vaus을 첨필로 긁어 나가면 매우 작은 은알갱이들이 생기는데, 이것들은 재빨리 산화하면서 아름다운 회색 선을 남긴다. 이 방식은 정밀하나 매우 더디어, 미켈란젤로는 스케치에 속도를 내기 위해 목탄과 비스터를 사용했다. 비스터란 갈색 안료로 그을음을 모아 만든 것인데, 화가들은 붉은색 초크나 적철석을 사용했는데, 이 새로운 그림 수단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0년 전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사도들에게 입힐 색깔을 연구하던 중 처음 개발해 사용한 것이다. 이 색깔은 파삭파삭한 느낌을 별로 주지 않지만,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정교하게 표현해야 하는 소묘에는 안성맞춤이다. 또한 표현 효과가 대단해, 레오나르도는 사도들의 얼굴을 그릴 때에 이 색깔로 근육의 결절을 해부학적으로 실감 나게 그렸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피에로 로셀리가 천장 프레스코를 위한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일 때, 스케치들 중 첫 번째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안에 4개월 동안 매달린 끝에 9월 말 마침내 첫 단계 소묘를 끝냈다. 이 때 걸린 시간은 훨씬 소규모인 <카시나 전투>를 그릴 때 걸린 것과 같지만, 실제로 그린 소묘 장면은 불과 몇 개에 그쳤다. 시스티나 작업을 맡은 후에 미켈란젤로에게는 스케치와 밑그림을 그때그때 필요할 때 그리는, 그것도 마지막 순간에 그리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천장의 한 부분에 들어갈 도안과 프레스코를 일괄 작업으로 끝내면, 새로 다시 소묘 판으로 돌아가 말 그대로 다음 부분을 위한 도안 스케치와 밑그림 제작에 들어갔다.

10월 첫째 주에 접어들자 천장을 프레스코 할 수 있는 준비가 비로소 다 갖추어졌다. 이즈음 피렌체 출신으로 로마에서 일하던 도메니코 마니니라는 밧줄 업자가두카트를 받고 밧줄과 캔버스를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가져왔다. 비계 밑에 캔버스를 매단 것은 물감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로써 예배당 마루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 작업 진행 과정의 노출을 차단하는 기능을 기대했던 것 같다. 전에 <다비드> 상을 두오모(대성당) 부근의 공방 밖으로 옮기다가 일부 구경꾼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한 경험 때문에, 미켈란젤로로서는 당연히 여론의 촉각이 미치는 것이 두려웠다. 1505 <카시나 전투>의 밑그림을 산토노프리오에 있는 작업실에서 비밀리에 그렸을 때에도 가장 친한 친구와 조수들을 빼고는 그 누구에게도 공방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었다. 추측컨대 루스티쿠치 광장 뒤편의 공방에서도 그와 같은 방침이 정해져 조수들과 교황, 이단설 심문관 이외에는 그 누구도 미켈란젤로의 소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를 로마인들에게 미스터리로 남겨두었다가 자신에게 유리할 때 공개하기로 했다.

미켈란젤로는 매일 조수들과 함께 12미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창틀 위에 발을 내디딘 후, 창틀 위에 설치한 여러 개의 비계다리 중에서 하나를 골라 다리의 계단식 상판 중 제일 낮은 곳 위에 올라가서 작업을 시작했다. 비계의 맨 아래층 계단에서 꼭대기 층 계단까지 다 올라가면6미터가량 위로 올라가는 셈이 되었다. 추락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비계에 난간이 설치되고, 캔버스가 비계에서 18미터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선 기능을 감당했을 것이다. 비계 위에는 여기저기 연장들이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조명시설로는 창문 외에 피에로 로셀리 팀 인부들이 밤늦게까지 일할 때 사용한 횃불이 있었다. 이제 예배당 천장 위에 광범위하게 펼쳐진 회백색 공간은 미술가들이 서 있는 지점에서 불과 수십 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공에서 붓이 닿기만을 기다리며 그들을 향해 몸을 굽혔다.

하루 일과는 언제나 인토나코를 천장에 바르는 것으로 시작했다. 석고를 섞는 따위의 힘든 일은 로셀리 팀원의 몫이었던 것 같다. 물론 화가들도 석고를 만들어 바르는 법을 이미 도제 시설에 배워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대부분 무라토레(전문적인 미장이)가 맡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석고 만드는 일을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해 꺼렸기 때문이다. 생석회는 부식력이 무척 강해 시신에 뿌리면 부패가 빨리 일어나 교회 마당 주변의 악취를 줄이는 데 이용했는데, 불이 꺼지면 산화칼슘이 팽창하다가 분해되면서 엄청난 열을 뿜어내 위험했다. 따라서 만일 생석회가 제대로 꺼지지 않으면 강한 부식성 때문에 프레스코뿐 아니라 천장의 석조 구조물까지 손상을 입어 석고 만드는 일을 여간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산화수소 칼슘이 형성되면 이 일은 단순히 힘든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응어리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걱으로 계속해서 혼합물을 저어주어야 반죽 혹은 페티가 제대로 형성된다. 반죽은 모래와 섞어 갠 뒤, 농도가 연고처럼 될 때까지 계속 저어야 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저어주어야 석고가 건조될 때 균열이나 물집이 생기지 않는다.

미장이는 인토나코를 미술가가 미리 정해 놓은 면에 발랐다. 이것을 반듯하게 고른 다음 천으로 살짝 닦아냈는데, 이따금 아마포를 한 움큼 싼 것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흙손 흔적을 지울 수 있을 뿐 아니라 표면이 알맞게 거칠어져 착색이 용이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모래알을 제거하기 위해 비단 손수건을 사용해 표면을 좀 더 부드럽게 닦아냈다. 인토나코를 바르고 한두 시간(밑그림을 석고판에 옮겨 붙이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지나면 인토나코에 외피가 형성되어 비로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 일을 시작한 후에 얼마 동안 조수들에게 일을 분담시키는 십장 노릇까지 한 것 같다. 비계 위에는 항상 5~6명이 올라가 작업했는데 그중 두 명은 안료를 섞고, 나머지 일부는 밑그림을 펴는 작업을 하고, 또 다른 일부는 붓을 손에 쥔 채 언제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세로 대기했다. 비계는 그들이 한꺼번에 작업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고 편리했다. 그리고 천장 전면에 걸쳐 천장에서 2미터가량 아래로 떨어져 있어 직립한 채로 작업할 수 있었다. 인토나코를 바르거나 물감을 칠할 때는 상체를 약간 뒤로 젖히고 팔을 위로 뻗기만 하면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결코 비계에 등을 대고 누운 자세로 천장을 프레스코 하지는 않았다. 그런 모습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사과나무 밑에 앉은 모습만큼이나 대중들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이 오해는 노레차 주교였던 파올로 조비도(Paolo Giovio) 1527년쯤 쓴 <미카엘리스 안젤리 비타 Michaelis Angeli vita>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된 미켈란젤로 전기에 나오는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조비오는 비계 위에 서 있는 미켈란젤로의 자세를 묘사하면서 레수피누스(resupinus)’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의 본뜻은 뒤로 구부려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주 등을 대고로 번역되었다. 실제로 그런 열악한 조건 아래서 일하는 미켈란젤로와 조수들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결코 수비지 않다. 로셀리의 팀원들이 좁은 틈새를 포복하고 다니거나 비계에 등을 대고 일자로 누워 1천 평방미터의 석고를 제거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더 어렵다. 물론 프레스코 작업 과정에서 미켈란젤로는 숱한 장애에 직면했지만 비계 때문은 아니었다.

시스티나 천장에 대해 미켈란젤로 팀이 택한 프레스코 전개 방식은 대체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정문 입구 쪽에서 예배당 서반부의 안쪽, 다시 말해 교황 미사 회원들의 전용석이기도 한 지성소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택한 첫 프레스코 지점은 정문 바로 위의 천장 부분이 아니라 정문에서 서쪽 안으로 약 5미터 들어간 지점, 다시 말해 정문에서 두 번째 창문 위의 천장 부분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곳에 노아의 홍수를 묘사한 창세기 6장부터 8장까지의 말세적인 에피소드를 그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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