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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_ 조수들 (1)

by TES leader 2021.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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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년5월 말 피렌체 시의 방벽 바로 바깥에 소재한 산 주스토 알레 무라 수도원의 한 탁발 수사가 미켈란젤로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야코포 디 프란체스코라는 1367년에 설립된 제수아티 교단(예수회와 혼동하지 말 것) 소속 수사였다. 이곳은 피렌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 중 하나였는데, 특히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정원은 페루지노, 기를란다요의 그림과 함께 피렌체의 자랑거리였다. 수도원은 또한 일벌들의 집이기도 했다. 육체노동을 꺼리는 도미니크 회 수사들과 달리 제수아티 교회 수사들은 노동에 헌신적이었다. 수도승들은 부지런히 향수를 증류하고 의약품을 준비했다. 그리고 예배당 위에 있는 한 작업실의 용광로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조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아주 아름다운데다 고품질이어서 전 이탈리아 교회의 주문이 쇄도했다.

 

그러나 산 주스토 알레 무라 수도원의 수사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니라 바로 안료였다. 특히 파란색 안료는 최고로 손꼽혔으며 피렌체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 피렌체 화가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녹청색과 군청색 안료를 찾아 산 주스토 알레 무라 수도원으로 몰려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당시 수도원을 찾아온 수많은 화가들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1481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마기의 찬미 Adoration of the Magi> 계약서는 제수아티 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생산되는 안료는 일절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미켈란젤로는 진작부터 야코포 수사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것 같다. 몇 년 전 아뇰로 도니의 주문으로 <성가족>을 그릴 때에 녹청색으로 하늘을, 환한 군청색으로 성모 마리아의 의상을 그린 걸 보면 제수아티 수사들과 거래한 것이 분명하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야코포 수사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다른 사람들을 시켜 그려야 할 것이 좀 있는데∙∙∙하고 운을 뗀 다음, “양질의 녹청색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하고 요청했다.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그런데 다른 사람을 시켜 그려야 할 것이 좀 있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미켈란젤로는 직접 천장을 프레스코하기보다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야코포에게 보낸 편지는 이 단계에서 천장 작업의 상당 부분을 조수와 수습생에게 떠넘길 생각이었음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영묘 조각 작업에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로마 귀환 직후 자신 앞으로 쓴 비망록에서 교황에게서 4백 두카트를 당장 지불받고, 다음 달부터 매달 1백 두카트를 정기적으로 받을 계획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돈을 예배당 천장 프레스코 건이 아닌 교황의 영묘 조각 건으로 받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놀라운 사실은 알리도시 추기경과 천장 프레스코 계약서를 맺을 때에도 여전히 웅대한 영묘 조각 작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묘 조각을 우선으로 염두에 두었던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귀환할 때에 볼로냐에서 동상 주물을 도운 조각가 피에트로 우르바노(Pietro Urbano)를 데려왔다.

 

비망록을 보면, 미켈란젤로는 피레네에서도 조수들이 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이들에게 천장 작업의 대부분을 맡길 생각이었다. 설사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한다 하더라도, 프레스코는 속성상 동시 집단 작업을 요하기 때문에 조수들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난 20년 가까이 프레스코의 경험이 전혀 없어서 프레스코의 모든 과정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조수들의 조력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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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고독한 미술가인 미켈란젤로는 볼로냐에서 있었던 라포와의 일화 이후로 더욱 심하게 조수들을 불신했다. 그래서 조수 채용 문제를 피렌체 화가이면서 가장 절친한 친구인 프란체스코 그라나치(Francesco Granacci)에게 맡겼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문제를 상의하거나 미술과 관련된 지식을 공유할 때는 꼭 그라나치를 찾았다.”라고 바사리는 밝혔다. 미켈란젤로는 어릴 적에 그라나치와 산타 크로체 부근의 벤티 코르디 거리(Via dei Benticcordi)에서 어울려 지냈고, 기를란다요 공방과 산 마르코 정원 학교에서 함께 수학했다. 연장자였던 그라나치가 기를란다요 밑에서 수습 과정을 먼저 끝냈는데, 그의 권고로 미켈란젤로도 기를란다요 공방에 합류했다. 따라서 미켈란젤로가 경력을 쌓는 데는 그라나치의 힘이 컸다.

피렌체 화가이면서 미켈란젤로에 가장 절친한 친구인 프란체스코  그라나치 (Francesco Granacci)

그라치는 한때 기를란다요의 제주들 중에서 장래가 가장 촉망되는 인물이었으나, 39세가 다 되도록 주위의 기대에 못 미쳤다. 미켈란젤로가 잇달아 대작을 터뜨리면서 새로운 조각의 가능성을 열어나갈 때, 그라나치는 작품성은 뛰어나지만 활기가 없는 패널화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작품이 기를란다요의 분위기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결국 그라나치는 연극 무대 장면,개선행진 아치, 선박의 깃발, 그리고 교회와 기사단의 깃발 같은 소재들의 전문 화가가 되었다.

 

그라나치가 주목받지 못한 데에는 느긋하고 야심이 없는 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성격 탓도 컸다.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근심거리라면 거의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유희만 추구하는 쾌활한 친구였을 뿐이다.”하고 바사리는 전했다. 안락한 생활에 대한 집착고 ㅏ육체적 고통에 대한 혐오감은 템페라 회화나 유화를 선호한 반면, 중노동인 프레스코를 꺼린 태도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라나치의 명예욕 결핍증은 태평스러운 심리 상태와 함께 미켈란젤로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것으로 비쳤다.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브라만테 같은 자신들의 재능이 출중하고 야심 있는 경쟁자들에게 위협을 느껴왔다. 따라서 자신을 최고라고 인정하고, 또한 바사리의 말을 빌리자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중하고 겸손한 태도로 이 위대한 인물을 열렬히 따르는’ 그라나치에게서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충성스럽고 흔들리지 않는 성원이야말로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작업을 실천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그라나치가 붓을 들고 프레스코를 직접 그리는 따위의 도움은 원치 않았다. 그런 일이라면 다른 조수가 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보다는 팀 내 2인자이자 신뢰할 만한 참모로서 조수들의 고용과 급료 지급에서 로셀리를 감독하고, 안료와 다른 기타 필수 재료들을 조달하는 일까지 도맡아 처리해 주길 바랬다.

 

친구를 돕는 일에 나선 그라나치는 우선 자신의 게으름부터 말끔히 씻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귀환하자마자 그라나치에게서 편지로 예배당 작업에 참가할 4명의 화가 명단을 전달받았다.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 줄리아노 부자르디니, 아뇰로 디 돈니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코포 델 테데스코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한 세대 이전에 결성되었던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팀에 견줄만한 능력을 가진 화가들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유능하고 경험 있는 화가들임에는 틀림없었다. 네 사람 모두 한결같이 피렌체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공방이나 코시모 로셀리 공방 출신이며, 그것은 곧 프라스코 미술을 지속적으로 연마했음을 뜻했다. 그들 대부분은 토르나부오니 성당의 벽화를 그려낸 베테랑들이며 미켈란젤로에게 부족한 프레스코 경험을 모두 최근에 쌓았다. 여기에다 그들과 이전부터 트고 지내온 사이라는 사실까지 보태어져 미켈란젤로는 더욱 안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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