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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로마 대전차 경기장의 기원

by TES leader 2020.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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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차 경기장 (치르코 마씨모 Circus Maximus)

콜로세움을 뒤로하고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 사이 산 그레고리오 가도를 따라 700m쯤 가면, 오른쪽에 기다란 트랙 모양의 벌판이 나온다. 테베레 강변 진실의 입 광장에서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 벌판이 대전차 경기장 자리다. 로마 시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공연장인 이 경기장은 아벤티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 골짜기를 개간하여 생겨난 개활지이다.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나 산책 나온 사람들밖에 없는 한산하고 울타리도 없는 이 넓은 벌판이 한때 20~30만 명의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곳이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창건 신화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로 대표되는 두 언덕 주민들의 다툼으로 아벤티노 언덕이 로마 시 역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버리고 로마 광장이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면서 이 골짜기 평원의 운명은 정치와 무관한 놀이문화 공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창건 신화는 이미 로물루스 시대에 이 자리에서 경마와 육상 경기가 치러졌다고 한다. 로마를 건국한 후 주변의 사빈 종족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로물루스는 대외관계를 개선하는 방편으로 로마 청년들과 사빈 족 처녀들을 강제로 결혼시키는 계략을 꾸몄다. 그는 사빈 족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곳에서 해신 축제와 경마, 육상경기를 치렀고, 축제 마지막 날 로마 청년들이 축제에 참가한 처녀들을 기습적으로 납치해 겁탈한 후 다음날 결혼식을 치르게 해 종족 간의 강제적 융합을 이뤘다. 전설상의 이 사건을 ‘사빈 족 여인의 약탈’이라 하는데,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회랑에 서 있는 쟘볼로냐의 조각상 <사빈 족 여인의 약탈>도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자연스러운 종족 혼합이 후대 로마 인들에 의해 약탈 사건으로 꾸며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 골짜기도 후대에 와서 경연 장소로 변모한 듯하다. 전설은 에트루리아 출신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왕이 무르키아 계곡을 개간한 후 상설 전차 경기장을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전차 경주가 검투 시합과 마찬가지로 에트루리아를 통해 로마에 유입 된 점으로 비추어보아, 에트루리아 문화가 맹위를 떨친 이 시기에 전차 경주도 시작된 것 같다. 두 언덕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구경하기 위해 걸터앉기 좋은 경사면이 있었고, 개간한 계곡이 경주로로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관중석이나 특별한 경기 시설, 장식도 없었던 이 경기장은 로마가 라티움 지방을 완전히 장악한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도시 규모에 걸맞은 시설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329년 북서쪽 끝에 목조 카르케레스carceres(말과 기수가 대기하는 출발선 구조물)를 설치했고, 기원전 174년 처음으로 벽 구조물을 설치했다. 서기 36년 화재 이후에는 카 르케 레스를 대리석으로 재건했고, 반환점(metae)에 원뿔형 도금 청동상을 설치했다. 현재 아라 마씨마 디 에르콜레 길이 카 르케 레스 자리다. 기원전 196년에는 남동쪽 끝에 개선문이 들어섰는데, 서기 80~81년 사이에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기념하는 개선으로 교체되었다. 한편 기원전 10년 아우구스투스는 경기장 중앙에 헬리오폴리스에서 옮겨온 높이 24m인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를 세웠고, 콘스탄티우스 Constantius 2세(338~361년)는 357년에 테베에서 가져온 높이 32.5m인 투트모시스 3세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이 두 번째 오벨리스크가 세워짐으로써, 경기장의 중앙분리대 영역이 확실해졌다. 분리대 밖에 길이가 340m 정도인 벽이 있어 그 바깥 트랙을 마차가 돌았는데, 원래의 트랙은 현재의 지면보다 10m쯤 아래에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 쪽에 위치한 거대한 황실석(pulvinar)은 언덕 위 황궁과 연결되어 있었고, 일반 관중석은 3층 구조로 2개의 입구(Porta Pompae, Porta Triumphalis)를 통해 입장하게 되어 있었다.


이 경기장은 점차 확장되어, 가장 커졌을 때 길이와 폭이 각각 600m, 200m에 달했으며, 64년 화재 이후에는 피해 부분을 재건한 네로가 관중석을 25만 명 규모로 확장되었고, 도미티아누스 때 다시 화재를 당해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가 완전히 개축하면서 5,000석을 더 확장하였다. 그 후 3세기 초에 카라칼라 황제(198~217년)가 또 한 차례 확장하였으며,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화재를 입은 경기장을 복원하였는데, 4세기 구역 목록에는 관중석 규모가 38만 5,000명으로 적혀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검투사 시합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경마 경기는 그리스의 경마 경기가 에트루리아를 거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모태가 되는 그리스의 경마와 로마의 경마는 출발선과 반환점이 같다는 점을 빼곤 철저하게 다른 방식이었다. 그리스의 경마는 참가자들이 중심이 되는 행사라 관중석이 없고 참가 마차들의 수가 40대 이상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이에 비해 로마의 경마는 관중이 중심이 되는 행사라 관중의 즐거움을 높이기 위해 관중석이 중요시되었고 참가 마차 수도 가장 많을 때가 12대였다. 또한 분리대가 없는 그리스의 경기장에서는 출발선에 늘어선 마차들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상관없이 최단거리 코스를 질주하여 반환점의 오른쪽으로 도는 방식이었던 반면, 중앙분리대(spina)가 있는 로마의 경기장에서는 분리대의 오른쪽을 따라 도는 방식으로 경주를 했다.


거리상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출발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형이었는데, 오늘날 육상 트랙 출발선과 반대로 곡선을 그렸다. 그 이유는 한쪽 트랙이 아니라 건물의 한쪽 면 전체가 출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출발한 마차들이 한곳으로 몰려들어 엉킬 수 있었으므로 대안으로 나온 것이 카씨오도로스가 고안했다는 선이다. 마차들은 이 선을 통과할 때까지 의무적으로 줄 쳐진 선을 따라 나아간 다음 본격적으로 경주에 임하게 되어 엉킬 여지가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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