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나보나 광장 지하의 도미티아누스 운동장이 제정 시대에 설립된 육상, 체조 전용 경기장이고, 콜로세움도 검투사 전용 경기장으로 세워진 건축물인 반면, 역사가 훨씬 오래된 대전차 경기장은 경마 외에도 검투사 시합, 모의 해전,야수 사냥, 연극을 포함한 모든 경연이 행해졌던, 어떤 경우에는 여러 가지 경연이 동시에 진행되기도 했던 종합 경기장이었다. 물론 극장이나 운동장 같은 전용 건물들이 세워지면서부터는 경마 전용 경기장으로 전환되었다. 국고와 기부금을 재원으로 삼아 시 정부가 연초에 공표한 일정에 따라 청 백홍 록의개 팀이 시합을 치렀는데, 금속 투구와 짧은 투니카 tunica복장에 소속 팀 색깔의 유니폼을 걸친 기수가 마차가 뒤집힐 경우 줄을 자르기 위한 주머니칼과 채찍만 소지하고, 마차 위에서 마차를 몰았다.
출발 신호는 경기를 주최한 정무관이 풀 먹인 흰 손수건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2두 마차에서두마차에서 10두 마차까지 다양한 시합을 했으나, 4두 마차 시합이 일반적이었다. 트랙을 보통 일곱 바퀴 돌게 되어 있었는데, 모래 경기장을 둘로 나눈 중앙분리대에 회전 수를 표시하는 도구가 있었다. 이 도구에는 7개의 타원형 목각이 걸려 있어 한 바퀴 돌 때마다 하나씩 내리는 방식으로 회전 수를 표시했는데, 기원전 33년 아그리파가 7개의 청동 돌고래 판을 설치하여 한 마리씩 연못에
던졌다.
전차 경주는 오늘날의 자동차 경주 이상으로 위험했지만, 관중들은 기수들이 큰 위험에 처할수록 더 흥분했고, 기수들에게는 그만한 대가가 주어졌다. 기수들이 터득해야 할 가장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기술은 반환점을 되도록 좁게 도는 것이었다. 벽에 부딪히지 않고 마차가 뒤집히지도 않으면서 빨리 돌기 위해서는 기수의 기술도 중요했지만, 반환점을 돌 때 생기는 원심력을 말들이 얼마나 잘 견뎌내느냐도 중요했다. 커브를 돌 때 네 마리의 말들 중 가장 힘이 드는 말은 당연히 바깥쪽, 즉 오른쪽에 위치한 말이었으므로 가장 뛰어난 말을 오른쪽에 배치하는데, 이 주장 말이 경주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차 경주의 스타였다.
물론 뛰어난 기수들은 엄청난 인기에 막대한 상금을 받았고, 명마들의 몸값은 기수들보다도 더 높았다. 오늘날 축구 시장에서 유명 선수가 이적하듯이 당시 명기수와 명마는 고액의 현금을 받고 이적하기도 했다.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세상에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신도 유명하지만 자기보다 더 유명한 명마 안드레모네스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했다. 이렇게 유명한 시인조차 시샘을 느낄 정도로 경마의 열기와 인기가 대단해서 기수는 미천한 신분의 직업이었는데도 경마에 직접 참가하는 고위층 인물들이 없지 않았다. 특히 과식 욕이 강했던 네로는 직접 마차를 몰기 위해 경마장에 내려가기도 했다.
각 팀에는 열성 팬들이 있었고, 오늘날의 마권처럼 경마 도박도 성행했다. 카리 굴라가 승부를 조작해 돈벌이를 한 것은 물론이고 승부 알아맞히기에 전 재산을 날린 사례로 드물지 않았다. 또한 주최 측이 관중석에 선물이나 동전을 뿌리는 선심성 이벤트(misslia)도 흔했고, 심지어 복권 사업까지 활발해 집이나 농장, 선박이 경품으로 등장할 정도였다.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전차 경기장은 이성 간의 교제 장소로 으뜸이어서 오비디우스는 <연애술>에서 경마장을 최적의 연애 장소로 추천할 정도였다. 경마장 주변에는 선술집과 유곽들이 늘어서 있었고, 64년 화재가 발생한 것도 이 선술집 거리에서였는데, 현재 산타나 스타시아 Sant’교회 아래에 선술집과 유곽 흔적들이 남아 있다.
전차 경주에서 정작 위험한 상황은 마차들 사이의 충돌이나 마차 전복이 아니라 열성 팬들 사이의 충돌, 특히 내기에 돈을 걸었다가 잃은 편이 흥분하는 경우였다. 특히 자제력이 약한 황제가 그런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최악의 상황이었다. 비텔리우스 황제(69년)는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눌러버린 청색 팀 기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고, 카라칼라는 평소 미워하던 녹색 팀을 트집 잡아 참수해버렸다. 일반 관중들이라고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높은 관중석이 자주 무너져 피해가 컸다고 하는데, 흥분한 관중들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 목조 관중석에서 주로 이런 사고가 일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우구스투스 때 발생한 관중석 붕괴 사고 후 목조 구조물을 대리석으로 교체하였지만,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지 안토니누스 피우스 Antonius년) 때 관중석 붕괴 사고로 1,112명이 죽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는 자그마치 1만 3,0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476년 로마가 몰락하자마자 대전차 경기장이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제국의 몰락으로 지배 세력이 바뀌고 서서히 도시 문화가 붕괴되어 가기는 했지만, 바로 모든 게 혼돈 상태로 빠진 건 아니었다. 549년 동 고트족의 왕 토틸라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이후 비잔틴 제국의 재정복 전쟁 시대에 비로소 황폐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관중석을 지탱하던 구조물은 범죄 소굴로 이용되어 교회에 이에 대하여 경고하기도 했다. 파편이 되어 오랫동안 흙 속에 묻혀 있던 투트모시스 3세의 오벨리스크와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는 식스투스 5세 교화 시대인 1588~1589년 각각 라테란 궁전 앞 산 죠반니 광장과 포폴로 광장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원전 366년부터 유피테르 기념 제전으로 시작된 루디 로마니와 기원전 220년부터 100년 한 번식 열린 루디 스콜라리 같이 특별히 규모가 큰 축제뿐만 아니라 갖가지 이름을 붙은 축제들로 전성기에는 연중 축제일이 최소한 182일 이상이 된 로마 시에서 다양한 공연들은 수많은 축제의 내용을 알차게 채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전차 경주는 비중이 가장 크고 자주 행해진 프로그램이었으며, 관중이 가장 많이 몰리는 인기 종목이었다. 전차 경주의 인기는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전차 경기장 외에도 로마에 들어선 여러 개의 전차 경기장에서 잘 드러난다.
기원전 221년, 테베레 강변에 세워진 플라미 니우스 전차 경기장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해체되어 흔적이 전혀 없고, 네로 전차 경기장은 바티칸 아그리피나 별장 정원에 들어선 사설 경기장으로 이곳에서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경기장은 현재의 베드로 대교회와 베드로 광장에 왼쪽 열주 회장 지하에 있었는데, 2세기 중반경 그 기능이 멈춰 인근 무덤 지대에 포함되었다. 한편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교회 왼쪽 박물관 안뜰에는 아쿠아 펠리체 고가 수로를 한쪽 담장으로 한 바리아누스 전차 경기장의 잔해가 일부 남아 있다. 바리아누스 가문 별장 안에 위치한 이 경기장은 교회 오른쪽의 카스트렌세 원형경기장과 함께 황실 별장에 속한 공연장이었다.
이상의 전차 경기장들이 흔적만 남아 있거나 발굴을 통해 확인된 반면 아피아 가도 상의 막센티우스 전차경기장(Ciro di Massenzio)은 현존하는 전차 경기장 유적 중 가장 보존이 잘된 경기장이다. 지하묘지로 유명한 세바스티아누는 교회로부터 약 300M 외곽에 위치한 이 전차 경기장은 장축이512m에 폭이 81~85m 대전차 경기장의 절반 규모이며, 중앙분리대는 337m 길이에 폭이 7m이다. 중앙분리대는 석회석 구조물의 겉면을 대리석으로 덮었으며, 분수와 석상들이 분리대 위를 장식하였다. 분리대 한가운데에는 현재 나보나 광장에 있는 4대 강 분수 위에 올려져 있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 정문 쪽에는 12열의 전차 출발 대기선이 칸막이로 나눠져 있었으며, 양옆에 16m 이상 되는 2개의 탑이 있었고, 그 사이를 연결한 대기선 위 테라스에 경기를 주관하는 정무관들의 좌석이 있었다. 경주로는 약간 경사가 졌고, 반환 지점에 개선문이 있었다. 북쪽 관중석에 위치한 귀빈석은 바로 옆에 있는 막센티우스 별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남쪽 관중석에는 심판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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