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나 광장의 기념물
도미티아누스 운동장 자리 위에 생긴 공터가 나보나 광장이란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운동장의 전력과 무관하지 않다. 중세 로마 인들은 이 공터를 캄푸스 아고니스 불렀는데, 그리스어 아곤 Agon은 운동경기, 노래, 시 등의 경언(gara)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 말이 변형되어 나고네 Nagone, 나오네 Naone, 나보나 Navona로 바뀐 것이다. 운동경기나 놀이 공간으로서의 이 운동장은 전설과 함께 살아남아 중세 시대에 기름을 바른 나무를 세워놓고 기어오르는 놀이가 유행했고, 8월에 귀족 복장을 한 팀과 사제 복장을 한 팀이 경연을 벌였으며, 트로네오 torneo(마상 창 시합)가 열리기도 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군주의 전형으로 삼은 체사레 보르지아가 여기서 벌어진 마상 창 시합에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중세 시대에도 이곳은 경연장 기능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13 세기부터 운동장 위에 가옥들과 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궁전들도 세워졌다. 1477년 식스투스 4세는 캄피돌리오 언덕 아래에 있던 시장을 이곳으로 옮겨 청과물 행상들뿐 아니라 도기상, 서적상, 인쇄소 등의 상점들이 들어선 번화가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광징이 유명해진 이유는 로마 바로크 시대를 대표한다는 점에 있다. 팜필리가의 인노 첸트 10세 교황은 가문 궁전 앞에 있는 이 광장을 소위 로마 시의 살롱(Salotto dell’Urbe)으로 만들고자 일대 건축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바로크 시대 로마 시의 면모에 뚜렷한 지문을 남긴 두 건축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 프란체스코 보르미니의 활약이 돋보이는 광장으로 변모하였다.
광장 중앙 한쪽에 가파르게 서 있는 산타네제 인 아고네 교회의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정면이 4대 강의 분수를 내려다보며 광장에 볼륨감을 주고 있다. 17세기 초반에 지롤라모 라이 날디와 그의 아들 카를로가 순교한 소네에게 봉헌된 중세 교회를 재건축하기 시작했는데, 뒤를 이어 정면 설계를 맡은 보로미니가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돌로 만든 음악’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교회 위 산타네제 상은 작가 불명의 작품으로 고결한 성녀의 고독한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교회 내부에는 입구 위에 인노첸트세 기념비가 있고, 제단 왼쪽 크립타에 이 교황을 포함한 팜필리가 인물들의 무덤이 있다. 운동장 관중석과 인근 건물들에 지어진 건축물이라서 지하의 방들에는 고대 모자이크 바닥과 구조물 유적이 남아 있다.
나보나 광장의 제일 큰 볼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4대 강의 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i)다. 1648년 시작해 1651년에 완성된 이 분수는 지구 상의대 강(나일, 갠지스, 다뉴브, 플라타 강)을 표현한 거대한 조각 군으로 그 위에 막센티우스 전차 경기장에서 나온 오벨리스크가 올려져 있다. 이 분수는 모양이나 색깔, 그림자뿐 아니라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 심지어 그 소리까지 장관을 이루는, 건축과 조각이 이루어진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걸작품이다.
1644년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열렬한 후원자, 우르바노 8세가 서거한 후 교황 자리에 오른 팜 필리가의 인노첸티 10세는 전임자의 무리한 건축 사업으로 심각해진 재정 상태 때문에 긴축정책을 펴야 했다. 그로서는 궁전 개축에 이어 가문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나보나 광장에 멋있는 분수를 세우고 싶었지만, 이 뛰어난 건축가를 부르기에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밖에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초조해진 베르니니는 교황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황의 사촌 여동생 올림피아에게 은으로 만든 모델을 선물로 보내는 작전을 폈고, 이를 본 교황은 어쩔 수 없이 분수 제작을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훗날 교황은 ‘베르니니의 모델을 보지 말아야 했는데, 한번 보면, 그걸 만들고 싶은 마음을 도저히 누를 수 없으니.’라고 토로했다. 미술사가 리처드 노턴은 “베르니니만큼 물의 예술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없다.”라고 극찬했다.
이 분수는 동굴을 이루고 있는 암초 네 모서리에 4대 강을 상징하는 거대한 대리석상들이 앉아 있는 모습니다. 베르니니의 구상에 따라, 갠지스 강은 조각가 클로드 푸생이, 나일 강은 안토니오 판 첼리작품인 플라타 강의 옆구리에는 동전들을 흩어놓았는데, 이는 아메리카의 부를 상징한다.다뉴브 강은 안토니오 라지 Antonio raggi의의 작품이다. 교황들의 문장과 사자, 뱀, 말, 아르마딜로, 두 마리의 돌고래가 배경을 장식하고 있다. 이 분수에 사용되는 물은 로마 시대 네로 목욕장에 물을 공급하던 아쿠아 베르지네 수로의 물이다.
한편 이 분수의 조각상들과 관련해서는 베르니니가 보로미니의 작품인 산타네제 교회 정면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교회 정면에 있는 조각상들은 하나는 손을 쳐든 모습으로, 다른 하나는 머리를 감싼 채 겁먹은 눈초리로 쳐다보는 모습으로 설계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위에 있는 성녀 상이 나일 강 조각에서 교회 정면이 안전하다는 점을 알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베르니니가 분수를 설계할 때는 아직 보로미니가 교회 재건 사업을 맡기 전이었으므로 이러한 이야기는 입심 센 자들이 지어낸 낭설일 뿐이겠지만,로마 바로크를 대표하는 두 대가의 무게를 짐작케 하는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기다란 광장의 양끝에는 2개의 분수가 있다.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무어 인 분수(Fontanna del Moro)와 포세이돈 분수(Fontana del Nettuno)가 그것으로, 남쪽 끝의 무어 인 분수는 베르니니가 돌고래와 싸우는 무어 인 모습으로 트리톤 Tritone(포세이돈의 아들)을 분수의 주인공으로 구상하여 조반니 안토니오 마리 Giovanni Antonio Mari가 조각했고, 반대편의 포세이돈 분수는 바다의 신이 문어를 잡는 모습으로 여러 작가들의 손을 거쳐 1878년에야 조각이 완성되었다. 광장에 분수 3개가 생긴 이래 1867년까지 매년 8월 주말마다 무어 인 분수와 4대 강 분수의 배수관들을 막아 넘쳐난 분수 물이 광장 전체에 고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장을 맨발로 뛰어다녔다고 한다. 무어 인 분수 앞에는 지롤라모 라이 날디가 건축한 인토 첸트 10세 가문 소유의 거대한 팜필리 궁전(Palazzo Pamlhili)이 서있었는데, 궁전 회랑의 궁륭형 천장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Pietro da Cortona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 궁전은 현재 브라질 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로마 시내에 나보나 광장만큼 축제 분위기에 어울리는 광장 없다. 이미 수세기의 전통을 가진 주현절(Befana) 축제 기간에는 장난감 좌판과 과자가게들이 즐비한 어린이 천국으로 변하고 평상시에도 행상들과 거리의 악사, 화가들이 여행자들과 산책 나온 주민들의 눈길을 끄는 명소이다.
나보나 광장 북쪽의 산타 폴리 나레광장에는 15세기 건축물인 산타 폴리 나레 궁전과 산타 크로체 교황청 대학 건물이 있다. 이 광장의 안쪽에는 고대 미술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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