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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도미티아누스 광장

by TES leader 2020.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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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운동장(stadio domiziano)

 

로마 시내에 있는 광장들 가운데에서 나보나 광장만큼 운치와 생동감을 동시에 드러내는 광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바로크 건축과 장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광장이 웅장미의 전형인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과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스페인 광장과 함께 로마 시 3대 광장으로 꼽히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연륜으로 치면 이 광장을 따라갈 광장은 로마 시내에 없다. 이 광장의 지하에는 그 모양이 기다란 타원형이라 전차 경기장 자리로 오인되는 운동장 (stadio) 유적이 남아 있다. 바로 이 유적이 도미티아누스 운동장인데, ‘운동장이라는 이름도 그렇지만 발굴된 유적지에서 전차 출발선이나 중앙분리대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전차 경기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오늘날의 나보나 광장 모양 그대로인 이 운동장 트랙이 발굴되었을 때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대단했다고 한다.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유적이 테베레 강 범람으로 쌓인 퇴적물과 흙으로 덮인 광장의 몇 미터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니, 그 놀라움은 상상할 만하다. 광장 북쪽 입구로 나가 왼쪽으로 꺾어지면 바로 이 운동장 입구 유적이 지하에 보인다. 스타디움은 그리스어 스타디온의 라틴어로1 스타디온이 185m가 된다. 오늘날 육상경기 종목이 거리에 따라 100m, 200m 등으로 나뉘어 치러지듯이 그리스에서는 스타디온 단위로 치러졌다. 이 스타디온이라는 말이 나중에 달리기와 멀리뛰기를 비롯해 투창, 원반 던지기, 레슬링 시합을 치르는 운동장을 지칭하는 말로 확대된 것이다.

 

스타디움이 등장하게 된 것은 그리스의 운동경기가 로마 세계에 도입된 결과였다. 그리스의 각종 공연 문화는 에트루리아를 통해 로마에 유입되었고, 운동경기도 에트루리아 인들에 의해 소개되었지만, 의외로 운동경기가 정식으로 개최된 것은 로마가 그리스 세계와 직접 접촉한 공화정 중기 이후였고, 그나마 로마 인들이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리스에서 유행하던 운동경기가 로마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경기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운동경기가 그들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이상화하고 널리 흩어져 사는 그리스 인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으로 작용하였지만,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끝없는 전쟁과 화평을 통해 힘겹게 제국으로 성장해 나간 로마에서는 외부세력을 흡수, 융합 시키는 게 중요했지 운동경기로 동족 의식을 고취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고, 동족이라 부를 만한 종족도 없었다. 또한 로마 인들은 경기에 직접 참가하기보다는 노예나 하층민이 부리는 재주를 보는 쪽을 더 즐겼다. 팽창, 정복 과정에서 양산된 노예들 중에는 로마 인들이 모르는 재주를 가진 자들도 있었으므로, 정복 사업에 혈안이 된 그들이 이 노예들을 경연의 도구로 삼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로마에서는 기혼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 연회나 축제에도 부인을 동반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므로 운동장에서 벌거벗고 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운동경기는 로마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으므로, 로마가 그리스 세계에 직접 개인 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운동경기가 조직되었다. 플라미니누스가 이스트 모스 제전에 참석하여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한 지 10년이 되는 기원전 186년 로마 시에서 그리스풍의 운동경기가 공식적으로 개최되었는데, 이는 사실 그리스 선수들이 참가한 경연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이유로 이후 공화정 말기까지 운동경기는 로마 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로마의 패권정책과 내란의 영향으로 운동경기의 본고장인 그리스의 경기 분위기가 침체한 점도 작용했다.

 

흥미로운 점은 제정 시대에 들어서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해 카리 굴라,네로, 도미티아누스 같은 황제들이 운동경기를 권장했다는 점이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과 이듬해의 이집트 정복으로 내전을 종결한 아우구스투스가 평화 정착에 전력을 기울임에 따라 그리스 세계도 안정을 되찾아 올림픽 경기가 다시 활성화하였고, 아우구스투스가 팽창정책 대신 방어정책을 택함에 따라 동방의 군주들이나 명사들이 볼모로 로마 황궁에 와 있었으므로, 이들의 영향이 로마의 권력층에 작용했다. 카리굴라와 네로, 도미티아누스는 로마 역사 서술에서 폭군으로 묘사되는데, 이들은 제정의 시조인 아우구스투스에게서 과시적인 행동의 선례를 찾았던 황제들이라 그 경향을 지속시킨 건 당연했다. 특히 네로는 60 5년마다 열리는 네로 이아 경기(Ludi neroia quinquennali)를을 만들고, 211회 올림픽을 2년 연기시킨 후, 67년 말 많은 그리스 여행에 나서 직접 올림픽 경기에 참가했다. 네로는 여섯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결과였으므로 훗날 경기 기록이 삭제되기도 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가 개선식과 경기를 치르기 위해, 그리고 기원전 28년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 기념식을 위해 마르스 평원에 운동장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임시 운동장이라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나보나 광장 밑에 잠들어 있는 도미티아누스 운동장이 로마 시의 유일한 상설 운동장이었다. 팔라티노 언덕 황궁 터에 남아 있는 경기장도 경마장(hippo-dromus)과 함께 운동장으로 이용되었지만, 황궁 내에 있는 사적 용도의 시설이었을 뿐이었다.

도미티아누스 운동장은 네로 이아 경기를 치르기 위해 네로가 설립한 운동장이 붕괴된 후 86년 경에 도미티아누스가 그 자리에 새로 건설한 운동장이었다. 길이가 275m , 폭이 106m에 수용 인원이 약 3만 명인 아치형 2층 구조의 운동 시설로 콜로세움이 화재로 피해를 입었을 때는 검투사 시합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운동장에서 모의 해전 경기도 치렀다고 하는데, 이에 필요한 물을 공급할 수도관 설비도 갖추고 있었다. 4년마다 거행된 제전에서는 그리스에서처럼 달리기, 권투, 원반던지기, 투창 경기가 치러졌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운동장 주변 건물들에는 음식점, 선술집, 유곽들이 늘어서 있었다.

 

3세기 초반 마크 리누스년) 때 발생한 화재 이후 한 차례 복구되었으며, 356년 콘스탄티누스세가 콘스탄티노플 시를 장식하기 위해 이 운동장의 대리석들을 탈취해갔다. 제국이 수명을 다하면서 이 운동장도 붕괴되어 서서히 흙으로 덮여버렸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도미티아누스 운동장은 박해와 관련된 비극적인 전설의 현장이기도 하다.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크리스트교 박해 때 열두세 살 먹은 한 소녀가 신앙을 고집해서 산 채로 화장을 당하게 되었는데, 최대한 쉬심을 느끼게 하기 위해 운동장 정면에 있는 한 유곽 앞을 화형장으로 정했고, 일부러 소녀를 벌거벗겨 놓고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창가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소녀의 긴 머리칼이 저절로 풀려 몸을 감쌌고 불길이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나 소녀는 무사했다고 한다. 결국 소녀는 한 병사의 칼에 맞아 순교했는데, 그녀가 남긴 말이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완벽하고 가혹하신 주님께 이 몸을 바칩니다. 사랑하고 영원히 흠모하는 주 하나님께 가렵니다.”였다.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후 로마의 크리스트교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고귀한 소녀에게 주님의 양이라는 뜻인 아네제 Agnese’란 이름을 붙여주었고, 8세기에 그녀가 순교한 장소라 여겨지는 아치문 위에 산타네제 인 아고네 Sant’ Agnese in Agone 교회를 세웠다. 우리에게는 성녀 아그니스로 알려진 성녀 아네제 이야기는 영국 시인 키츠의 시로 유명해졌는데, 성녀의 축일 전야에 샘물만 마시고 잠자리에 드는 소녀에게는 장래 신랑감이 꿈속에 나타난다는 내용이다. 노멘타나에 있는 산타네제 교회가 그녀의 무덤자리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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