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석조 상설 극장은 기원전 55년에 건축된 폼페이우스 극장(Teatro di Pompeo)이다. 이 극장은 미틸레네 극장을 모델로 했는데, 로마 극장들 중 가장 크고 화려했다. 정기 공연에 대한 로마 인들의 관심이 적지 않았고 연극이 라틴 족의 정서에 들어맞긴 했지만, 로마에서 상설 극장 설립이 늦게 이루어진 것은 로마 인들이 검약한 편이었던 데다 장시간 극장에 앉아 공연을 보느라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풍속에 반하는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설 극장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공연을 승인하고 감독하는 임무를 띤 켄소르가 보다 안전한 임시 구조물을 짓는 데 신경을 썼다면, 후임 켄소르는 그걸 없애버리는 임무에 충실해야 했다. ‘해체되기 위해 극장이 지어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극장들의 운명이 짧았다.
이탈리아 노예 반란을 진압하고 지중해의 해적들을 3개월 만에 소탕한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0년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함께 1차 삼두정치의 주역이 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딴 극장 신축을 지시했고, 5년 만에 완성된 극장의 개관식을 사자 500마리와 코끼리 18마리를 재물로 삼아 성대하게 벌였다. 목조로 된 임시 극장만 허용하는 관행을 피하기 위해 객석 중앙 발코니에 승리의 여신 비너스(Venere Vincitrice)의 신전을 안치하는 수를 썼고, 개관 기념 연설에서도 이 건물을 극장이 아니라 신전이라고 우겼다.
극장을 언덕 아래에 세워 자연을 무대 배경으로 삼는 그리스 극장과 달리, 무대 뒤에 벽으로 된 배경을 설치해 반원형 극장의 효시가 된 이 극장의 규모는 지름이 150m에 배경 벽의 폭이 90m였고, 관객 수용 인원은 1만 명 이상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무대 뒤에 폭이 135m에 길이가 180m인 거대한 직사각 열주 회랑을 조성해 자신이 정복한 종족들을 상징하는 14개의 조각상을 진열해놓았다. 이 열주 회랑의 끝에 위치한 방이 대 회의실로 현재 스파다 궁전에 소장된 폼페이우스 석상이 이 회의실 안에 서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권력 다툼이 이 극장을 무대로 전개되었는데, 크라수스가 죽어 삼두체제가 깨진 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권력 다툼은 내전으로 발전하였고, 4년 간의 내전에서 패한 폼페이우스는 48년 이집트로 도망치던 중 부하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로마의 일인자가 된 카이사르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44년 3월 15일 로마 고아장의 원로원 건물을 재건하던 중 임시 원로원으로 사용된 이 회의실 안에서 한때 사위이자 정적이었던 폼페이 수스의 석상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공화파 원로원 의원들의 칼에 찔려 눈을 감았다. 암살자 중의 하나인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총애한 젊은이이자 양아들이었는데, 브루투스의 모친과 카이사르가 공공연한 연인이었기에 친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죽어가면서, ‘브루투스 너도(Et tu Brute)’라고 한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 극장은 제정 시대에 수 차례 화자 피해를 입어 그때마다 재건되었는데, 5세기 초에 호노리우스 황제가 마지막으로 손을 봤다고 하니 제국이 몰락하는 그날까지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Largo di Torre Aregentina) B 신전 뒤 공중 화장실 유적 옆에 이 회의실 흔적이 남아있다.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Campo dei Fiori) 남동쪽 비쉬오네 광장(Piazza del Biscione)이 관객 출입구였으며, 그 앞의 건물 아래에 나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그로 타피나 길(Via di Grottapinta)이 나오는데 이 길이 만드는 반원형 공간이 오케스트라 자리다.
폼페이우스가 신전으로 위장한 석조 극장을 세워 상설 극장 건축을 금하는 관행을 깬 후 로마 시내에는 여러 개의 극장이 들어서게 된다. 아무리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로마 인들이라지만, 개인 권력자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혼미한 시대와 뒤이은 재정 시대에 한번 틀어진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기원전 13년 폼페이우스 극장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에 발부스 극장이 들어섰다. 이 극장도 폼페이우스 극장과 마찬가지로 현존하지 않는데, 마테이 궁전 지하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로마 시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극장이 마르첼로 극장(Teatro di Marcello)인데, 카이사르 시대에 착공된 이 극장은 기원전 17년에 완성, 100년에 한번 열리는 루디 세콜라리에 사용되었다. 기원전 11년,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3년에 19세의 나이로 요절한 조카 마르켈루스를 기리기 위해 이 극장에 마르켈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들이 없었던 황제는 이 매력적인 젊은이를 끔직이도 아껴서 외동딸 율리아와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았으나 조카의 죽음으로 수포로 돌아가버렸고, 다시 친구 아그리파를 사위로 삼아 후계 체제를 정리했는데, 아그리파도 기원전 12년 사망하여 후사 문제를 꼬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켈루스를 더욱더 잊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통일기념관을 끼고돌아 큰길로 따라가면 아치형 2층 구조물 위에 벽돌로 지은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마르첼로 극장 건물이다. 석회화 기둥으로 이루어진 2층 구조물은 1층이 도리아식이고 2층은 이오니아식이다(오른쪽의 응회석 기둥들은 근대에 추가된 것이다). 코린트식의 높은 벽체로 되어 있었다는 3층은 완전히 소실되어 지금은 전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이 극장은 전에 임시 목조 극장으로 사용되었던 자리에 들어선 반원형 3층 건축물로 지름이 130m, 높이는 약 33m였으며, 1만 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13세기 말경 사벨리 가문이 극장을 요새로 개조해 교권과 제권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았고, 16세기에 건축가 발다싸레 페루찌 Baldassarre Peruzzi 가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이 궁전은 사벨리 가문에서 오르시니 가문을 거쳐 카에타니 가문 소유로 넘어갔다. 1929년, 후속 시기에 추가된 일부 구조물을 제거하고, 보강 및 복원 작업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르첼로 극장 바로 옆에는 코린트식 기둥 3개와 장식 벽(fregio)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이 유적이 소 시우스의 아폴로 신전(Tempio di Apollo Sosiano)이다. 마르첼로 극장이 아폴로 신전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이유는 오래전부터 아폴로 신을 숭배하는 축제가 이 지역에서 열렸으며 이 축제에 연극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첼로 극장 뒤쪽에 극장 진입로로 이용된 오타비아 회랑(Portio d’Ottavia)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케킬리우스 메텔루스Q.. Caecilius Metellus가 기원전 146년에 건축한 회랑을 기원전 27년에 해체시킨 후 그 자리에 새로 회랑을 만들어 누이동생 옥타비아의 이름을 붙였다. 이 회랑은 직사각형의 이중 열 주식 회랑으로 수많은 조각상과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ㅎ녀재 남아 있는 부분은 202년 대화재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가 재건한 것으로 2열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된 입구 아치 문이다. 아치 문 오른쪽 아래 대리석 판에는 생선시장을 표시하는 라틴어 글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 생선시장이 있었던 점은 훗날 들어선 산탄젤로 인 페스케리아 Sant’ Angelo in Pescheria 교회의 페스케리아(어물전)라는 지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회라으이 나머지 잔해들은 마르첼로 극장 뒤쪽에 널려 있다.
이러한 극장들 외에도 지붕이 있는 음악회 전용 건물인 오데온 Odeon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세웠다고 하는데 마씨모 궁전(Palazzo Massimo) 아래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폼페이 유적지의 오데온에서 그 모양을 유추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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