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의 모습
로마 인들이 생각하는 세상은 도시들의 집합체였다. 오비디우스가 “로마의 도시 공간과 세계 공간은 같은 것이다(Romanae spatium est Urbis et orbis idem).”라고 한 것도 이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들의 세계 지배 방식은 정복한 땅을 자기들이 직접 통치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도시들을 로마식으로 바꾸거나 필요한 경우 로마식 도시를 만들어 이 도시들이 로마를 대신해 지역 통제 역할을 맡는 방식이었다.전성기에 제국민 수는 7,000만 명에 다다랐는데, 관공서와 광장, 신전, 시장, 극장, 목욕탕, 분수 등을 보유한 로마식 도시가 이들 제국민의 삶과 문화를 보편화하는 기반을 이루었다. 4세기 이상 유지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정복과 도시 건설에 뒤이은 도로망과 문화, 경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로마 시는 크고 무질서한 데다 일관성을 부여하기에는 너무나도 특수한 도시였기 때문에 제국 내의 도시들과 또 다른 특성을 보였다.
공화정 시대 로마 시는 사람과 신이 공존하는, 엄숙한 신전 옆에 시장이 서고 정육점 옆에서 재판이 벌어지는 한마디로 무계획, 부조화의 도시였다. 걸인들이 신전 계단 위에 누워 밤을 새우고,근처에는 행상들의 좌판이 늘어서 있고, 공공건물 아치 회랑 아래에서 창부들이 손님을 끄는 모습이 드물지 않은 일상의 모습이었고, 곳곳에 무너진 건물과 쓰레기 더미 사이로 새로 지어 칠이 마르지 않은 신전과 대리석 판을 덮은 부자들의 저택, 조성 중인 기념 건축물들이 생경하지만 또한 삶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광경을 연출했다. 이 도시는 중심부를 가르는 대로도, 이와 연결된 큰 광장도 없는, 도시계획인 전무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 & 발전된 혼잡한 도시였다.
로마 인들은 도시 모양이 정돈되지 않은 것을 기원전 390년 켈트 족의 로마 침입으로 인한 화재 탓으로 돌렸다. 서둘러 가옥들을 재건하기 위해 한 해 안에 짖는다는 조건하에 어디서든 돌을 구해오는 걸 허용하자, 사람들은 미관이나 옆집과의 경계선을 고려하지 않고 빈자리에 집을 지어댔고, 그 결과 남의 땅뿐 아니라 길거리까지 침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 건의 역사적 사건으로 로마가 혼잡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도시는 만성적인 화재, 지진, 홍수 피해로 끊임없이 파괴되고 재건되면서 그 무질서한 모습을 지속했다. 로마 시의 무질서한 도시 형태는 로마 인들이 세운 식민 시들이 군영 캠프 모양으로 아주 잘 구획되어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는 인위적으로 자리잡은 식민 시의 도심과, 로마 인의 기질이 그대로 배어들어 자연스럽게 발전한 도심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상점들이 늘어선 큰 길을 벗어나면 페데리코 펠리니(1920~1993년)가 영화 <사티리콘 Satyricon>의 첫 장면에서 보여주었듯이 거미줄 같이 얽히고설킨 골목과 그 양옆으로 지진이나 화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4~5층짜리 목조 임대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모습이 나타난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그 좁은 길을 잠식하는 가건물을 짓기도 했고, 실내에 위생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까닭에 오물과 쓰레기를 창문 밖으로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개들이 짖어대고 돼지들이 꿀꿀거리며 돌아다니는 혼잡한 길에 건축 자재를 옮기는 수레나 성 밖 묘지로 향하는 장례 행렬이 산 자들의 발길을 가로막는 모습이 서민들의 일상이었다. 그나마 낮에는 사람을 태운 마차가 시내에 들어올 수 없어서 혼잡이 덜한 편이었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정원이 갖춰진 반듯한 로마 가옥은 사실상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부자들의 저택이었다.
도로와 공공 건축물을 관리하는 에딜레스 Aediles들은 불법 건물이나 오물 투척꾼들을 적발하느라 감시의 눈길을 떼지 못했다. 사실 시 전체는 물론이고 특정 지역에 대한 계획적인 공공사업이 불가능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에 딜레스 제도에 있었다. 로마의 정무관들은 오늘날의 임명직 부처 장관과 달리 민회에서 매년 선출되는 무보수의 정치가였고, 특히 건축과 도로, 행사 조직과 운영을 책임지는 에 딜레스들은 예산, 결산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다음 공직에 선출되기 위해 자기 돈을 들여가며 선심성 활동을 벌였으므로 계획적이고 균형 잡힌 공공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웠다. 물론 예고 없이 추진된 공공사업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1년 임기와 자금 부족 때문에 지속적이고 세심한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은 후에야 가시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다. 그는 기원전 45년 자치시 법으로 집주인들이 집 앞의 도로와 보도 유지 및 포장상태 점검, 우물의 관리를 책임지게 했고,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부역을 부과하는 벌칙을 정했다. 건물 높이도 약 20m 선을 넘지 못하게 제한했다. 그러나 이렇나 조치가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는지는 의문이고, 도시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초기의 로마 시는 언덕마을(montes)과 농촌마을(pagus)로 이루어졌으나, 점차 동네(vicus)로 성격이 바뀌면서 행정구역을 나누게 되었다. 시 중심부에서 뻗어나간 길 위 중간중간에 구역 보고 신은 라레스 Lares 사당이 있어 이 보호 신을 모시는 주민들의 종교 공동체가 동네로 편입되었다. 동네와 구역은 정치, 행정적 성격을 갖게 되어 공화정 시대 로마 시내는 4개 구에 27개 동으로 된 행정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통합한 시기에 10만 명이 안 되던 주민 수가 공화정 말에는 거의 100만 명 수준으로 증가하였으므로 로마 시의 모습도 원래의 시내 중심이 커지면서 변모해갔다. 당연히 시 행정조직도 체계화되어 재정 초기에는 도시 전체가 14개 구로 세분되고 거의 200개의 동네로 늘어난다. 기원전 7년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를 모델로 삼은 새로운 행정조직에 따라 마르스 평원은 7,9구역으로 나누어져 시내에 포함되었고, 강 건너 바티칸과 트라스테베레는 14구역이 되었다. 시의 중심은 8구역 로마 광장과 10구역 팔라티노였지만, 중심점은 5개 구역의 접점인 메타 수 단스였다.
구역 개편과 더불어 아우구스투스는 소방대(Vigiles)를 창설하여 7개 구역에 하나씩 본부를 두고 인접 구역에는 분소를 설치해 야간 방범과 소방 임무를 맡겼다. 시내의 몇몇 선물에서 소방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트라스테베레의 소방대 분소(Excubitorium) 유적이다. 주간의 치안은 시경 부대가 맡았다.
제정이 시작되면서 벽돌과 대리석을 독점한 황제들은 여력이 있었지만, 로마 시에 대해 조직적 인도시 계획을 추진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조화로운 도시 발전 모델을 적용한다는 것은 자연 발생적인 기존의 가옥과 도로들에 손을 대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금과 물자가 있다 하더라도 도시 서민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건축 활동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불규칙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도시를 잿더미로 만든 네로 시대 대화재를 계기로 전면적인 도시 계획 사업이 추진되었다. 확실히 더 아름답지는 않지만 이전보다 크고 도시계획이 잘된 새로운 로마 시에 세워졌다. 거대한 궁전을 지어 의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네로가 이 이상적인 도시계획을 실현시켰다는 점이 로마 인들에게 찜찜했지만, 확실히 로마 시의 면모는 새로워졌다. 열주 회랑과 직선 도로, 석조 건물, 공용의 수로망이 이 시대에 이루어진 건축 사업의 가시적인 결과였고, 이는 도시 미관과 화재 예방의 차원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사실 로마는 강우량이 적은 데다 공화정 시대에는 가옥들이 언덕과 그 주변의 비탈길에 주로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수재의 위험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가옥이 밀집되어 있는 데다 열악한 취사 시설 때문에 화재 위험이 높았고 실제로 화재가 잦아 그 피해가 심각할 정도였다. 로마 인들에게 불의 양면성은 베스타 Vesta신전의 성화와 불 카날리아축제로 구현되는데, 불카누스 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무색하게 수많은 화재 피해를 겪었다. 기록에 나오는 건축들이 대부분 화재로 사라지거나 복구작업을 거쳤는데, 기원전 83년에는 성역에 속하는 캄피돌리오의 삼신 전이 소실되어 유피테르 Iuppiter신전에 소장된<시빌 리서> 연기로 사라져 버렸다.
빈민가를 휩쓴 수많은 화재들은 사상자와 이재민을 수없이 배출했는데, 불길이 번지는 걸 차단할 만한 공간도 없는 상태에서 전문적인 소방대도 운영되지 않아 작은 불길이 대형 화재로 커지는 게 다반사였다. 크라수스나 루푸스 같은 부유한 정치인들은 사설 소방대를 운영하여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돈 욕심이 많은 크라수스에 대한 소문 중에 화재가 났을 때 건물주가 건물을 헐값에 팔겠다고 할 때까지 진화작업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이들 사설 소방대의 활동은 개인의 이해관계에 좌우되었던 듯하다.
아우구스투스가 소방대를 신설했지만, 취약한 환경과 인구 증가로 화재 피해가 속출해 티베리우스 시다(14~37년)에 첼리오 언덕이 전파되었고, 클라우디스 때에는 아벤티노 언덕이 파괴되어 하역 노동자들이나 배우, 교사들이 살던 서민 구역이 귀족들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재건되었다.
네로 시대의 재건축 사업으로 구부러진 골목길과 무너질 것 같은 건물들이 몰려 있던 옛 도시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법으로 정한 간격을 지킨 아파트식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섰고, 큰길가에는 평평한 지붕구조의 열주 회랑들이 설치되어 화재 발생 시 그 위에서 화재를 진압할 수 있게 되었고, 석회조에 벽돌을 입히는 식의 불연성 자재를 사용한 건물 바닥과 지붕, 방화용 저수조가 화재 예방과 진화에 효력을 발휘했다.
물론 네로 시대 이후에도 로마 시는 몇 차례 화마에 시달렸지만, 화재보다 페스트나 외적의 침입이 더 무서운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했고, 화재의 범위도 소규모에 국한되었다. 사실 로마 시는 네로의 실각 이후 시내 중심부를 차지하고 들어선 황금 궁전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축물들이 서면서 오늘날 유적지에 남아 있는 모습을 갖게 되었다. 콜로세움을 비롯해 로마 광장이나 황제들의 광장(Fori imperiali)의 유적들 대부분이 네로 시대 이후의 건축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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