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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포로로마노(Foro Romano), 로마의 중심

by TES leader 2020.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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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심장, 로마 광장

(Forum Romanum, Foro Romano)

 

로마 인들이 세운 도시들은 대부분 십자로 중앙에 직사각형의 광장(forum)이 하나 있고, 신전과 공공건물들이 이 광장을 둘러싼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달리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에 위치한 로마 광장은 계획적인 구도에 따라 이루어진 게 아니라서 십자로에 있지도 않고 그 모양도 직사각형이 아니다. 이 광장은 로마의 역사 발전과 함께 그 모양과 기능이 바뀌어 다양한 건축물이 빼곡히 들어선 고대 로마 시의 중심이었다.

 

어원인 포리스(foris)가 문 밖의 공간 내지 입구, 현관을 의미하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원래 이곳은 외부와 내부의 접촉 장소, 즉 로마 인들이 처음 자리 잡은 언덕과 다른 종족들이 자리 잡은 언덕들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비가 오면 물이 고이는 늪지대였다. 벽도 없고 건물도 없는 이 개활지에 장날이나 종교 축일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시장 기능을 갖게 되었다. 이 후 언덕들이 통합되어 도시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됨에 따라 이 골짜기도 배수공사와 일종의 포장공사를 거쳐 도시의 심장부로 발전하게 되었다.

 

캄피돌리오 언덕 발치에 원로원(Curia)과 민회(Comitium)가 자리잡았으며, 베스타 신전, 사투르누스(Saturnus)신전, 야누스 신전, 카스토르 폴룩스 신전이 광장 주변을 둘러쌌고, 나머지 지역에 상점과 시장이 들어섰다. 이 광장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의 이름은 사크라 길(Via Sacra), 곧 성로로 이 신전들을 걸쳐 캄피돌리오 언덕 위의 유피테르 신전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로마 시가 확장을 거듭하고 광장도 여러 차례 모습을 바꾸게 되지만, 공화정 시대 로마 시의 중심은 항상 이 광장이었다. 연단과 문서 보관소, 감옥 등의 정치 행정 기구들이 추가된 광장의 북부 지역은 더욱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또한 캄피돌리오 언덕 기슭에 국가 공문서 보관소 건물인 타불라 리움(Tabularium)이 세워지면서, 물리적으로도 면모가 새로워진다.

 

광장 중앙부에는 상점가 건물들 옆에 바실리카 건물들과 종합시장(Macelum)이 자리 잡았다.광장의 신전들은 종교 목적 이외의 기능도 가지고 있어서, 콩코르디아(Concordia화해) 신전은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되었고, 사투르누스 신전에는 국고와 재정 문서 보관소가 있었다. 문서 보관소는 타블라리움 신설 후 통합되었다.

 

사크라 길의 남쪽 길가에는 귀족 저택과 상점들이 있었고, 벨라브로로 넘어가는 길인 유가리우스 골목길(Vicus Iugarius)은 놀이와 관련된 이름이 가리키듯이 놀이기구 공장과 상점들이 들어선 길이다. 투스쿠스 골목길(Vicus Tuscus)은 에트루리아 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사치품을 다루는 전문상점들이 모여 있었다.

 

제정 성립으로 로마 광장은 원래의 정치, 사법, 경제 기능을 상실하고 황제들의 업적 과시 장소로 전락하였다. 광장 중앙에 석상, 제단, 개선문 등 공화정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권력자의 기념물이 들어서고 건물들 사이 남은 공간에는 신격화한 황제들의 신전이 자리잡음에 따라 시민들의 제반 활동공간으로서 광장의 기능은 사라졌다. 광장 가운데에 있던 상점들이 없어지고, 종합시장도 에스퀼리노 언덕 위로 이전하였다. 더 이상의 공간 확보가 불가능해지자 황제들은 이 광장의 뒤쪽에 황제들의 광장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로마 인들은 원래 이름이 없었던 광장을 새로 생긴 광장들과 구분하기 위해 로마 광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과시간에 로마 광장은 공공 업무와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시내의 다른 지역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과 특징을 가진 데 반해, 이 광장에는 오전 중 발목까지 덮는 정장 시민 복인 토가(toga)를 걸친 정무관과 명사들, 이들의 수행원(accensi)과 피보호인(client), 무릎까지 내려가는 간편한 평상복인 투니카(tunica)를 입은 일반 시민과 머리 깎은 노예들, 심지어 희랍어로 떠는 동방인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어 갖가지 모습을 연출했다.

 

민회에서 정무관들을 선출한 시민들은 관객의 입장이 되어 그들이 원로원과 연단에서 정치극을 구경하고, 때로는 정치극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정무관들에게는 직책의 비중에 따라 국법으로 정해진 수행원이 있어서 이들이 장내 질서유지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반대 여론이 강할 때 정무관이 여론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고, 경찰도 군인도 없는 시내에서 군중이 폭력을 쓰는 경우 진압할 수단도 없었다. 프레토르들도 노상에 마련된 법정 위에서 둘러싼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민사 재판업무를 처리했다. 물론 바실리카가 지어진 후에는 법정이 바실리카 안에 자리 잡았지만,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 광장은 일과가 끝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교제 장소였기 때문에 공론이 형성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특정 인물의 스캔들이 얼마나 쉽게 퍼지는가는 카이사르에 대한 소문으로 잘 드러났다. 카이사르가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자 19세 때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와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풍문이 지독한 험담으로 나돌았던 것이다.

 

광장에 모인 군중이 순식간에 정치집단으로 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기원전 4세기의 일이다. 몰골이 초라한 한 노인이 나타나 주변에 모인 시민들에게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사비니 전쟁 때 농작물은 약탈당하고 농장은 불에 타버려 세금을 낼 돈이 없었다. 세금을 내려고 돈을 꿨는데, 갚을 능력이 없어 몸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채무노예로 팔렸다가 간신히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현실 정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러한 분위기는 채무법 폐지 데모로 발전하여 채무자의 인신 구속을 금지하는 결실을 얻어냈다. 이는 제도권 밖에서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등장할 수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데, 시민들이 모이는 광장이 항상 그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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