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로, 광장이 현직 정무관이 아닌 정치가가 의지를 관철시키는 무대로 쓰인 경우도 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초토화하고 있을 때 맞대결을 피하고 장기 소모전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전략을 들고 나온 원로원 의원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는 칸네 전투 패배로 5만 명이 전사하고 1만 4,000명이 포로가 된 비극적인 상황 때문에 도시 전체가 초상집 분위기에 빠졌을 때, 비록 현직 콘솔은 아니었지만 실의에 빠진 시민들을 진정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우는 걸 금지시키고, 시민들이 이에 동참하거나 떠나는 걸 막았다. 사태가 진정된 후 전면에 나서게 된 파비우스가 소모전으로 한니발을 궁지에 몰아넣은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갈등상태에 처해 있던 정치지도자들과 시민들이 공감대를 도출해내는 광경도 이 광장에서 연출되었다. 로마군이 북서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있는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오(Veio)를 포위하고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호민관들은 원로원과 정무관들이 전쟁을 질질 끌고 무책임하게 병사들을 비참한 상황에 빠뜨린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놓고 광장에서 정문관과 호민관들이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베이오 인들이 간밤에 공성 기구를 불태워버렸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원로원 의원들은 호민관들이 득세할까 봐 전전긍긍하였으나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공모를 받지 못해 출정하지 않은 기사층 시민들이 각자 자기 말과 마구를 동원해 참전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소문이 광장과 도시 전역에 퍼지자 평민들도 원로원 앞에 몰려들어 자기들도 보병대로 출정하겠다고 나섰다. 원로원은 공식적으로 답변하지도, 이들의 결의를 칭송하지도 않았지만, 의원 한 명이 이 화해 덕분에 로마 시는 영원불멸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소리쳐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갈등이 기쁨의 눈물로 승화 되는 장면이 광장에서 연출되었는데, 상황은 평민이 보인 애국심의 표출이기도 했지만 달리 보면 원로원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었다. 원로원의 조치는 신중했다.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로 기병대와 보병대 출정을 비준하고 출정할 병사들에게 1년치 급료를 약속했을 뿐 아니라 갈등의 소재였던 포위 중인 부대의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공약하였다. 이 사태 해결 방식은 내부 분규를 종식하고 도시의 장래를 밝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갈등의 수위가 사회조직을 분열시키는 수준까지 올라가기도 했는데, 정무관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해 분리 운동으로 발전한 사례로 5세기 중반의 2차 성산(Monte sacro) 사건을 들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동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10인 입법 위원회가 권력을 잡으면서, 위원장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사욕을 채우려 한 데 있었다. 평민 처녀 베르기니아에 반한 클라우디우스는 계책을 꾸며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했고, 말을 듣지 않는 처녀를 재판에 회부하여 이 처녀가 자신의 피호민이 부리는 여종이라고 주장했다. 처녀의 아버지가 군대에 나간 상태라 그녀의 유모가 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했으나 그녀의 약혼자와 외삼촌이 가세한 군중의 기세가 등등해 강제집행을 포기하고 다음날로 재판을 연기시켰다.
다음날 재판이 재개되어 최고 정무관 수행원인 릭토르(Lictor)들이 처녀를 체포하려 하는 순간, 군영에서 소식을 듣고 새벽에 돌아온 아버지가 자기 딸인지 확인할 기회를 달라고 애원해 승낙을 받자, 은행거리로 딸을 데려가 그녀의 운명을 한탄하며 죽여버렸다. 클라우디우스는 아버지를 체포하라고 명했으나 군중이 이를 가로막아 성문 밖으로 빼돌렸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릭토르들도 이 권력자의 명령을 거부하고 군중 편으로 넘어갔다. 클라우디우스는 집으로 도망쳤고, 평민들은 시내를 벗어나 아벤티노 언덕에 집결한 후 시내 중심에서 10km 정도 덜어진 성산으로 이동하였다.
사람들이 떠난 후 광장을 비었고, 시내에는 노인과 귀족만 남게 되었다. 시민이 없는 로마 시는 죽은 도시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궁지에 몰린 10인 입법 위원회는 시민들이 자기들에게 보복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굴복하였다. 이제 상황은 뒤바뀌어 처녀의 아버지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재판에 회부된 클라우디우스는 친지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투옥되자 자살하고 말았다.
신분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는 이 유명한 사건은 거리의 합법성, 이 광장을 무대로 삼아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법적 권력 행사에서 배제된 로마 인들은 광장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고,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무기는 집단적으로 광장을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북쪽의 캄피돌리오 언덕이 공용의 성지로 자리잡게 된 이유도 개방형 광장이 지닌 위력 때문이었다. 기원전 4세기 초반에 최고 지도자 카밀루스가 비리 사건을 이유로 켈트족의 침입으로부터 캄피돌리오 언덕 위 자기 집 앞에서 과거의 전투를 연상시키는 행동을 취하면서 이에 반발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광장에서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매우 강한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카밀루스는 할 수 없이 재판정을 캄피돌리오 언덕이 보이지 않는 성 밖 페텔 리누스 숲으로 옮겨야 했다. 결국 만리우스는 캄피돌리오 언덕 타르페아 절벽에서 처형되었으며, 만리우스의 저택을 파괴되고 그 자리에 유노 모네타(Iuno Moneta) 신전이 세워졌다. 이후 캄피돌리오 언덕 위에는 아예 개인의 저택이 들어서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졌다.
이처럼 광장은 희비극이 끝없이 연출되는 정치 무대였고, 공개적이고 개방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여론이 쉽게 형성되고 작용하는 곳이었다. 훗날 광장에 회랑형의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 것도 이러한 광장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광장이 열린 공간이었을 때에는 늘 군중의 힘이 작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므로, 공간을 차단하는 것이 그 가능성을 없애는 방법이었다. 개활지 공간에 각각의 독자적 기능이 부여된 건축물들을 배치함에 따라,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정치의식을 행사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가들의 과시 현장으로 변하게 된다.
로마 광장은 승전 장군의 개선 행사장으로, 또한 공적의 머리를 전시하는 무시무시한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개선장군이나 고위 정치가가 시민들에게 베푸는 향연이 밤늦게까지 계속되는가 하면, 군중이 보는 가운데 반역자나 외적이 처형되기도 했다. 승전 장군들은 환호하는 수많은 시민들 사이로 사크라 길을 따라 포로와 전리품을 앞세우고 개선 행진을 하였는데, 행렬이 광장을 벗어나 캄피돌리오 언덕에 오를 쯤에 포로들 중 적국의 왕이나 장수들은 북쪽 모퉁이의 감옥으로 끌려가 거기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사크라 길을 통과하는 또 다른 행렬은 명사들의 장례 행렬이었는데, 로스트라 연단 앞에 일행이 멈추고, 연사가 연단 위로 올라가 고인을 칭송하는 연설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유족의 울음소리와 나팔 소리가 섞여 얼마나 시끄러웠던지, 오비디우스는 장례식 때 여인들이 곡소리를 내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불평했고, 세네카는 고인이 듣고 벌떡 일어날 정도라고 비꼬았다.
또한 광장은 시민들이 여가활동을 하거나, 연극 공연, 검투사 시합, 운동경기가 열리는 다목적 공간이기도 했다. 주소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큰 건물이나 잘 알려진 길거리 이름으로 목적지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이루어진 남의 동네는 정말 낯설고 찾아가기 쉽지 않았다. 또한 동네는 열악한 주거 환경과 작업 공간에서 생활하는 일반 서민들에게 교제와 여가 활동에 필요한 공간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에게 제공되는 공간의 중요성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고, 이를 충족시켜주는 공간이 바로 광장 지대였다. 광장에 설치된 열주 회랑은 일상적인 만남의 장소였을 뿐 아니라, 공연 시 관객들이 햇볕이나 비를 피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한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로마 광장은 후대인들의 파괴 행위와 건축 자재 재활용을 위한 해체 등이 원인이 되어 폐허로 변해버렸다. 이 광장에 타격을 입힌 사건은 크리스트교의 승리였다. 크리스트교도들의 압력으로 성화가 영원히 꺼지고 원로원 안의 승리상이 제거되었다. 동시에 진행된 제국 분할과 라벤나 천도로 세계 중심으로서 로마의 위상이 깎이면서 광장도 옛날의 기능을 서서히 상실했고, 민족 침입 시기에도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10~11세기까지는 광장의 유적들이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타격은 1084년 서임권 투쟁으로 알려진 교황과 독일 황제의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발생했다. 교황을 도우러 로마에 진입한 시칠리아의 노르만 족이 불을 질러 광장의 대부분이 파괴된 이후 서서히 흙이 쌓여 유적들이 덮이기 시작했으며, 파괴되지 않은 건물들을 귀족들의 요새로 개조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들도 광장을 파괴한 공범이었다. 교황과 귀족들이 새로운 건물들에 장식재나 건축재를 공급하기 위해 신전들을 파괴하고, 기둥들을 옮겨다 기념주로 전용하였다. 대부분의 개선 아치들도 이러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는데, 완전히 해체되어 베드로 대성당 건축재로 재활용된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은 초원으로 변해 방목장으로 사용되던 로마 광장 지대에 대한 발굴 작업이 18세기에 개시돼 다음 세기에 가속화하였고, 1~2차 세계 대전 기간에 절정에 달했다. 한때 로마 광장은 로마 시대에 땅을 몰수당한 바쿠스(Vaccus)라는 귀족의 이름이 암소(Vacca)로 와전되어 캄포 바치니(Campo라 불렀는데, 흙으로 덮인 광장 지대에 확실히 드러나 있는 유일한 유적은 포카 황제의 기둥뿐이었다. 그나마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이런 경은 이를 ‘기반이 묻혀 이름을 알 수 없는 기둥’이라 했다. 이 광장에 서 있던 중세 시대의 건물들을 해체하고 8m 깊이의 흙더미를 치워서 유적들의 단편들을 찾아낸 것이 지난 한 세기 고고학의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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