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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포로 로마노(로마 광장)의 유적들 1

by TES leader 2020.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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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아 Curia(원로원)

쿠리아는 원래 부족의 하위 단위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로마 인들은 정치, 종교적 성격의 모임을 갖는 공공건물도 쿠리아 라 했으며, 로마 광장에 있는 원로원 건물도 쿠리아라 불렀다. 툴리우스 호스틸리우스(Tulius Hostilius) 왕이왕이 원로원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호스틸리우스 원로원은 기원전 1세기 초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어 기원전 80년 술라(Sulla)에 의해 재건되었고, 기원전 52년 클로디우스 장례식 때 발생한 소요로 완전히 사라졌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시작해 아우구스투스 때 완성된 율리우스 원로원(Curia Iulia)은 북쪽으로 약 10m정도 자지를 옮겨 세워졌는데 283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원로원 건물은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보수한 건물로 전면부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1937년 그 자리에 있던 중세 초 교회를 해체하고 벽돌 건물로 복원한 것이다.

원로원 건물은 내부 양쪽에 약 300석의 원로원 의원석이 있고 안쪽에 의장 연단이 있는 직사각형의 건물로, 좌석들의 뒤쪽 벽감들에는 기념상들이 놓여 있었다. 의장석 뒤에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가 갖다 놓은 승리의 여신상이 있었으나, 384~385년 이교도를 대표하는 인물인 심마쿠스와 설전을 벌인 성 암브로시우스가 이를 제거했다.

현재 원로원 건물 안에 있는 토가를 입은 황제 상은 원로원 뒤에서 발견된 것으로 트라야 누스 황제의 대리석상으로 추정된다. 트라야누스의 방벽(plutei)은 광장의 무화과나무 근처에서 발견돼 두 장의 대리석 부조 판으로 하나는 알리멘타(Alimenta)시행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체납 세금 장부를 없애는 내용이다. 알리멘타 제도란 트라야 누스 시대에 실시한 구호사업의 일종으로 국가가 지주들에게 자금을 대부해준 후 그 이자 수입을 빈민 자녀들에게 나눠주는 제도였다. 부조에 나오는 배경 건물들은 트라야 누스 시대 광장의 건물들인데 광장 가운데의 무화과나무도 나온다.

건물 내부의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모자이크 바닥은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다시 깐 것이고, 벽에 남아 있는 프레스코 그림들은 이 건물을 복원하기 전에 해체한 초 교회의 벽장식이다.

원로원 앞의 공간은 공화정 시대에 민회의 회합장소인 코디티움(Comitium)이 있었던 곳이다. 민회란 군사,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시민들의 회의체로, 코미티아라 일컬어졌다. 코미티아는 2개로 나뉘어 군사적인 목적의 회의체로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부족 단위의 정치적 회의체는 코미티아 쿠리아 타로 불렸다. 코미티움은 이러한 민회 모임을 갖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원래 계단 위에 둥근 무대 형태로 설치되어 있었으나, 1인 정권을인정권을 확립한 카이사르가 이를 없애버렸다. 제정 시대에 들어서면 민회가 형식적인 제도로 전락해 광장 안에 코미 티움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라피스 니게르 Lapis Niger(흑석)

원래 불카누스 Vulcanus(화장, 대장간의 신) 사당이 있었다는 원로원 앞의 공간으로 초대 왕 로물루스가 이곳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로마 인들은 죽음과 관련된 불길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 자리를 기피했고, 따라서 술라 시대에 이곳을 검정 대리석(Lapis Niger)으로 덮고 담장을 설치했으며, 이 때문에 흑석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작은 계단을 통해 발굴지로 내려가면 제단으로 사용된 평판으로 이루어진 고졸기의 유적이 나타난다. 이 제단 옆에 조각상 모양의 기둥과 고졸기 라틴어 비문이 적혀 있는 표석이 남아 있다. 비문에 여러 가지 기록이 들어 있지만, 완전히 확인된 구절은 단 하나이다. “이 곳을 침범하는 자는 지옥의 신들에게 바쳐지리라.”

 

툴리아눔 감옥 (Carcere Tullianum)

원로원 왼쪽에는 기원전 6세기부터 감옥으로 사용된 지하 2층 건물이 있다. 중세 로마 인들이 마메르 티누스(Mamertinus)감옥이라고 불러 지금도 그렇게 부르지만, 본래의 이름은 툴리아눔 감옥이다. 툴리아눔은 샘을 뜻하는 툴라(tulla)에서 나온 말로 샘물이 나오는 깊은 웅덩이를 감옥으로 개조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웅덩이의 중간 부분에 떡갈나무 판을 대서 층을 나누고 위층 바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죄수를 아래층에 투옥시켰으므로,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매우 어려운 구조였다.

감옥이 격리된 지역에 위치하는 오늘날과 달리 로마 시대에는 행정, 교통의 편의성 때문에 감옥이 재판소 기능을 가진 바실리카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바실리카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형사범이나, 키케로의 고발로 음모가 발각되어 죽은 카 틸리아(Catilina)같이 광장에서 벌어진 정치 집회에서 반역죄 죄목으로 체포된 정치가들이 투옥됐다. 이 밖에 포로로 잡힌 걱국의 지도자들도 감옥에 가두 어두 기도 했다. 기원전 104년 술라에게 사로잡혀 끌려온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Iugurta)와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시 갈리아 부족들을 이끌었던 베르킨게토릭스(Vercinegetorix), 69~70년 유대 반란 시 예루살렘을 지켰던 유대인 지도자 시몬 바르 죠이라(Simon Bar Giora) 등등 로마에 대항한 인물들이 이 감옥에서 굶어 죽어갔다.

현재 이 건물은 교회에 포함되어 있고, 네로 박해기에 베드로와 바울이 수감되어 있었다는 전설이나 간수들과 죄수들을 크리스트교 신자로 교화 시킨 베드로가 감옥의 벽에서 물을 샘솟게 하는 기적을 행해 그 물로 세례를 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성지순례 코스로 들어갔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된 후 일시적으로 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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