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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로마 개선문

by TES leader 2020.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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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Arco Trionfale)

현재 이 광장에 남아 있는 유적들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건축물은 티투스 개선문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문이다. 전자는 요새로 활용되어 파괴를 피했고, 후자는 언덕 발치의 외진 자리에 있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에 베스타 신전 바로 북쪽에 카이사르 신전과 나란히 서 있었던 아우구스투스의 개선문(Arco di Augusto)은 르네상스 시대 건축 붐의 희생양이 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여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이 개선문을 세웠으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인들에게 빼앗긴 군단 기를 되찾은 걸 과시하고자 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는 이후 이 칭호를 공식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기원전 19년에 개선문을 다시 세우게 했다.

3중문 형태의 이 개선문의 중앙문은 아치형 문이고 양 측면의 문은 대들보식 문으로 현재 중앙 문의 각주 기저부만 남아 있다. 개선문 상단의 벽장식 판(Atticus)에 경축 비문이 붙어 있었고, 그 위에 황제가 깃발들을 돌려받는 모습의 사두마차 상이 올려져 있었다. 1540년 해체된 개선문의 대리석 기둥들을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재로 재활용되었다. 개선문 중앙 아치의 내벽 대리석 판에는 공화정 초기부터 개선식의 영예를 누린 장군들과 콘솔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 판은 현재 카피톨리노 박물관의 늑대 방에 소장되어 있다.

 

 

광장에 남쪽 끝 팔리티노 언덕과 벨리아 능선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티투스의 개선문(Arco di Tito)은 유대 반란을 진압한 티투스(Titus) 황제(79~81)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81년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세운 것이다. 66년 체불된 공납금 문제가 불씨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폭동이 순식간에 유대 속주 전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네로 황제는 아프리카 총독 베스파시아누스를 파견해 사태를 처리했는데, 그 사이에 네로가 자살하고 로마 군대들이 내전을 벌여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 군대의 지지로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대신 진압 전쟁을 수행한 큰아들 티투스는 71년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한 후 수많은 유대인들을 팔아넘기거나 로마로 끌고 갔고, 예루살렘 시를 파괴하였다.

개선문의 아치 내벽에 있는 부조물의 장면 하나는 전리품을 실을 마차들이 티투스 황제 뒤를 따라가는 개선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일곱 가지 촛대(Menorah)를 비롯하여 예루살렘에서 약탈한 물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콜로세움 쪽에는 아마존 여인 모습의 로마 여신과 로마 인민의 정령, 승리의 여신이, 광장 쪽에는 티투스와 사두마차, 로마 인민의 나신 흉상, 원로원을 의미하는 토가, 말을 모는 로마 여신이 조각되어 있다.

티투스의 개선문은 높이가 15.4m에 폭이 13.5m, 두께가 4.95m 규모로 석회 콘크리트 구조물의 표면을 그리스의 펜텔 리코스 산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장식한 기념물로, 벽에 붙은 반원주 장식은 코린트식 기둥머리와 이오니아식 기둥이 결합한 모양이다.

이 개선문은 다행스럽게도 프란지파네 가문의 요새에 포함되어 보존되었고, 1821~1822년 피우스 7세 때 일부 모자라는 부분을 석회화로 채워 넣어 복원되었다. 콜로세움 쪽의 아티쿠스 비문은 잘 보존되어 있는 반면, 광장 쪽의 비문은 소실되어 피우스 2세가 복원 시에 새로 제작하였다.

 

 

광장의 북쪽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Arci di Settimio Severo)이 원로원과 로스트라 연단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간 것처럼 세워져 있다. 이 개선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193~211)의 치세 10주년을 기념으로 203년에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세운 기념물이다. 세베루스는 렙티스 마그나 시에서 태어난 첫 아프리카 출신 황제로 1,2차 파르티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개선의 영광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이 개선문은 벽돌과 석회화 구조물에 대리석을 입힌, 높이가 21m, 폭이 11m에 이르는 3중문으로 파르티아 원정을 묘사한 부조물이 압권이다. 중앙 아치 천장에는 승리와 사계절이, 측면의 아치 천장에는 강의 신이, 전면 벽에는 황제의 개선 행렬과 두 차례의 파르티아 전쟁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계단 위에 토대를 설치한 점과 장식 기둥이 벽에 끼워지지 않은 점이 특징으로 기둥 받침대에도 로마 병사들과 만족 포로들의 모습이 양각 부조로 새겨져 있다. 왼쪽의 작은 문과 내부의 계단을 통해 위로 오를 수 있게 되어 있다.

 

 

티투스 개선문을 지나 콜로세움 앞 광장에 이르면, 오른쪽에 중앙 아치문의 높이가 11.45m로 현존하는 3개의 개선문들 가운데 가장 크고 웅장한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Arco di Constantino)이 보인다. 이 개선문은 밀비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갈리아 공제로 즉위한 지주년이 되는 315년7월 25일에 원로원이 헌정한 것이다. 개선문은 외적에게 대승을 거둔 황제에게 헌정하는 기념물이었으므로, 사실 원칙대로 하나면 외적과 전쟁을 치르지 않은 콘스탄티누스는 개선문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기존의 건물과 조각상, 부조 판들을 이용 하여 만든 짜깁기 건축물로 미술 양식의 면에서 보면 스타일들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1994년 개선문 기반 발굴조사 결과, 기반은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졌고, 대부분의 장식물은 283년과 307년 화재로 부서진 기념물에서 떼어내거나 다른 건축물에서 의도적으로 뽑아낸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존 건축물의 장식을 빼다가 재사용한 첫 사례인데, 시각을 달리하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유적들을 보존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장식들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앞뒷면 원주에 세워진 8개의 조각상과 양 측면 상단, 중앙 아치문 안벽에 있는 부조 판들은 트라야 누스 시대의 것이다. 이 조각상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현재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지역)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트라야누스 광장에 세워놓았던 다키아인 포로들의 석상이다. 조각상의 얼굴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18세기에 새로 제작했다.

앞뒷면 중간의 원판 8장은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작품들로 지름이 2m가 넘는다. 남쪽의 원판들에는 사냥을 떠나려는 모습과 실바누스 제사, 곰 사냥, 디아나 제사가, 북쪽의 원판들에는 멧돼지 사냥, 아폴로 제사, 사자 사냥, 헤라클레스 제사가 조각되어 있다. 사냥 장면들의 주인공은 콘스탄티누스이고 제사 장면들의 주인공은 공제 리키니우스인데도, 하드리아누스의 동성애 파트너로 유명한 안티누(Antinoo)가 동행 인물로 등장하는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원작품에서 하드리아누스의 얼굴들만 당대의 두 황제의 얼굴로 조각된 석판들이 주변 인물들의 것과 다른 반상(모반의 상태)의 석판이라는 점으로도 확인된다.

앞뒷면 조각상 사이에 있는 높이가 3m 이상인 8개의 부조 판은 콤모두스(Commodus) 시대(180~192)에 세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념문에서 옮겨온 것으로, 이 또한 머리는 18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내용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행적에 관한 것으로, 남쪽은 만족 군장들의 황제 알현, 포로들이 끌려 나오는 모습, 병사들 앞에서의 황제의 훈시, 병영에서의 제사 내용이고, 북쪽(콜로세움 쪽)은 황제의 로마 도착과 출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모습, 만족 족장의 항복 장면을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작된 장식물은 기단의 조각들과 2개의 작은 아치 위의 기다란 부조 판, 양 측면 하단의 부조 판과 원판들이다. 6장의 부조 판들은 각각 밀라노로부터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출발, 베로나 공성, 밀비오 다리 전투, 콘스탄티누스의 로마 입성, 로마 광장 연단에서의 황제 연설, 카이사르 광장에서 돈 배급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2장의 측면 원판은 태양과 달을 상징한다. 불안한 정국과 끊임없는 외적 침입의 영향으로 예술 분야에서도 심각한 쇠퇴 현상이 나타나 4세기의 조각술은 매우 열악한 수준에 머물렀는데, 당대에 제작된 부조물들을 보면, 그 수준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개선문은 중세 시대에 망루로 바뀌었다가 이 지역을 철권으로 지배한 프란 지파네 가문의 요새 궁전에 포함되었다. 1804년 중세 건물들을 헐어냄으로써 개선문은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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